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심스러운 절 안심사 충북 청원군에서는 유명 사찰인 안심사를 찾았다. 안심스러운 절이라서인지 올라가는 길 내내 마음도 절로 편안해 진다고 할까? 편안한 마음으로 통일신라 혜공왕 11년(775)에 진표율사가 제자를 길렀다 해서 안심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작은 절이지만 아담스런 규모이다. 주 건물은 대웅전(보물 제664호)으로 확실하게 지은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1979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와의 기록으로 조선 인조 때의 건물로 추정된다. 정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맞배지붕이나 원래는 맞배지붕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러 차례 수리를 통해 건물이 축소·변형되면서 지붕 형식도 바뀐 것으로 보인다.
바로 옆 건물은 영산전인데 예전에는 비로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2호) 있었는지 지정된 문화재는 비로전이란 건물이다.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세워진 건물로 조선시대 말기인 헌종 8년(1842)에 고쳤다. 원래는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었지만 최근에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조선 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대웅전의 서쪽에는 세존 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과 비,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 없는 석조 여래좌상이 있다. 사리탑은 바닥돌 위에 매우 높직한 8각 받침돌에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로 길쭉하고 둥근 탑신을 올린 후 보주를 얹은 형태이다. 장식이 없는 소박한 모습으로, 조선 후기 양식인 종 모양의 형식을 띠고 있다. 탑 옆의 세존사리비에 의하면, 이 산 중에서 탑을 발견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던 것을 1900년에 다시 이 절로 옮겨 왔다고 한다. 증평군의 잘생긴 이런 불상
증평군 증평읍 남하리에 있는 석조 미륵보살입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8호)을 찾았다. 입상으로 양 옆에는 작은 2구의 얼굴이 많이 보수된 불상과 함께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49년 마을 뒷산에 성주사를 세운 윤월인 스님이 이 불상들을 모아 다시 세웠다가 6·25전쟁 후 마을의 주민들이 보호하고 있다. 발 아래 부분이 시멘트 땅에 묻혀 있으며 머리에 높은 보관을 쓰고 왼손을 가슴부분에 들어 연꽃 송이를 받치고 있는 보살상이다.
얼굴에는 한가득 입가에 미소 짓는 표정이 마치 자비의 화신으로 온화한 느낌을 준다. 고려시대 중기 지방에서 유행하는 보살상의 특징을 잘 나타난다. 측면에서 보면 얇은 입상으로 느낌은 전혀 다르다.
주변에는 받침대로 추정되는데 석재가 있다. 마을에 전설로 이곳에 가까운 절에 보살이 있었는데 자신의 절이 미륵불 때문에 번창하지 못한다고 오해하여 이 불상들을 넘어트리고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다고 한다. 석탑과 마애불상군이 있는 곳
석조 미륵보살 입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찾기가 다소 어려운 석탑과 마애불상군이 있다. 아마도 주변이 다 절터였던 것 같다.
남하리 삼층석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1호)은 바위의 윗 부분을 다듬고 받침돌을 놓아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1·3층 몸돌은 각각 한 돌로 되어있고, 2층 몸돌은 1층 지붕돌과 한 돌로 조성되어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씩의 층급받침을 높게 새긴 점이 특징적이다. 몸돌 중아 부분에 다 같이 네모난 홈을 파 놓았는데 후대에 아마 보수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주변 지형으로 보아 아마 화기를 누르는 비보탑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탑 바로 옆에는 마애불상군(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7호)이 동향을 하고 넓은 암벽의 3면에 모두 5구의 불·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중앙에 본존불과 좌우에 보살을 조각한 1면이 있고, 그 암반의 북면에 여래입상이 별도로 새겨졌다. 삼존불이 있는 바위의 남쪽 앞 정면 삼각형의 암반에 충북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반가사유상이 있는데 마멸이 심하다. 전체적으로 모두 마멸이 심하나 조각 수법과 주변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증평군의 유적은 아직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불교문화 유적이 이곳에도 남아 역사의 흐름을 우리와 함께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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