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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4일  01:00

 

빗방울이 차창에 매달리듯 두들기고, 문고리를 마구 흔들어 댄다. 어느 틈엔가 앞차와의 간격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멈춰서 버렸다. 1차선 도로 앞뒤로 가지 뻗어나가듯 촘촘히 줄지어선 차량들... 어둠을 뚫고 쏜살같이 달려온 라나도 비 앞에서는 속수무책. 산사태로 인해 토사와 바위가 길을 막아버린 탓이란다. 먹물을 뿌려놓은 어둠 속에서 빗줄기만큼은 선연하여 흘러나오는 헤트라이트에 반사되자마자 예리하게 흔들린다. 가끔씩 와이퍼만 저 혼자 바삐 돌아가고. 운전대에 기대어 앞으로 굽어진 라나의 뒷덜미가 서늘하다.

 

라나와 라나 친구, 소남은 길가에 다른 운전자들과 이야기를 하나보다. 차 안에 홀로 남겨진 외로움이 저려온다. 아시아나항공 숄을 꺼내어 무릎에서 목까지 꼭꼭 눌러가며 덮어보지만 온기가 머물지 못한다. 자동차가 빗속에 너무 오래 떨고 있는 탓이겠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은 어딜까? 내가 아는 것이 없구나. 

 

배낭메고 내 발로 걸을 때는 아무리 먼 길이라도 좋았다. 내딛는 순간 발바닥이 땅에 부딪히면 불꽃이 튀듯 어떤 힘이 몸에 흘러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 에너지가 발바닥 어딘가에 꽉 차게 충전되기라고 하는 것처럼. 그런 날 밤이면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한참 걷다가 지칠 무렵이면 길가 나무 아래도 좋고, 동네 구멍가게 슈퍼 앞이나 허수름한 찻집의 구석을 찾았다. 주위 풍경과 사람의 손때 묻은 물건들을 감상하고 나선, 으레 지도를 펴놓고 현재 위치를 찾아 손가락으로 꾹 하고 누르면 발바닥에서 뭔가가 시원하게 전해져 오는 것도 같았다. 그 뭔가를 생의 에너지라 여겼다. 

 

그러나 이 차에 올라탄 순간부터, 땅을 벗어난 두 다리는 공허했고 두 다리를 맘대로 움직일 없는 한, 내 의지 또한 빈 수레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게 있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없다! 

 

차는 오줌싸개 오줌 지리듯 찔끔찔끔 10여 미터 앞으로 밀려 나갔다가 또 끝없이 멈춰버리기를 반복한다. 반복은 졸음을 불러왔다. 그런 졸음을 허락한 신경체계가 신기할 지경이었지만, 이미 졸음은 눈꺼풀에 내려앉아 나를 조종했다. 어느덧 초조, 걱정, 불안이란 마음마저 뜻대로 되질 않는다. 마치 마취약이 서서히 퍼져나가듯... 아 퍼져가는 구나.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그리고 끝이었다. 의식은 내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로 떠났다. 이 꿈 없는 꿈에서 깨고 나면, 델리와 얼마나 가까워져 있을까?   

 

06:00

 

눈을 뜨자, 천정이 아주 가깝다! 화들짝 놀라면서 둘러보니 차안. 뒷좌석 공간을 거의 다 잡아먹으며 쓰러져 자고 있었나 보다. 아직도 차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어김없이 새 날은 서서히 밝아오나 보다. 하지만 흐린 하늘이 태양빛을 가로막아 여전히 어두침침. 몸을 가눌 수가 없다. 라나는? 겨우 상체를 일으켜 내다보니 도로가에서 비를 맞으며 뭔가 이야길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 험한 길이 될 줄이야. 저들은 왜 쓸데없이 외국인을 도와주러 나서는 바람에 이런 생고생을 사서 겪는단 말인가? 그러나 미안해 하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눈을 다시 감아버렸다.

 

08:00

 

눅눅한 차에서 내려 걷는 게 어떨까. 나서자마자 오돌오돌 떨리는 입술을 겨우 진정시키고 주변을 둘러보니 어젯밤에 비해 한결 가늘어졌는지, 부실부실 내리는 비는 이른 아침의 이슬처럼 청명하다. 비록 이 비가 우리를 이곳에 붙잡아 두고 있지만 아침의 영광을 앗아가지는 못했구나. 오히려 공기 중의 부드러운 습기가 주위 초록빛을 더욱더 신비로운 색채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길가에서 조금 떨어진 숲과 산속의 풍경은 대단히 환상적이다. 어디선가 고음의 새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비가 그쳐가는 걸까? 

라나와 소남이 시크교도인 듯 터번을 둘러쓴 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 쪽을 자꾸 쳐다보는데, 무슨 거래를 하는 건가? 고개를 까딱까딱하는 라나. 서로 악수하고 헤어진다.

 

“차를 바꿔 타기로 했어요. 이 친군 이 차를 몰고 마날리로 되돌아가고요. 저 시크교도는 소남이 아는 사람인데도 가구점을 한다나봐요. 저기 저 빨간 차 보이시죠? 저 차가 이 차보다 훨씬 안락해서 승차감도 좋을 거예요. 부인과 함께 델리로 가는 길이래요. 그러니까 찬디가르에서 버스로 옮겨 타지 않고도 바로 델리로 갈 수 있게 됐다 이겁니다.“

“믿어지지 않아요. 괜찮을까요? 저분들께 민폐가 되진 않을지...”

“염려마세요. 오히려 지루한 여행길에 말동무를 얻게 되어 좋다네요. 새 신랑인 남편 왈, 자신의 어린 아내에게는 새로운 말동무가 마침 필요했다나요. 암튼 잘 되었어요."

 

시크교도 남편 샤크와 그의 어린아내 Mittali

 

"나마스떼!"

"나마스떼! 호호! 코레아시라구요? 반가워요. 아이구! 차가 지저분해서 어쩌나. 그래도 이 차 빼고 이번이 처음 장기주행이에요. 거의 새 차인 셈이죠. 보세요. 비닐도 아직 떼지 않은... 호호... 델리에는 저희 언니가 살아요. 한 달 전에 언니가 둘째아이를 낳았거든요. 그 아기를 보러 가는 길이에요. 혼자 여행하시는 거라구요? 오! 왜요? 가족과 함께 하시지 그러셨어요? 이이는 아마 제가 혼자 여행한다면 기를 쓰고 막으려 할 거예요. 도무지 저를 믿지를 못한다니까요. 대신에 이번 가을에 처음으로 해외여행하기로 했답니다. 어디냐면요? 보름간 홍콩에 가기로 했어요! 정말 기대가 돼요! 호호호..."

 

다다다다다~~정말, 어린 아내는 엄청난 대화의 달인이었다. 명랑 쾌활한 그녀는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낯선 동행자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감추는 데도 익숙치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이 이집에 자주 놀러 다녔어요. 그때부터 며느리로 점찍어 두셨데요. 어머님, 아버님께서 제게 참 잘 해주세요. 시집온 거 같지두 않죠. 하하... 가족이란 느낌이 참 좋죠. 아버님은 특히 저와 노는 걸 무척 좋아하시죠. 깔깔~ 잘 넘어지시고, 농담도 잘 하세요. 음식을 손 안대고 먹으시면서, 얼굴에 음식 찌끼가 덕지덕지 묻잖아요? 개들의 마음을 이해해보라 하세요. 깔깔깔~~"

“빨리 손주를 안겨드리면 좋아하시겠어요...”

“아기요. 언젠가 갖고 싶지만, 제겐 아직 하고 싶은 것이 많아요. 공부를 하고 싶구요. 그리고, 제 일을 가질 거예요. 뭔가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음 해요. 이이도 그런 절 격려해주리라 믿어요.”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소녀시절 이미 혼사자리가 정해져 있었으므로, 초등학교를 마치고 살림만 배우도록 했다면서, 하지만 자신은 앞으로의 날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살고 싶다고 했다. 뭘 배우고 싶으냐고 했더니, 미용기술이나 가구 같은 생활디자인도 좋을 거 같다고 했다. 굳이 뭐 힘들게 배울 거 없이 샤크의 일을 거드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냐니까, 그건 그렇지가 않단다. 남편이라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또 각자의 취향과 관심에 따라 함께 할 수 없는 일이 있단다. 그걸 서로 존중하는 것이 부부 아니겠냐고 하면서 샤크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고운 눈흘김을 흘리는 미탈리에게 샤크는 고만 그렇다고 동의해주었다.

 

천진하고 아리따운 어린 신부로만 알았던 미탈리! 인도의 떠오르는 신세대 대표미인으로 손색이 없다.

 

샤크와 미탈리 밤새 빗길에 막혔던 델리 가는 길이 뚫린 기념으로 촬영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인도의 모습입니다.
샤크와 미탈리밤새 빗길에 막혔던 델리 가는 길이 뚫린 기념으로 촬영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인도의 모습입니다. ⓒ 신영미

 

09:00

 

길이 조금씩 복구되는지 제법 속도감 있게 달리기 시작한다. 지날 때마다 창 밖으로 내다보니, 며칠간 그칠 줄 모르고 퍼부은 폭우가 남기고 간 흔적은 처참했다. 산 위의 흙더미뿐 아니라  웬만한 오두막 집채같이 커다란 바위도 사정없이 굴러내려 도로를 깨뜨리고 무너뜨려 놓았다. 지난밤의 산사태가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하고 남았다.

 

아! 미탈리에 흠뻑 빠져 있는 사이, 비가 말끔히 그쳐 더는 우리를 쫓아오고 있지 않았다!

 

“라나! 비가 그쳤어요! 델리가 가깝게 느껴져요!”

“하하하! 그걸 이제사 알아챘어요? 이대로만 쭉 달리면 아마 넉넉히 공항에 도착할 수 있어요! 하하하... 델리까지의 길은 이제 쾌청입니다.”

“라나! 당신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해요. 암튼 계속 달려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사실, 전 자유로운 여행자이고 싶었어요. 그런데, 요 며칠 동안을 돌아보면은요, 부끄럽게도 ‘8월15일 01시 델리공항’이 마치 나의 여행목표인 양 굴었던 거예요. 그 시간이 뭐라도 된다고 스스로 집착했는지. 그런 내 모습을 반성하면서 이런 어찌 보면 쓸데없는 레이스에 라나를 끌어들인 거 같아 얼마나 미안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당신은 레이서로서, 목표지점에 제 시간에 골인하고 싶었죠? 당신이 이긴 거예요. 너무 다행이에요.”

“뭘요. 이기고 지는 게 어디 있겠어요. 다 정해진 데로 가는 거죠. 오히려 이 두 분께 감사할 일이죠. 하하하... 우리 뭐 좀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라나의 말 속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그 다음은 기다리면 된다니까요”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인도사람들은 기다림의 미학에 충실한 신복일까? 너무 맛있는 아점. 달과 짜파티! 두 손으로 거리낌 없이 음식을 만지작거리며 볼이 튀어나오도록 꾸역꾸역 입에 넣는다. 먹는 자유!를 만끽한 식사였다. 

 

델리로 향하는 넓은 도시형 도로 위를 신나게 달리고 있다. 곳곳에 거리 표시판이 델리까지의 남은 거리를 알려주고도, 카운트 다운하는 숫자가 빠르게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다. 미탈리가 앞으로 몇 시간 후면 도착할 거라 귀띰해준다. 자꾸 봐도 그녀의 시원한 눈매와 입가의 미소는 넘 귀엽다.

 

갑자기 미탈리가 운전대를 잡겠다고 하자 망설이면서 운전석을 내어주는 샤크. 얼마 전에 운전면허를 땄다고 하면서 도로를 신나게 달려보고 싶었단다. 이번 델리방문의 목적에 실전 운전연습도 있었죠?했더니 웃으며 윙크하는 그녀는 엄청 터프했다! 그런 그녀에게 샤크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유사시를 대비하고 있는 눈치. 그런 두 사람을 말없이 웃으며 지켜보는 라나!

 

델리 시내 들어가기 전입니다.  이마에 찍힌 하늘빛 점, 빈디라고 하는데요. 지혜의 눈의 자리라고 하더군요. 이 사진속의 미탈리는...지금도...저를 보고 웃고 있네요...
델리 시내 들어가기 전입니다. 이마에 찍힌 하늘빛 점, 빈디라고 하는데요. 지혜의 눈의 자리라고 하더군요. 이 사진속의 미탈리는...지금도...저를 보고 웃고 있네요... ⓒ 신영미

비구름은 이미 깨끗이 사라진 지 오래고 오후의 찌는 듯한 더위로 터번을 둘러쓴 샤크는 안쓰러우리만큼 땀을 흘리고 있다. 미탈리의 이마에도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고 있다. 차 창문이 활짝 열리고 그녀의 어깨에 걸친 아름다운 핑크색과 하늘하늘한 하늘색 사리가 바람에 나풀거린다. 눈부시게 나풀거리는 천의 흔들림이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웠다!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길거리 음식을 맛볼 기회. 너무 더워서 우선 레몬소다를 한 잔하고 미탈리의 권유에 따라, 뿌니뿌리(Puni Puri)를 먹어보기로 했다. 인도의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대표적인 길거리 음식이란다. 어항 같은 유리통 안에 동글동글 탁구공만한 뿌니뿌리가 잔뜩 쌓여 있다. Puni는 water란 뜻이고, Puri는 hollow puffed round로 그러니까, 감자가루?로 매우 얇게 반죽하여 가운데 구멍을 내어 튀긴 후 그 구멍에 새콤달콤한 물을 소스처럼 넣어 한입에 쏘옥 넣어먹는다.

 

소스가 흘리지 않게 건네받은 후 원샷으로 와삭 배어먹으니, 그 맛은? 어찌나 시원하고 고소하고 새콤달콤한지! 길거리음식이라고 결코 얕볼 것이 아니다. 새콤달콤 미각을 돋우고 더운 여름에 훌륭한 음료이자 에너지 보충원인데다가 하나에 2루피 값도 충분히 싸다. 인도에 가면 뿌니뿌리를 꼭 먹어보시길. 암튼 실컷 먹었다. 미탈리는 맛있게 먹는 나를 기대이상이라는 듯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답례로 씨익~하고 웃어주었다.

 

17:00

 

다들 조용히 가고 있다. 라나는 잠이 들었나보다. 피곤할 테지. 어제 밤부터 변변히 눈을 붙여보지도 못했으니. 창 밖에 노을이 지고 있다. 거리낄 것 없이 넓게 펼쳐져 있는 빨간 노을빛 하늘. 길 위의 천국이 따로 없는 것만 같다!

 

델리다! 휘익 휘파람부는 라나! 경적을 울릴 상황이 아닌데도 흥에 겨운지 악기 다루듯 경적을 눌러대는 미탈리. 삥삥... 빵빵~~ 까불이 어린 아내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샤크! 추월하면서 뒤로 밀려가는 차를 향해 미안하다는 사인을 보낸다. 의례적인 손동작일 뿐이리라. 정말은 미안한 마음을 담을 틈 없이 우리는 이미 유쾌한 분위기에 취해 있으니. 그렇게 빨간 차는 경적소리의 호위를 받으며 막 어두워지려는지 검푸른 넓은 하늘 아래를 쌔앵~씨잉~~ 날아갈 듯 달린다. 델리시내가 가까워오고 있다.

 

처음 그 자리로

 

혼잡한 틈에도 어둔 땅거미가 하나 둘 내려앉고 있는 델리. 매연 가득하고 사람과 택시와 경적소리와 오토릭샤, 자전거릭샤, 소들과 말들이 뒤섞여 북적거리는 델리 거리로 다시 돌아왔다. 처음 그 자리! 감개무량했다. 우리들의 시간이란 이처럼 한 바퀴 크게 도는 여행과도 같은 것일까? 그럼 이번 인도에서의 시간은, 이 여행은 내게 무엇이었을까? 인도는 변함없이 그 자리인데 바람처럼 왔다가는 나는? 이제 돌아가서 뭘 해야 하지?

 

여행의 끝자락에서 떠오르는 이러저러 밑도 끝도 없는 질문들은 필경 이 여행이 미완의 것임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새로운 여행의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길이 길을 이어가듯, 지난 여행은 새로운 여행을 준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시작과 끝이란 똑같은 점 하나일 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그리고 내게 되묻는다. 정작 현재가 선물인 순간순간 얼마나 행복할 수 있었느냐고. 앞으로도 좋아하는 사람들의 곁을 얼마나 오랫동안 행복하게 지켜낼 수 있겠느냐고. 마음에서 항상 떠나지 않던 그 곳. 그곳으로 돌아가 좀더 행복하게 살아보라고.

 

“시간이 괜찮다면 우리 언니네 가서 함께 저녁을 하고 싶어요.”

“라나! 시간이 어떨까요?”

“아무래도 어려울 거 같아요. 공항까지 가는 시간도 생각해야 되고, 여유 있게 대기하려면... 아쉽지만... 작별인사를 나누는 편이 나을 거 같네요.”

“그렇군요. 미탈리! 샤크! 어떻게 할까요? 네... 제가 인사할게요. 고마웠어요. 너무 즐거웠구요. 참, 뿌니뿌리맛도 너무 좋았고요.”

“나중에 꼭 인도에 다시 오셔야 해요? 그때 연락을 하시고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역시 이별은 능숙해지지 않는다. 정이란 뭘까? 순식간에 사람의 마음을 잡아먹는 것. 정에 굶주려 있을 때는 한없이 그립다가도 한번 정 들고나면 힘들어진다. 어떤 때는 붙잡고 싶어서, 또 어떤 때는 붙잡히고 싶어서. 하지만 역시 대부분 정해진 대로 가게 될 터이지. 가끔, 사람과의 만남과 헤어짐이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는 마음 상태 굳이 표현하자면, 냉정과 열정 사이 그 중간의 어느 지점은 없는 것일까?을 떠올린다.

 

우리는 서로의 가슴을 느끼듯 꼬옥 껴안았다. 그녀에게서 향기가 느껴졌다. 인도여인의 냄새일까? 거리감이지 않았다. 새로운 세계로 유혹하는 향기로운 냄새일지도 몰랐다.

 

20:00

 

라나와 빠하르간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공항으로 가야 했다. 라나는 내가 타고 갈 오토릭샤를 잡아주고는 오토릭샤 운전자와 가격 흥정을 끝내는가 싶더니, 오토릭샤 운전사의 이름을 물었다. 물론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릭샤운전사는 기분 나쁜 표정인데 라나가 다시 릭샤의 등록번호를 적으려 하자 이제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라나! 라나! 됐어요. 하하하. 이 분은 저랑 가실 뿐이에요. 그러니, 제가 이야기할게요.”

 

릭샤운전사에게 50루피를 더 주기로 하고, 이름과 등록번호를 라나에게 건네주었다.

 

“라나! 뭣보다 늘 건강하시구요.”

“내일은 8월 15일로 인도 독립기념일이기 때문에 델리의 모든 차량 통행이 없는 날이에요. 오늘 무사히 비행기를 타시게 되겠지만요. 참고하시고요.”

“네...아마도 라나가 인도에서 제가 사무적이 아닌, 사람답게 이야기를 나눈 마지막 분이 되실 거 같은데요. 그런 분과의 작별이라선지 더 쉽지 않네요. 하하... 잊지 않겠습니다.”

“카레이서로서 기억하지 마시고, 그냥 라나로서 기억해주시길. 하하하...”

“네... 저도 그 편이 좋을 거 같네요...”

어둠 저편으로 사라지는 라나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인도와도 작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5일간의 인도여행과 그리고... 인도스러운 모든 것들과 벌써 그리움의 이름이 되어버린 얼굴들과... 그리고 히말라야...! 킁킁 거려본다. 미탈리의 달콤한 인도의 냄새가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만 같다. 이 냄새는 당분간 몸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다. 그리고 칼상이 지어준 티벳이름 양쫌! 귀국하고도 한동안은 양쫌이고 싶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이 길의 끝은 인도의 출구 간디국제공항이고, 그로부터 하늘 길 끝에는 인천국제공항이 있을 것이다. 그럼, 이 길에서 이별하는 것이 낫겠지. 하지만 인천국제공항까지라면 아직은 시간이 좀 더 남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일까를 계산하기도 전에 인도와의 작별은 그 시간에 맡기는 편이 차라리 쉬운 방법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잠자리를 미리 봐둔 석양의 나그네처럼 오토릭샤 뒷좌석에 앉았다. 두다다다다 투다다다다... 오토릭샤가 달리기 시작하자, 바닷속에 침몰하듯이 더욱 깊숙이 가라앉았다.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앞만 보고 달리는 오토릭샤는 넓은 도로도 좁은 듯 종횡무진 누비며 추월하면서도 어쩌다 끼어드는 차에게는 양보하지 않는 수완을 발휘한다. 초를 다투듯 시간과의 전쟁을 치루는 운전사에게는 시간이 돈이고 시간을 벌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느라 릭샤 운전사는 뒷자리에 앉아 있는 동양의 외국여행자 따윈 조금도 관심이 없다. 뒷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도 릭샤 운전사에게 말을 걸어볼 생각이 없어 보인다. 푸석푸석 물기가 쏘옥 빠져나간 마른 가을 잎처럼 한없이 가벼워져가는 그녀는 멍하니 먹빛 밤하늘만 바라보았다.

 

22:00

 

공항 앞에서 그녀는 오토릭샤 값을 치루고 내려서자마자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긴 빛 꼬리를 달고 떨어지던 별똥별은 오늘 밤은 어느 쪽에서 나타날까? 그 많던 별들은 어디로 갔을까? 광활하던 산봉우리가 당최 하나도 뵈지를 않자 실망하는 표정이다. 히말라야! 맥간에서 밤새 비구름 속에 잠들어 있다가도 아침이 오면 맑은 새소리와 함께 물안개 사이로 부드럽게 깨어나곤 했던 히말라야! 그 히말라야가 새삼 그리웠는지 공항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벌써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공항 안은 후덥지근하니 텁텁하고 느그적 느그적 사람들의 움직임이 둔해 보인다. 사람들 사이를 아주 천천히 지나고 있다. 잠깐 사이에 옷자락이 닿기도 하고, 자칫 까딱하는 사이에 배낭끼리 부딪치기도 하는데 이들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고, 그녀 역시도 이들을 보고 있지 않다. 어쨌든 출국에 필요한 수속을 하나씩 마치고 있지만 거의 반사적으로 어떤 익숙한 흐름에 맞춰 단조롭게 걷는다.

 

탑승 출구 앞. 오늘따라 유난히 비어 있는 의자가 많다. 그중 하나에 앉는다. 딱히 그 의자가 맘에 든 것도 아닌데. 맞은편에 배낭여행자로 보이는 한 젊은 한국여성이 사리로 온몸을 두르고 무표정이 앉아 있다. 등산복 차림의 여행자들이 게이트 앞으로 모여드는 폼이 출국시간이 가까워 오나보다. 스피커의 탑승 안내방송에 그녀의 정신이 잠시 돌아왔지만 오히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허허로움에 배낭끈을 옹골지게 움켜쥐었다.

 

8월 15일 00: 40

 

비행기로 연결되는 승강기 복도를 지나 승무원의 인사를 받고, 그녀의 좌석인 비행기의 맨 뒤 꼬리 부근 왼쪽에 있는 두 좌석 중 창가 구석에 잡을 때까지도 그렇게 한번 허허로워진 가슴은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새벽 1시 10분 비행기가 굉음과 함께 대륙 인도의 땅을 박차고 이륙할 때까지도.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려놓고 나니 이제 정말 할 일이 없었다.

 

그녀는 승무원이 친절한 목소리로 음료수 있습니다. 무얼로 드릴까요? 그냥 물로 주세요. 하고 물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평소 같으면 옆 자리에 앉을 사람을 상상하며 적당히 읽을 책을 펴놓고는 은근한 호기심으로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가 오면 인도여행의 기념으로 아마 첫마디로는 이렇게 인사를 건넸을 것이다. “나마스떼!” 그럼, 그쪽에서도 틀림없이 “라마스떼!”라고 인사해왔을 것이고, 잠시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며 웃었을 것이다. 그 때 서로의 인상을 확인하며, 국적이랑 이름을 묻는다거나 좀 더 이야기가 잘 풀리면 여행에 대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는 사이에 저 아래 잠들어 있을 인도, 그곳에 두고 온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들과 미처 나누지 못해 아쉬웠던 말들을 그에게라도 풀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만일 이 날 그가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들여다보았다면, ‘허 거참, 행복한 꿈이라도 꾸나, 하하 뭔지 모르지만 암튼 좋은 꿈을 꾸고 있나보네’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아무 별난 데 없는 그녀를 유심히 볼 리 만무했다. 오히려 그녀를 한번 힐끗 보고는 약간의 실망감을 무료한 표정으로 금세 바꾸고는, 면세품 카탈로그의 페이지를 넘기며 화장품이나 귀금속류, 초콜렛 세트, 양주병 등을 감상한 후 가격을 곰곰 따져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이미 잠이 푹 들어 버렸다. 세상모르게.

 

후기.

 

그동안 평범한 아줌마의 인도여행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두 손 모아 감사드립니다!


#인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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