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가 올랐네요.”
“선생님, 다른 항암제로 바꿔주세요.”
“바꿀 만한 항암제가 없습니다. 1세트 더 맞아보세요.”
“1세트 맞은 후 검사하면 수치는 더 높아질 텐데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2007년 8월 7일. 1년 6개월간 항암치료를 받은 아내에게 마지막 남아 있는 희망마저 날아가게 한 서울S병원 산부인과 의사와 나눈 대화다.
항암제 치료에 용기와 희망 가진 아내2005년 12월 27일. 호남지방에 대설주의보가 내릴 정도로 눈이 많이 왔다. 아내를 병원 앞에 내려주고 주차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서둘러 병원 2층 계단을 올라가는데 계단 난간을 잡고 힘들게 내려오던 아내는 나를 보자마자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말을 했다.
“여보, 나 3기말이래.”
혼자 ‘난소암 3기말’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병원 계단을 넘어질 듯 힘없이 내려오는 아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가슴을 쥐어짜는 고통과 함께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 힘없는 손가락으로 컴퓨터 검색창에 ‘난소암’을 쳤다. 난소암에 대해 많은 정보가 올라와 있었다. 그 중에 ‘3기말은 5년 이상 생존율 30%’라는 내용이 눈에 크게 들어 왔다. 절망적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때 ‘아내보다 더 강해져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아내 앞에서 한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고 가끔은 지나칠 정도로 자신만만했다.
"당신 병은 꼭 나을 거야. 30% 생존율이니까, 1등하면 좋고 아니면 30등이라도 하자"라며 난 아내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2006년 1월 10일. 전남화순에 있는 암 전문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전이된 암세포를 최대한 잘라냈다는 의사 말을 듣고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을 수 있었다. 수술 후 항암제 치료가 시작되었고 후유증에 시달렸다. 독한 항암제는 머리카락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또 몸 구석구석 발바닥까지 고통을 주었다.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면서 눈물을 참는 아내, 오히려 미용사를 위로하며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신체의 고통과 불편함은 항암치료 후 얼마간 병이 호전되면서 감내했지만 항암치료 6개월 뒤 다시 나빠졌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에서 유명하다는 의사를 찾아 나섰다. 그곳이 서울S병원이다.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만 보아도 가슴이 답답하다'는 아내, 나와 함께 가지 못할 때는 얼마나 지루하고 외로웠을까. 고3 아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광주에서 서울까지 1년여 동안 왔다갔다 했다.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참고 견뎠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라는 의사의 말 뿐이었다.
항암제를 맞는 동안에도 암세포는 아내의 몸 다른 곳으로 전이가 계속되었고 항암 중에도 암은 전이가 된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 암은 아내 가슴 쪽으로 많이 전이가 되어 숨을 크게 들여 마시지도 못했고 고통 때문에 기침도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했다.
난소암 환자 '항암제 치료' 효과 없어 허탈지난해 8월 10일, 급격히 체력이 떨어져 항암을 포기하고 민간요법과 대체의학을 시작했다. 많은 암 환자들이 그렇듯이 항암제로 진을 다 빼고 뒤늦게 찾은 게다. 게다가 2007년 10월 24일 KBS 뉴스를 보면서 아내와 나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난소암을 항암제로 치료할 수 없는 원인에 대한 연구결과 보도였다.
이제호 성균관대 분자치료연구센터장은 암 환자에게 항암제를 투여할 경우 대부분은 암을 억제하지만 때때로 암을 촉진하는 경우도 있다며 난소암에 항암제가 듣지 않는 구조를 처음으로 분자생물학적으로 밝혀냈다.
일반 암 환자에 항암치료제를 투여하면 체내에서 '인터페론 반응 단백질'이 생겨나 암세포를 죽이는 물질을 만들어 냄으로써 암을 억제한다. 그런데 항암제가 듣지 않는 난소암 환자의 조직을 관찰한 결과 인터페론 반응 단백질이 다른 단백질의 변형을 막아 주는 스모 단백질과 과다 결합해 암과 면역 이상을 유발하기도 한다는 것.
1년 6개월간 수많은 고통을 참고 맞았던 항암제가 전이를 촉진시켰다니, 이렇게 허탈할 수가! 정말 기가 꽉 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아내에게도 연구 결과가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이제호 성균관대 분자치료연구센터장의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 전에 대부분의 산부인과 의사는 난소암인 경우 ‘예후가 좋지 않다’고 한다. 왜 그런지도 모른 채 암 환자에게 ‘항암제’라는 불변의 등식으로 치료를 했지만 결과가 나빴기 때문이다. 많은 난소암 환자들은 항암제로 몸 전체가 범벅이 되어 몸서리치는 고통에서 허우적거리다 생을 마감한다.
아내는 외국과 달리 난소암 환자가 민간요법이나 대체의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적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학계의 막강한 힘을 싫어했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 하늘을 보면...
그후로도 아내는 마지막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엄마로서 아내로서 꼭 곁에 있겠다며 견디기 힘든 치료를 참아냈지만 2007년 12월 28일 오후 3시 15분 결국 사랑하는 아들딸과 남편, 가족을 두고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났다.
하얀 첫눈이 내리는 날 아내는 모든 것을 가슴에 묻은 채 걸어 왔던 길을 하얀 눈으로 덮고 천주교 교원묘원 부활의 집(납골당)에 안치되었다. 결혼 21주년을 두 달 십육일 남겨 놓고….
고3 아들에게 엄마 역할을 하지 못해 내내 가슴 아파했는데 이번에 고3이 되는 딸을 또 시어머니께 부탁하고, 군 입대를 앞두고 있는 아들을 두고 눈에 밟혀 어떻게 발을 뗄 수 있었을까.
차디찬 겨울날 떠난 아내지만 아픔이 없는 곳, 고통이 없는 곳에서 편안히 쉬길 기도하며 아내가 이승에서 환자로서 느끼고 희망했던 것들이 고쳐지길 빈다.
‘눈물이 나고 엄마가 보고 싶을 때 하늘을 보면 그곳에 엄마가 있다.’
아들딸에게 말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늘에서 아내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