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전투에서 활약한 강근호(1893~1960) 애국지사와 서른네 살 연하로 부부인연을 맺었던 이정희(76) 여사. 민둥산이던 부산 해운대구 장산을 울창한 숲으로 일궜던 한 여걸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
지난달 13일 뇌출혈로 쓰러져 3주가 다 되도록 의식이 없다. 부산 동래 봉생병원 중환자실에 누워있다. 유족과 애국지사강근호선생기념사업회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이정희 여사는 70평생을 나누면서 살아왔다. 오직 나라와 민족, 사회를 위해 몸을 바쳤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에 주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여사는 장산을 호령했던 여걸로 통한다.
충남 대덕 출신인 이 여사는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 선생의 증손녀. 대전여고(옛 대동여고) 3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나자 증조부를 찾아 대구로 피신했다가 1950년 6월말 대구에서 여자학도의용군에 자원입대해 선무방송과 행정요원 등으로 활동했다.
강근호 애국지사와 이 여사가 인연을 맺은 건 1952년 1월 강원도 인제에서였다. 이듬해 5월 강근호 연대장과 진중(陣中)에서 결혼식을 올려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강근호 애국지사는 신흥무관학교를 나와 청산리전투 당시 보병 1중대장으로 참여했고, 북로군정서 독립후위부대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강 지사는 6․25전쟁 당시 연대장과 사단 참모장 등을 지내고 1956년 예편했다. 28살에 혼자가 된 이정희 여사는 당시 7살과 1살이던 두 남매를 혼자 키우다시피 했다.
당시 부산에 살던 이 여사가 무작정 미 하얄리야 부대를 찾아간 일화는 유명하다. 미국정부는 1954년 강 지사의 공로를 인정해 동성무공훈장을 수여한 적이 있다. 이 여사는 “나는 구걸하러 온 것이 아니다. 미국 정부가 강 지사의 공을 인정했으니 내가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내놓으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던 것.
이 때부터 이 여사는 사회복지사업가로 나섰다. 당시 미군이 보호하고 있던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던 것. 1964년 해운대 장산으로 이주한 이 여사는 하얄리야 부대 미군의 지원으로 ‘희망보육원’을 운영했다.
또 그녀는 제대 군인을 모아 ‘장산개척단’을 조직해 단장을 맡았다. 당시 장산은 민둥산이나 마찬가지. 이때부터 야산 20만평을 개간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이곳은 울창한 숲이 되었다. ‘장산개척단’의 피와 땀으로 일궈낸 것이다.
1990년 강근호 지사의 ‘무공훈장 찾아주기 운동’이 일어났으며, 그해 12월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강 지사의 유해가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된 것도 이 무렵.
해운대 장산에는 ‘애국지사 강근호의 집’(모정원)이 있다. 강 지사의 유품과 유훈이 깃든 박물관인 셈이다. 2000년 4월 이곳에 강 지사의 추모비가 건립되었고, 이태 뒤 전기인 <만주벌의 이름 없는 전사들>(도서출판 혜안)이 나왔다.
이정희 여사는 나눔을 실천해 왔다. ‘장산개척단’을 통해 가꾼 땅을 모든 노동자들이 불하 받도록 해주었고, 나머지는 국유지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의 모정원으로 내려와 혼자 살아 왔다.
모정원은 2004년 전까지만 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자녀들이 모시고 싶다고 했지만 한사코 사양했던 것. 4년 전 자녀들의 도움으로 태양열 발전기가 설치되었다. 이 여사가 사는 ‘모정원’은 “애국은 애국을 낳고, 사랑은 사랑을 낳고, 모정은 모정을 낳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딸 정화(48)씨는 "어머니께서는 평소 자식들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한테도 검소한 생활을 실천해 보이셨다"고 말했다. 정화씨는 "이종찬 전 의원이 오춘당숙이다. 그 분이 안기부장으로 있을 '불편한 게 없느냐'고 하신 적이 있다. 그런데도 어머니께서는 친척이라고 해서, 아는 사이라고 해서 당신 편안하기 위해 정치인이며 힘있는 사람한테 부탁해서는 안된다며 전기시설을 해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으셨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