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하나만 찍어도 달라 보이는 게 사람 얼굴이다. 안경을 쓰거나 머리 모양을 달리 하면 완전 딴 사람이 되기도 한다.
동네도 마찬가지다. 벽과 길, 계단 등에 조금만 손길을 더하면 동네가 달라진다. 흉물이 보물이 되는 모습을 많이 봤다. 버려진 정수장을 이용해 훌륭한 쉼터로 만든 선유도공원처럼 어찌 보느냐에 따라 물건의 가치는 달라지는 법이다.
낙산 꼭대기서부터 중턱에 걸쳐있는 서울 종로구 충신동은 달동네라 불린 곳이다. 오르기 힘든 곳, 겨울에 얼음이라도 얼면 손발이 묶이는 곳, 길이 좁아 자동차가 다니기 힘든 곳이 달동네의 특징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인 이 곳에 언젠가부터 사진동호회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곳"이라고 감탄사를 내뱉으면서 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서쪽으로는 대학로, 남쪽으로는 동대문시장이라는 번화가를 끼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사람 눈에서 벗어나 있었던 그 조용한 동네를 2008년 1월 두 번 찾아갔다.
70여년 된 이발관과 40여년 된 이발소
충신동은 1914년 9월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만들어진 동이다. 충신동이란 동명이 생긴 유래에 대해선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서북쪽에 조선시대 유학 최고 기관인 성균관, 동쪽에 4부학당 중 하나인 동학이 있어 유학이 성하던 곳이라고 해서 유학의 8대 강목인 '인의예지충신'에서 두 글자를 따왔다는 설, 또 하나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해당 지역이 조선시대 숭신방이었기 때문에 숭과 뜻이 비슷한 충을 썼다는 설이다.
충신동 여행은 이화동 사거리에서 율곡로를 따라 동대문 방향으로 달리다 왼쪽에 '낙산공원 가는 길'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올라가는 게 좋다. 동대문 이화대학병원쪽에서 올라가는 길, 대학로 동숭동쪽에서 올라가는 길, 이화동 우남이승만박사기념관 옆길로 올라가는 길 등 길은 여러 가지지만 이 길이 가장 낫다고 본다.
충신동과 이화동이 붙어 있어, 충신동 여행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화동도 함께 구경하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 소개하는 곳은 충신동을 중심으로 해서 낙산 부근 이화동까지 포함하는 지역이다.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아주 화려하게 치장한 '미화이발관'이 눈길을 끈다. 화려한 장식을 찬찬히 살피다 보면 '돌팔이는 쫄병' '뭐해'라는 장난스런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好思多心' '自先自知也'처럼 알듯 말듯 한 한자도 눈에 띈다. 장식은 이발소 주인이 직접 꾸몄다. 장난스럽게 보이지만 이발관은 무려 70여년이나 됐다.
골목동네를 다니다 보면 이발소를 유심히 보게 된다. 오래된 이발소가 여전히 운영 중이라는 것은 마을 사람들이 찾는다는 뜻. 이발소를 보면서 마을 사람들 품성이나 마음씀씀이를 짐작하곤 한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굴다리이발소가 나오는데, 그 또한 40년 이상 된 곳이다. 40년 이상 된 이발소를 두 곳이나 갖고 있다는 것은 마을 사람들에겐 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을 사람들을 둔 이발소 또한 복일 것이고.
국립민속박물관은 지난해 문을 닫은 서울 소격동 화개이발소를 모두 소장하기로 결정하고 내부 시설을 옮긴 바 있다. 1952년 문을 연 이 오래된 이발소를 근대문화재로 인정한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충신동엔 좋은 근대문화재가 두 곳이나 있는 셈이다.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한쪽 벽면에 봉제노동자 두 명을 그린 큰 그림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그림은 동네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충신동과 인근 동네인 이화동 일대엔 2000여개가 넘는 소규모 봉제공장이 모여 있다. 그림은 공공미술프로젝트 소속 미술가들이 만들었다.
2006년 9월 문화관광부가 소외계층 생활개선을 위한 문화사업으로 시작했다. 전문 미술가들이 만든 작품도 있지만 동네 학생과 노인 등 주민이 참여한 작품도 있다. 일반 가정집만 꾸민 게 아니다. 길거리 콘테이너 박스에도 나무를 그리고, 혜화경찰서 동숭치안센터는 주민들 말을 귀담아 듣겠다는 뜻으로 큰 귀를 달았다.
굴다리에서부터는 공공미술 작품이 연이어 나타난다. 벽 양쪽엔 주민과 미술가들이 그린 그림들이 타일 형태로 벽에 붙어 있다. 오르막 한 쪽엔 달팽이 그림과 함께 '천천히'란 글씨가 쓰여 있다. 앙증맞다. 이 길은 달팽이 껍질처럼 360도를 돌아서 동네로 들어간다. 한 바퀴를 돌아야만 보이는 동네라니… 재미있다.
진입로 입구에 있는 집은 절벽 위에 세워져 아슬아슬하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온 절벽도시 '미나스 티리스'가 문득 떠오른다. 길 위엔 사람 캐릭터 두 개가 앉아 있다. 원숭이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한 두 캐릭터 표정이 재미있어 자연스레 웃게 된다.
길 방향으로 곧장 나아가면 그림계단길이 나온다. 꽃과 새 그림이 계단과 아주 잘 어울린다. 미술관에서만 보는 그림만 작품이 아니라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길에 그려진 그림도 작품일 것이다. 공공미술의 취지가 그렇다.
공공미술이 박수만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관리 측면에선 비판을 하는 이들이 있다. 칠이 벗겨지거나 작품이 망가졌을 때 보수를 누가 하는지 관리주체가 뚜렷하지 않다는 것과 그림이 작품이 낡게 되면 오히려 흉물이 될 수 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비판이 필요하겠지만, 진행하면서 보완해야 할 사안인지 그만두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선 분명히 판단을 내렸으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볼 일 보시는 분, 추위 떨지 말고 노크하세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속살 여행이다. 꽃 계단과 새 계단쪽엔 나무전봇대가 많다. 연이어 네 개가 나타나는 곳도 있다. 쓸 만해도 싫증나면 버리는 요즘, 나무전봇대가 이렇게 많이 남아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계단 양쪽 길과 집은 반듯한 편이다. 오르막길을 곧장 오르면 성벽이 보인다. 낙산성곽이다. 성벽 밖으로 보이는 동네가 창신동이고 안쪽이 충신동 이화동이다. 조선시대 서울은 성벽 안쪽이었으니 성벽 밖으로 보이는 저 거대한 지역이 모두 과거엔 변두리였던 셈이다.
여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팔각정이 보인다. 서울 경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서울 내사산인 북악산, 인왕산, 남산을 비롯 북한산까지 볼 수 있다. 팔각정 옆엔 조그만 밭이 있는데 '홍덕이밭'이다. 병조호란 때 중국 심양에 볼모로 잡혀간 봉림대군(효종)이 당시 나인이었던 홍덕이의 김치맛을 못잊어 귀국한 뒤 명해 만든 밭이다.
성벽을 따라 내려오다 충신동 남쪽 골목에 들어서면 복잡한 길을 만나게 된다. 골목길을 다니다 보면 벽보나 낙서를 조심스레 살펴보게 된다. 벽보나 낙서를 통해 마을 사람들의 관심사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쓰레기 버리지 말라'는 벽보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공통 관심사다. 충신동에서 본 가장 흥미로운 벽보는 '우리집 화장실을 이용하라'는 내용이었다.
"추운 겨울날 밖에서 볼 일 보기 추우셨죠? 노크하세요. 문 열어 드릴께요. 화장실 사용하세요. 밖에서 볼 일보다 사람 지나가면 부끄럽잖아요. 꼭 노크하세요."
외국인에 대한 배타 감정이 섞인 글도 보았다. '쓰레기 버리지 말라'는 글과 함께 "특히 외국인은 잡히기만 하면 불법체류자로 한국에서 쫓아낼 것"이라는 경고를 덧붙였다. '화분 흙 가져가지 말라'는 경고도 다른 곳에선 못 본 내용이었다.
자전거를 끌고 골목을 누비는데, 동네 여자아이 둘이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노는 모습이 보였다. "안 춥니?"라고 했더니 못들은 체한다. 아이들이 어른과 장난을 치고 싶은 모양이다. 아이들은 "아저씨 말투가 이상해, 자전거 타고 뭐하시는 거예요?"라면서 당돌하게 묻는다. 그러면서 둘이서 '깔깔깔'대며 웃는다. '꼬맹이'라고 놀렸더니, "우리도 학생"이라며 손가락 일곱 개를 편다. 그리고 도망가면서 '메롱'하고 혀를 내민다.
골목엔 역시 아이들이 놀아야 한다. 날이 풀려서인지 뛰어다니며 '깔깔'거리는 아이들 무리를 몇 번 봤다. 날이 풀려도 길에서 놀지 못하는 곳이 태반이다. 자동차가 빵빵거리며 비키라는 신호를 수시로 보내기 때문이다. 예전엔 길이 놀이터였지만, 지금은 동그란 울타리 안에 놀이터란 곳이 따로 있다. 벽으로 둘러싸야만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세상이다.
자전거를 타고 또 다른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할머니 한 분이 힘겹게 오르는 모습을 봤다. 그 길은 길이 워낙 가팔라 자전거를 타고 내려갈 마음을 품지 못한 곳이다.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한 발짝 옮기고 잠시 쉬고 또 한 발 옮기고 잠시 쉬며 길을 올랐다. 평지였으면 참 편했을 것이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 곳 집값이 싼 이유는 지형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지형이 편리했다면 이미 개발돼서 비싼 집들이 넘쳐났을 것이다. 그랬다면 돈 없는 서민들이 설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대규모 재개발이 되면 결국 원주민 대부분은 동네를 떠난다. 편리하다는 게 꼭 좋기만 한 것일까.
1월 말에 충신동을 찾았을 때 길 곳곳엔 고급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넘쳤다. 사람들이 찾아오는 마을이라면 그만큼 동네 가치가 올랐다는 뜻일 게다. 아파트를 세워 집값을 올리는 방법도 있지만, 이처럼 공공미술을 통해 문화 가치를 올리는 방법도 있다. 충신동 꼭대기서 본 시원한 경치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이 계속 눈에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