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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가 읽고 계시던 책 두 권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길고 긴 설 연휴 때문이었다. 틈틈이 읽으려고 들고 갔던 강유원의 <서양 문명의 기반:철학적 탐구>가 얇기도 했지만, 쉬운 말로 어렵지 않게 설명한 책이라 연휴 초반에 다 읽어버렸기 때문에 뭔가 읽을거리가 아쉬웠다. '우리 어머님은 어떤 책들을 읽으시나?' 하는 호기심으로 어머님의 책들을 넘기기 시작했다.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와 <D에게 보낸 편지>는 전혀 다른 분야의 책이지만, 제목에서 보이듯 두 권 모두 편지 형식으로 쓰였다. <D에게 보낸 편지>는 아내에게 쓴 사적인 편지이고, 이유미의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는 한 일간지에 연재했던 것으로 식물학 박사가 대중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로맨스 영화의 엔딩보다 더 감동적인 편지 
 
 < D에게 보낸 편지 >
< D에게 보낸 편지 > ⓒ 학고재
춤추는 남녀 사진이 표지에 실린 <D에게 보낸 편지>는 2006년 3월 21일부터 같은 해 6월 6일까지 남편인 앙드레 고르가 아내인 도린 케어에게 쓴 유서인 동시에 죽어가는 아내에게 바치는 절절한 사랑 고백이다.
 
앙드레와 도린 부부는 앙드레가 스물네 살이던 1947년 가을에 만나 60여 년간 사랑한 뒤 2007년 9월 22일에 동반자살로 생을 마쳤다.
 
여든이 넘은 노부부가 한적한 시골 자택에서 같이 자살했다는 책 소개는 충분히 자극적인 뉴스였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90쪽)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어지간한 로맨스 영화의 엔딩보다 인상적이고, 치렁치렁 장식한 연애편지가 줄 수 없는 잔잔하고 그윽한 감동을 준다.
 
영국에서 스위스로 막 건너온 도린은 같이 춤추러 가자는 앙드레의 제안에 '와이 낫'이라며 단숨에 승낙한다. 오스트리아 출신 앙드레는 사르트르를 통해 실존주의 현상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68혁명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상가이자 사르트르로부터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는 평가를 들었던 인물이다.
 
앙드레 고르는 게르하르트 히르쉬라는 첫 이름에서부터 유대인을 차별하고 학살한 나치 정권에게서 화를 면하기 위해 아버지가 개명한 제라르 호르스트, 후일 파리에서 기자로 일할 때 사용한 미셸 보스케, 그리고 마지막으로 앙드레 고르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름을 전전하며 살아왔다.
 
이름이 자주 바뀐 만큼 정서적으로 불안한 삶을 살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는 데도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런 앙드레에게 도린은 따뜻한 위안이 되었고, 그가 그답게 살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도린은 상근 기자임에도 고정 급여가 나오지 않는 앙드레의 자료 수집 조수로, 연인으로, 경제적 지원자로 한 남자의 사상적 깊이에 힘을 보탠다. 도린의 희생은 너무 크고 앙드레는 자신의 이름만 내세운다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을 생태주의와 노동이론의 선구자로 키워낸 지적 배양토가 바로 도린이었음을 뒤늦게라도 앙드레가 인정하고 책으로 써서 밝히는 모습에서 초기의 실수를 나처럼 살짝 눈감아주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앙드레는 말한다.
 
"당신은 내가 나 자신이 될 수 있게 돕느라고 당신의 모든 것을 준 사람입니다."
 
젊어서 아낌없이 사랑하고, 늙어서는 도시를 떠나 아내가 구상한 '명상적인 조화로움이 스며 나오는 집'에서 생태주의적 삶을 살다 한날 한시에 떠난 이 부부의 사랑 이야기가 부러운 마음에, 밤마다 설 특집 영화만 보는 남편에게 이 책을 들이밀고야 말았다. 큰 집, 큰 차 사서 호강시켜줄 생각은 그만하고, 나에게 이런 편지 써 줄 생각하시라고!
 
초로의 시어머님이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궁금하지만, 끝내 여쭤보지 않았다. 당신이 읽던 책을 읽는 며느리에게 여러 차례 "대단하지 않냐?"고 묻고는 동의해야 말씀을 끝내셨던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두 분의 삶이 이제 노년시대를 시작하는 만큼, 이런 진정성이 느껴지는 사랑 이야기에 전염되어 더 멋진 노부부로 늙어가시리라 믿는다.
 
우리 산천의 꽃과 나무에게 보내는 사랑 편지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 ⓒ 지오북
봄마다 꽃구경 가자고 소란 떨며 환하게 핀 꽃그늘을 촐싹대며 다니던 내 걸음이 이제 조금은 차분해지지 않을까 싶다. 죽은 듯 숨죽이고 있던 나뭇가지에서 거짓말처럼 새순을 틔우고 꽃을 피워내는 것이 식물들의 생존전략이 만개한 것임을 알고 보면, 올봄에는 꽃들이 괜히 더 대견해 보일 것 같다.
 
이 책의 지은이 이유미 박사는 광릉 수목원에서 식물분류를 담당하는 연구원이다. 전문가의 식견으로 이미 여러 권의 책을 낸 베테랑 저자여서 식물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더구나 일간지에 실렸던 2년치 칼럼을 모은 책이라 글이 길지 않고, 아무 쪽이나 펴서 읽어도 상관이 없어 읽기에 편하다.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생활 주변의 꽃과 나무들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은 '아하~!'하며 전에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는 기쁨마저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곁에 두고 사시사철 피고 지는 꽃과 식물의 변화, 우리가 처한 환경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것. 두 해에 걸쳐 사계절 식물 이야기를 담아두었기 때문에 천천히 느릇느릿 읽어도 좋을 책이다.
 
백목련은 왜 북쪽을 향해 피는지, 봄이면 흔하게 볼 수 있는 개나리 열매를 왜 보기 어려운지, 꾀쟁이 덩굴 식물 이야기, 부부금술을 상징하는 자귀나무, 잣이 2년이나 인고의 세월을 보낸 결실이라는 것, 소나무의 월동준비 등 관심을 갖고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 즐비하다.
 
식물들의 생존전략과 삶의 법칙을 들여다 보면서 우리네 삶과 어떤 면이 닮았고 어떤 부분이 다른지, 동물보다 DNA 숫자가 훨씬 많다는 식물이 왜 우리 동물들보다 한 수 위인지 느낄 수 있다. 시골집 뒤안의 매화가 진한 향을 뿜기 시작했고, 동백이 진초록 잎 사이로 붉은 꽃을 드러내고 있는 초봄. 숲에서 온 편지를 들고 꽃구경을 나서기는 아직 이르지만, 벌써부터 목련과 개나리가 기다려진다.

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학고재(2007)


#편지#사랑#숲#동반자살#광릉수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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