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사 석조여래좌상
탑골을 나와 미륵골로 가는 길은 마을 사이로 이어진다. 미륵골 보리사(菩提寺)까지는 차를 운행할 수 있어 가파른 길을 서너 번 굽이돌아 올라간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절 안으로 들어가니 최근에 지은 법당과 종각 등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 당우를 지나 왼쪽으로 가니 오래된 3층석탑이 눈에 띈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가 있고, 그 위에 상륜부가 거의 완벽한 모습이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탑이 문화재가 아닌 것을 보면 탑재의 상당 부분이 복원된 것 같다. 다른 곳은 몰라도 상륜부는 최근에 새로 만들어 붙인 것이 분명하다. 이 탑을 지나 왼쪽으로 계단을 오르면 절의 왼쪽 산록 아래에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36호)을 만날 수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의 공식 명칭은 미륵곡 석불좌상이다. 이 부처님은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 석불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신라시대 여래상의 형상과 장엄을 설명할 때 대부분 이 부처님의 도상을 인용한다.
여래좌상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가장 아래 연화대가 기단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위 중심부에 부처님이 앉아 계신다. 마지막으로 이 부처님 뒤를 신광과 두광이 결합된 광배가 감싸고 있다. 연화대는 하대석인 복련, 중대석인 8각기둥, 상대석인 앙련으로 이루어진다. 여래좌상은 손과 발, 몸체, 머리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몸은 가사를 걸쳤고 머리는 나발과 육계로 이루어져 있다. 광배는 연꽃과 화불 그리고 화염으로 이루어진 보주형 장식이다.
석가여래좌상의 첫 인상은 좀 근엄한 편이다. 그러나 위치를 바꾸어 올려다보거나 옆에서 보면 자비로운 미소가 나타난다. 이렇게 완전한 모습의 부처님을 아주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것은 큰 영광이다. 넓은 대자연의 품속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중생들을 굽어볼 수 있는 것도 보리사 석불좌상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그러나 반대로 비바람에 노출되어서인지 얼굴 윗부분에 거무튀튀한 이끼가 끼어 있다. 이것만 없다면 부처님의 상호가 훨씬 더 거룩하고 자비로웠을 텐데 아쉬운 생각도 든다.
석조여래좌상의 광배 뒷면에는 약병을 든 약사여래가 낮은 돋을새김으로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해 상호를 정확히 알아볼 수 없으나 오른 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약병을 든 채 배 앞에 대고 있는 게 보인다. 몸과 머리 뒤로는 광배가 있으며 화염 무늬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뒤쪽 약사여래를 관찰하다 보니 광배의 상단 부분에 최근 연결한 흔적이 나타난다. 문헌 자료에 의하면 광배의 윗부분이 훼손되어 나중에 다시 붙였다고 한다.
마애여래좌상에서 문천 앞 들을 내려다보니
석조여래좌상을 보고 주차장으로 돌아온 다음 다시 산 쪽으로 샛길을 따라 50m쯤 올라가니 가파른 언덕 기울어진 돌에 마애여래좌상이 보인다. 바위면을 약간 파내고 돋을새김을 해 마애불치고는 입체감이 뚜렷하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돋을새김의 정도가 비슷해서 일관성이 있다. 그러나 길의 경사가 하도 심해 석수장이가 이 마애불을 어떻게 조각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부처를 보는 우리도 정면에서 여유를 가지고 보기가 어렵다.
양쪽 눈과 뺨에서는 잔잔한 미소를 볼 수 있는데 인중 부분이 짧아 미소가 시원치를 않다. 연꽃대좌 위에 앉아 있는 불상으로 전체적으로 조각수법이 거친 편이다. 손과 발은 가사에 가려 있으며, 가사가 양쪽 어깨를 덮어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앞에 본 보리사 석불좌상보다 후대에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데, 통일신라 말기 불상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높이는 1.1m에 지나지 않으나 발아래로 급하게 경사가 져 전체적으로 높은 하늘에 떠 있는 느낌이다. 이곳에서 앞을 내다보면 문천 너머 가까이에 선덕여왕이 잠들어 있는 낭산이, 그 뒤로 명활산성과 보문단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황룡사지 너머로 경주 시내의 모습도 보인다.
헌강왕릉은 둘레석이 4단이다 우리 일행은 마애불을 내려와 다시 차를 타고 산림환경연구소와 화랑교육원을 지나 헌강왕릉으로 간다. 헌강왕릉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오른쪽 산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야 한다. 차에서 내려 한 50m쯤 소나무 길을 따라가니 아주 단순한 형태의 능이 나타난다. 신라 49대 헌강왕의 능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헌강왕은 경문왕의 태자로 875년 즉위했다. 그는 성품이 총민하고 독서를 좋아하여 눈으로 한 번 본 것은 다 입으로 외웠다고 한다. 그는 또한 내치와 외교를 비교적 잘 하고 886년 세상을 떠난다. 시호를 헌강이라 하고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헌강왕과 관련된 이야기는 또한 <삼국유사>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조에 나온다. 처용랑은 처용가와 처용무로 우리에게 알려진 그 처용이고, 망해사는 울주군 청량면 율리에 있는 절로 동해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제49대 헌강대왕 때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어느 날 대왕이 개운포(현재: 울주[蔚州])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지면서 길을 잃었다. 신하들이 이것을 용의 조화로 보고 좋은 일을 해서 풀도록 아뢰니, 왕이 그 용을 위해 절을 짓도록 명령한다. 그러자 동해의 용이 아들 일곱을 데리고 나와 왕의 덕을 찬양하며 음악을 연주하며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 중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와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이 처용이다. 왕은 서울로 돌아오자 이내 영취산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망해사라 했다. 이것은 용을 위해 세운 것이다.”
헌강왕릉은 1993년 발굴을 통해 내부 구조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석실 내부는 남북이 2.9m, 동서가 2.7m이다. 벽면은 비교적 큰 깬 돌을 이용하여 상부로 갈수록 안쪽으로 기울게 모서리를 죽이는 방식으로 쌓았다. 석실 입구에 돌문, 문지방, 폐쇄석, 묘도를 갖추고 있으며 연도의 크기는 길이 142㎝, 너비 128~96㎝이다. 석실 내에는 서벽에 접해서 2매의 판석으로 된 시상석이 있다. 외부는 원형봉토분으로 하부에 4단의 둘레석을 둘렀다. 봉분의 높이는 4m이고 지름은 15.8m이다.
정강왕은 1년밖에 통치하지 못했다 헌강왕릉에서 정강왕릉은 걸어갈 수도 있으나 큰 길로 나와 차를 타고 정강왕릉 입구에서 걸어갈 수도 있다. 우리는 차를 능 입구에 대고 걸어갔다. 정강왕릉 역시 길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정강왕은 헌강왕의 아우로 1년의 재위 기간 동안 어렵고 좋지 않은 일이 많이 일어났다. 나라의 서쪽에 가뭄이 들고 한주(漢州)의 이찬 김요가 반란을 일으키고 왕도 즉위한 다음해 병에 걸려 죽고 만다. 시호를 정강이라 하고 헌강왕처럼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정강왕릉은 봉분의 높이가 4m, 지름이 15m인 원형봉토분이다. 봉분 하단에는 2단의 둘레석을 돌렸는데, 헌강왕릉의 4단과 대비된다. 봉분 앞에는 1매의 판석으로 된 상석이 있고, 그 앞에 다듬은 장방형 화강석으로 축조한 석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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