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직 인수위원회(위원장 이경숙)가 정부조직 개편을 추진하면서 독립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안경환)를 대통령 직속 기구로 편입시키려 하자 인권단체들이 "국가인권위원회는 입법·사법·행정 등 3부로부터 독립적인 기구로 존재해야 한다"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달 24일부터 9일간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대규모 농성을 한 데 이어 향후 2차, 3차 집회를 열 계획이다. 이런 가운데 김선광 원광대 법학과 교수가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통령 직속화에 반대하는 글을 <오마이뉴스>에 보냈다. [편집자말] |
종은 치는 사람의 몫이 아니다. 더우기 종을 만든 사람의 것도, 종을 가진 사람의 몫도 아니다. 종은 온전히 종소리를 듣는 사람의 몫이다. 17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국정운영을 위해 준비하는 인수 작업은 말 그대로 국정 인수를 위함이다.
국가인권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두려고 하는 인수위의 직제개편 의도는 인수의 정도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버린 꼴이다. 이미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 창립 초기에도 직제를 두고 갑론을박이 오뉴월 호박잎 자라듯 무성했지만 결국 인권기구는 그 어떤 형태의 통치범위에도 가두어 둘 수 없어서 독립기구로 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당시의 합의였다.
한나라당도, 김대중 정부도, 인권단체들도, 하다못해 '조중동'까지도 긴밀한 소통을 통해 거두어들인 민주주의의 과실이었다고 목을 외로 꼬았었다. 그 사람들 다 어디로 갔는가?
인권은 사람이 누려야 할 권리이지 통치권자가 누려야할 몫이 아니다. 종은 그 소리를 나누어가지는 사람의 몫인 것과 같은 이치 아닌가. 효율을 위해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 치자. 글로벌하고 신자유적인 고비용 저효율을 지양한다고 해도 결국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법이다.
다행히 자본과 권력 앞에서 인권과 정의가 더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효율도 글로벌도 사람 없이는 턱도 없다는 사람들이, 국가인권위원회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명동성당 들머리에 누워 영하 20℃의 추위를 견디는 대한의 투사들이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많다. 그들의 바람은 헌법 제10조의 행복추구권을 실현하기 위한 것도 아니요,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의 적합성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국가인권위원회의 이 행태가 모두 생산적이고 정당했다고 말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인권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법제가 인권을 가두어서는 아니 된다. 따라서 인권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전유물도 관리대상도 아니요, 프랑스 인권선언에 언급된 대로 미이라가 되어버린 사문(死文)이 아니다. 인권이 어디 갇혀 있는 것인가?
비즈니스맨 대통령이 고비용·저효율의 인권을 보는 눈
국가가 인권을 위해 마련한 기구는 철저히 국가의 손을 떠나야 옳다. 그래야만 제대로 인권을 지키기 위해 감시할 것이고, 그 신장을 위해 노력할 것 아닌가? 효율을 따지는 비즈니스맨 출신의 대통령이 고비용 저효율의 인권을 한낱 진열장에 놓인 상품과 같이 수요와 공급으로 가격을 따진다면 국정을 운영하는 모양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 더욱이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해야 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국가가 자발적으로 만든 직제가 아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결실이고, 독재를 청산한 민중의 소산이자 표장이다. 따라서 국가인권위원회의 직제개편에 관련된 문제는 인수위의 인수목록도, 섣부르게 임시국회에서 거론되어야 하는 논의대상도 아닌 것이다. 어찌하여 종을 만들어 놓고 이불로 칭칭 동여매려고 하는가?
글로벌의 척도는 상품생산과 맞물린 이윤의 극대화로만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 효율을 판단하는 기준을 잡을 때 자본시장이 감당할 수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 장애인, 성적소수자, 사회적 취약계층의 인권을 같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효율도 작은 정부도 인권을 뛰어넘을 수 없다.
물건 값이 같아도 인권이 바닥이면 그 물건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국가인권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하려는 직제개편은 대한민국의 효율을 떨어뜨리고 글로벌에 역주행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