박제상은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눌지왕의 아우 복호(卜好, 삼국유사에는 보해로 나온다)를 구출하여 돌아온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장수왕은 박제상이 “우리 신라의 왕제를 돌려보내준들 대왕께는 아홉 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를 버리는 데 불과하지만, 우리 임금은 대왕의 덕을 끝없이 생각할 것입니다”라는 요지의 진언을 하자, “네 말이 옳다” 하며 복호를 풀어준다.
박제상이 복호와 함께 무사히 돌아오자 눌지왕은 크게 기뻐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박제상에게 일본에 잡혀 있는 또 다른 아우 미사흔(未斯欣, 삼국유사에는 미해)을 구출해 달라고 청한다. “내가 두 아우를 좌우의 두 팔과 같이 여기며 살아왔는데, 이제 겨우 한 팔만 얻었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이게 왕의 말인가? 21세기 민주 사회를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우리의 선조 박제상을 대하는 눌지왕의 태도가 너무나 뻔뻔하다. 눌지왕 또한 우리의 선조라는 점에서는 박제상이나 매일반 아닌가. 그나저나 점점 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한 시기인 탓에, 나라 전체가 아니라 왕 개인을 위해서라도 목숨을 버려야 하는 시대를 살다간 박제상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그런 점에서, 박제상을 두고 만고충신이 아니라 할 이는 없겠지만, 그 반대로 눌지왕을 두고 백세성군이라 찬양할 이도 없을 터이다.
신라는 눌지왕부터 ‘이사금’ 대신 ‘마립간’을 지도자의 칭호로 사용한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이 된다는 의미의 이사금 시대가 가고 권력이 센 자가 왕이 된다는 뜻의 마립간 시대가 온 것이다.
마립간 칭호가 사용된 때를 삼국유사는 17대 내물왕부터 22대 지증왕까지라 하고, 삼국사기는 19대 눌지왕부터 22대 지증왕까지라 하여 서로 다르지만,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의 5만 군대가 낙동강으로 들이쳐 남해안에 득실하던 왜구를 멸살하자 내물왕이 직접 고구려까지 찾아가 은공에 감사하는 예를 올린 것을 보면 눌지마립간 이후가 더욱 왕권이 강화된 때로 여겨진다. 눌지왕이 고구려와 왜국에 잡혀가 있던 볼모들을 돌아오도록 만드는 것도 어찌보면 그만큼 국력과 왕권이 강화된 덕분이 아닌가 추측해보는 것이다.
어쨌든 눌지왕은 강화된 왕권을 자신의 아우들을 구하는 데 유용하게 쓰고, 그 결과 박제상은 죽는다. 이후 신라를 불신하게 된 왜구는 줄기차게 쳐들어오고, 444년에는 마침내 금성이 열흘 동안이나 왜구들에게 에워싸이는 참상을 맞게 된다. ‘국제적 긴장이 풀어지고 유화 국면을 맞이하여 모처럼 안정을 누리던 신라’가 ‘동생을 구하려고 무수한 인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강토를 짓밟히는 수치를 당하’게 만드는 눌지왕 때문에 그런 곤욕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이이화, <이야기 한국사>).
결국 박제상은 일본을 향해 출발한다. 고구려에서 돌아오는 길로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율포(울산)로 달려가 버린다. 일견 인정미를 발휘할 줄 모르는 경상도 사내의 무뚝뚝한 막무가내인 듯하지만, 어쩌면 만나는 것이 도리어 아내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할 것이라는 배려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는 박제상의 아내가 바닷가까지 쫓아가 떠나가는 배를 향해 대성통곡을 하면서 “잘 다녀오시오” 했을 때, 그가 “내가 왕명을 받아 적국으로 들어가니 그대는 다시 나를 볼 기약을 하지 마시오” 하고 대답했다는 대목이 잘 증언해준다. 무사하다고,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거짓을 말할 수는 없으니 집에는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왜국으로 가지 않는다면 모를까, 어차피 떠날 일이라면 온 가족이 붙들고 울어 아내와 딸의 마음에 깊고 날카로운 상처만 낸들 무엇하리.
소문을 들은 그녀가 일본으로 떠나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처음 달려온 곳은 경주 남천 모래밭이었다. 그곳은 동경(경주)에서 율포(울산)로 출발하는 길목이다. 그러나 이미 남편은 까마득하니 사라진 뒤였다. 그녀는 거기서 목을 길게 늘이고 땅을 치며 울었는데 그 바람에 그곳 지명이 ‘길 장(長)’ ‘모래 사(沙)’를 써서 장사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혼절하여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바람에 친척들이 일으켜 세워도 다리가 뻗치지 않았으므로 그 일대 논밭을 사람들은 ‘벌지지(伐知旨)’라 부르게 되었다. 아직 한글이 창제되지 않았으므로 ‘뻗치지’를 한자로 적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결과 그렇게 벌지지가 된 것이다.
약간 시간이 흐른 뒤 박제상의 아내는 정신을 수습하여 다시 남편을 뒤쫓는다. 그런데 박제상 일행은 율포에서 제법 시간을 지체한 듯하다. 두 사람이 바닷물을 사이에 두고 애타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만약 그렇지 않고 뱃길 출항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면 이미 경주 남천에서 박제상을 따라잡지 못했던 아내가 바닷가에서 남편과 말을 나눌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박제상과 그의 아내 김씨가 부부 사이에 나눈 최후의 대화였다.
‘무사히 돌아오라’는 말과 ‘기다리지 말라, 다시는 못 볼 것’이라는 말을 주고받는 부부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 남편의 죽음이 확인된 후 몸은 돌이 되고 혼은 새가 되는 그녀였으니 두 사람의 금슬은 그 누군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경지였을 터이다. 그런즉,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 거의 1600년이나 지났다 한들 우리가 율포 바닷가에서 그 두 부부의 피 끓는 눈물을 무덤덤하게 지나칠 수는 없으려니.
치술령 정상에서 박제상의 무사귀환을 기다리던 아내는 결국 거기서 남편의 죽음 소식을 들은 듯하다. 아직 일본에 닿기 전이던 남천 장사 모래밭과 율포 바닷가에서는 그래도 죽지는 않고 다만 혼절을 하였다. 그래서 비록 몸이 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지막 기력으로 버티어 한 마디 말이라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치술령에서는 이윽고 숨을 거두는 것을 보면 거기서 동해를 바라보며 서 있는 중에 남편이 불에 태워져 죽었다는 처참한 소식이 전해진 것이 틀림없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아도 치술령 정상 부근의 작은 샘 참새미 물로 겨우겨우 연명을 해오던 그녀의 가냘픈 몸은 한순간에 폭삭 생명력을 잃고 돌로 굳어버렸으니, 그 돌을 빠져나가 한 마리 새가 된 그녀의 혼은 훨훨 날아 과연 어디로 갔을까. 이승에서 함께 못한 평생의 시간을 저승에서 다시 만나 남편과 더불어 영원을 누리기 위해 새가 된 것이니,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은을암으로 숨어들었지만 사실은 바다 건너 저 멀리 목도(박제상이 처형된 대마도)까지 날아갔으려니!
그렇다면 박제상과 그의 아내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온 나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지금까지 경주 남천의 장사 모래밭과 벌지지, 율포 바닷가, 치술령 망부석과 은을암을 모두 찾아보았으니 이만 하면 박제상에 대한 예의는 어지간히 차린 듯한데…….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고구려와 일본을 오가며 마침내 목숨까지 버리는 박제상과, 남편을 기다리다가 몸은 돌이 되고 혼은 새가 되는 그 아내의 순정한 마음을 생각한다면 이제 대마도에도 한번은 가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판단이 일어선다. 박제상이 불에 태워지고 목이 잘려 죽은 대마도에 가서 그의 영혼을 기려 세워진 비석도 손으로 한번은 쓰다듬어 보아야 할 것 아닌가.
대마도로 가는 배는 부산 국제선 부두에서 출발한다. 대마도가 비록 가깝지만 그래도 외국이라 아침 8시 40분까지 부두에 당도해 출국 절차를 밟아야 한다. 부산 국제선 부두는 부산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으니 다른 도시에서 대마도로 가려는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편리하다.
2008년 1월 21일 월요일 아침,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나는 국제선 부두에 들어선다.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 조는 듯 지친 듯 엉거주춤하게 앉고 누워있는 모양새를 보니 어쩐지 분위기가 밝아 보이지 않는다. 순조롭게 외국으로 나들이를 나가는 사람들이라면 얼굴 표정이 저럴 리가 없다.
혹시? 순간적으로 일어난 불안감은 이내 사실로 다가온다. 배를 타러 들어가는 출국 통로 위로 번쩍이며 지나가는 네온 글씨가 쾅 뒤통수를 때려온다. “기상 악화로 대마도 결항”…….
박제상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작은 배를 타고 동해 바다로 들어서지만, 나는 거대 초고속 현대 함선을 타고도 대마도로 가지 못한다. 박제상의 아내는 남편의 무사귀환을 기다려 치술령에서 물만 마시며 그토록 긴 세월을 고통 속에서 보내지만, 나는 오늘, 부산의 적당한 술집을 찾아 맥주를 마시거나 자갈치 시장에서 회나 한 접시 먹으면서 “내일은 출항을 하겠지” 하고, 그것도 단지 하루를 기다릴 것이다. 역시 나는 박제상이나 그의 아내 김씨 같은 분들과는 견줄 수 없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일행 중 한 사람이 뒤에서 큰소리로 말한다.
“내일까지 기다려도 헛수고랍니다. 화요일에는 대마도 가는 배가 본래 없답니다.”
[자료] 을은암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의 내용
은을암 隱乙岩 -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
은를암은 새(乙)가 숨은(隱) 바위(岩)라는 뜻이다. 이 바위에는 유명한 전설이 있는데, 신라 충신(忠臣) 박제상(朴堤上)과 그 아내에 관한 것이다.박제상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 재위 417∼458) 때의 유명한 충신이었다. 눌지왕이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두 동생을 몹시 보고 싶어했다. 박제상은 임금의 명령을 받아, 먼저 고구려로 가서 복호(卜好)를 구출해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해 귀국시켰으나, 일이 탄로나 자신은 붙잡혔다. 자신의 신하가 되면 많은 상을 주겠다고 일본왕이 달랬지만, 박제상은 끝내 신라 신하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일본왕은 심한 고문을 가해도 소용이 없자 박제상을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이곳 치술령(鵄述嶺)에 올라 일본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그 몸은 돌로 변해 망부석(望夫石)이 되고,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 이 바위에 숨었다고 한다.[자료] 치술령 정상 인근 망부천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의 내용
참새미(일명 望夫泉)
박제상이 고구려에 잡혀 있던 눌지왕(신라 제 19대 왕)의 둘째 동생 보해(寶海) 왕자를 구해오고 나서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바로 왜국(倭國)에 볼모로 잡혀 있는 셋째동생 미해(美海) 왕자를 구하러 가자 박제상의 부인(金校金氏)은 남편이 떠난 율포(현재 울산시 북구 정자)와 동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치술령 아내인 두동면 만화리(박제상의 처가 소재지)로 이사하여, 치술령 정상 부근(현재 망부석이 있는 자리)에서 남편의 무사귀환(無事歸還)을 빌면서 이곳 참새미 물로 연명(延命)하였다 하여 망부천(望夫泉)이라고도 하며, 훗날 지역 유림들이 그 정절(貞節)을 기리어 봄과 가을에 향제를 지낼 때 이곳의 물을 길러 목욕하고 이 물로서 밥과 제물을 지었으며 또한 이 샘은 겨울철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또한 물맛이 좋고 깨끗하여 치술령을 찾아오는 모든 분들에게는 고마운 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