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있나요? 민주노동당에?"
반갑게 온 지역 위원장님의 전화를 받았을 때 답답한 마음에 그렇게 물었다. 종북주의라…,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은 알고는 있었다. 고백부터 하자면 나는 소위 '자주파'였다. 10여 년 전 대학생이던 시절에 말이다. 그때는 자주파라는 말도 없었다. NL이니 민족해방파니 했다.
물론 뭣 모르고 운동에 참여하게 될 때는 몰랐지만 1학년을 지날 때쯤 운동권에도 다양한 분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김영삼 정부 시절이던 그때, 열심히 조직하고 거리에 나서는 자주파가 좌파 이론가 족보나 따지기 좋아하는 평등파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개중 북을 유독 지나치게 흠모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국을 사랑하는 열정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문제 삼진 않았다. 정부의 오락가락한 대북정책 덕에 전쟁위기설이 심각하던 때라 북한과 화해하고 평화를 도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던 그때였다.
나도 10여년 전, 대학생 시절엔 소위 '자주파'였다대학을 졸업한 후, 순수하던 그 열정을 소중히 간직하고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세상이 그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에 이해하던 것처럼 미제와 그 앞잡이들만 때려잡으면 모든 이가 행복해지는, 그런 단순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운동가로서 살기엔 운동의 지표가 될 대안적 논의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없는 사정에 억지로 영국으로 유학길까지 올라 그렇게 5년 세월을 보냈다. 의회 민주주의 산실이라는 이들의 정치를 보면서, 복지국가라고 하는 이들의 정책을 공부하면서, 무엇을 배울 수 있고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면서 우리 사회의 대안을 내어보기 위한 단초를 찾는 시간들이었다.
그랬기에 영국사회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만큼 우리나라에 대한 관심을 놓을 수는 없었다. 민주정부를 세웠다는 우리나라가 양극화, 고령화 등 새로운 수준의 사회문제에 직면하면서 민주주의가 작동하여 대안이 도출되기보단 과거 권위주의적 틀에 갇혀 미봉책만 반복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가운데 방치된 서민들은 급증하는 사회문제를 홀로 개별적으로 감당하느라 더욱더 극심한 고통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보아왔다. 그런데도 민주정치를 이해조차 못한 구태의연한 정치권은 서민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허무한 다툼으로 절망만 안겨주는 것을 보아왔다.
그럴수록 소중해지는 것은 민주노동당이었다. 누가 무어라 해도 명백하게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을 대표하고, 분명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가장 근대적인 정당 구조를 갖춘 정당은 민주노동당밖에 없었다. 그래서 민주주의적 대표성을 확보하고 명확한 대안을 제출할 수 있는 제도권 내 정치세력은 민주노동당밖에 없었다.
공부할수록 소중하게 다가오는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가입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결국 민주노동당에 당원으로 가입했다. 공부를 마친 후 무언가를 하겠다는 것보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는 것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운동권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주변에서 손가락질해도 그래도 희망의 근거는 거기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민주노동당이 가야 할 길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 이를 심각하게 느낀 것은 부유세 공약을 실현시키겠다며 입당했던 윤종훈 회계사가 탈당했을 때였다. 이미 자주파가 최고위원회를 싹쓸이했다고 말이 많았었다.
그때 윤종훈 회계사는 '선거 때 써먹었으면 됐지 부유세 얘기를 왜 자꾸하느냐'는 최고위원회의 분위기에 결국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는 10여 년 전 투쟁에만 목매던 학생운동 시절을 그대로 연상시켰다.
안 그래도 2004년 국회 진출 후에 학교 급식 운동, 상가 임대차 보호법 제정 운동 등 활발하고 생동감 있었던 생활 정치가 오히려 실종되고 빤한 정치투쟁에만 당이 휘말리는 것이 의아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수의 조직력으로 당권을 장악한 자주파와 그런 변화가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잘 몰랐었다.
그때는 의원의 당직 겸직 금지 조항으로, 정책을 실현시키는 공간인 의회와 대중과 호흡하는 공간인 당을 분리시킴으로써 생긴 병폐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2006년 부당한 판결로 의원직을 잃은 조승수 전 의원이 당 대표 선거로 나설 때, 의회 경험이 있는 사람이 당 대표가 됨으로써 이런 병폐가 풀릴 수 있겠다 생각하며 반겼다.
그런데 당 대표 선거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선거법 위반으로 조승수 전 의원을 대표로 뽑아도 대표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흑색선전이 선거를 뒤덮었고, 결국 인지도에서 한참 떨어졌던, 그러나 자주파가 지지한 문성현 대표가 선출되었다.
게다가 당이 정책 정당으로 발전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상한 일만 반복되었다. 반복되는 선거 참패로 지도부가 총사퇴해봤자 선거를 하면 자주파 지도부가 또 당선되었다. 종이당원, 대리 투표, 조직 동원 등 1960, 70년대 독재정부를 연상시키는 부정행위 사례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당은 매번 유야무야 넘어갔다.
당 회계는 공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엉망이 되고 당직자의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당 책임자 입에서는 '헌신성'을 강조하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헌신성은 10여 년 전 지겹도록 들었던 자주파 운동가의 핵심 덕목이었다. 그것이 고작 국가 보조금까지 받는 제도권 정당에서 월급도 제대로 안 주면서 잠자코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소리였단 말인가. 그런 아마추어적 사고로 다른 제도권 정당과 경쟁이 될 리 만무했다. 우수한 인재를 끌어와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민주노동당은 있는 사람도 몰아내고 있었다.
점차 퇴행적으로 변해 간 민주노동당, 드러나는 자주파 당권장악의 의미
그럴수록 자주파의 당권장악이 갖는 의미는 점점 더 분명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자주파 비판에만 안주한 상대 정파라는 평등파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단지 이것은 자주파 대 평등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수의 조직력으로 언제나 당권을 장악하는 자주파는 단지 평등파 뿐 아니라 다양한 당내 논의가 당 활동에 반영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이는 제대로 된 제도권 정당으로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구태의연한 운동권식 당 운영으로 민주노동당을 점점 추락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정점은 지난 대선에서 자주파의 지지를 업고 당선된 권영길 후보가 내세운 '백만 민중대회'였다. 이른바 '민주개혁' 진영이 몰락한 그때, 새롭게 진보의 가치를 세울 수 있는 그때, 진보적인 정책적 비전이 무엇보다 절실했던 그때, 중심 전략으로 내세운 것이 고작 판에 박힌 '대규모 집회'였다.
이 역시 그 아득한 10여 년 전에 학생시절 들었던 계급혁명의 자주파 버전인 '전민항쟁'의 재판이었다. 기가 턱 막혔다. 산속에서 아직도 2차대전에 끝난 지 모르고 숨어있었다던 일본 병사가 생각났다. 당원용 메일로 날아드는 그 10여 년 전 학생운동권 문건과 거의 다름없는 수준의 논리를 보면서 절망했다.
원내 3당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정당 해산에 가까운 3%의 지지에 멈춘 이후에야 당 혁신 문제가 심각하게 떠올랐다. 처음에는 종북주의를 말하면서 당을 일찌감치 떠나는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어떻게 세운 당이었는데, 아무리 그렇게 당이 썩었을까 등등 아쉬운 희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도 심상정 의원이 있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간 정책적 비전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그러면서 가장 선명한 민주노동당의 비전을 이야기하는 정치인 아니었던가. 그가 당 대회에 제출할 혁신안을 제시했을 때 단호한 조치들에 다소 놀라웠지만 그간 자주파의 당권장악이 의미했던 바들을 생각하면 불가피한 수순으로 이해되었다.
당 대회 혁신안은 자주파에 반성과 혁신 의지가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즉 최소한 그동안 극단적으로 드러났던 당권파의 폐단들을 자주파를 비롯한 당 자체 내에서 스스로 인정하고 청산하고자 하는 의지가 확인되지 않는 이상 당 혁신은 요원한 것이었다.
그 대표적 폐단들이 당에 스파이 행위를 한 당원에 대한 불분명한 조치였고, 평화지향 정당으로 용납될 수 없는 핵 자위권 발언이었고, 종이당원, 집단 당적이동, 대리 투표 등 추악한 부정행위로 당권을 장악해 온 패권주의였다.
특히 쟁점이 되었던 최기영 전 사무부총장, 이정훈 전 중앙위원에 대한 제명 안건은 자주파가 당의 정체성을 기본적으로 존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닌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당원의 성향 분석 자료를 북한에 넘긴 스파이 행위는 당 정체성에 대한 부정이었고, 이에 대한 반성과 단호한 조치 없는 당의 혁신이란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주파 인사들은 각종 인터뷰에서 이를 '신념'의 문제라고 했다. 북한을 위해 당 내에서 스파이 행위를 한 것이 신념이라면 그것은 말 그대로 종북주의가 아니면 무엇인지 모르겠다. 자주파는 당 대회에서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국가보안법을 무기로 총공세를 펼쳐 이미 드러난 사실관계조차 뒤흔들어 놓았고 결국 압도적 표차로 혁신안을 부결시켰다.
설마 설마했던 종북주의의 존재가 드러나고 그것이 얼마나 당을 썩게 만들어 놓았는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종북주의가 아닌 패권주의라 생각했었지만 결국 '종북주의를 하기 위해 패권주의가 나타나는 것'이라는 진중권씨의 지적에 동의하게 될 수밖에 없게 된 순간이었다. 종북주의라는 퇴행적 사고에 젖은 이들이 이를 억지로 실현시키기 위해서 나왔던 각종 부정행위들이었고, 그 외골수에 다양한 논의와 대안은 압살돼온 것이다.
이미 그 전에 자주파는 대선 참패를 평가한 안건에 대해서도 '실망스러운 결과'라고 수정함으로써 참패를 인정할 뜻도, 그래서 이를 극복할 혁신을 받아들일 의사도 없음을 확인하였다. 그것도 당내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당 대회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래서 나는 민주노동당이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혁신 불능정당이 된 민주노동당이 이젠 진보정당도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민주노동당을 떠나고자 한다. 혹자는 민주노동당을 더 이상 죽이지 말라고 하지만 당 정체성부터 부정하는 세력이 다수를 장악해 당 전체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무슨 재주로 당을 죽지 않게 할 수 있는지 매우 의문스럽다.
이제 한국을 떠나온지도 5년째, 10여 년 전 학생운동을 같이 했던 사람들과도 연락을 못한지 꽤 되었다. 생활인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운동한다고 현장에 남아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이번 민주노동당 사태에서 이렇게 민주노동당이 썩어 문드러지고 무너지는 데 일조를 했다면 정말이지 마음껏 원망하고 싶다.
통일과 자주를 '자주파'와 분리하고 그들의 진보운동 내 역할을 재평가할 때
나는 통일 운동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 사회 핵심 문제라고 보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의 핵심 과제 중 하나라는 점에 충분히 동의한다. 또한 나는 자주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반미에 매몰되는 단순한 사고를 거부하지만 외국에서 볼수록 우리 사회가 얼마나 미국에 편향되어 있는가를 알게 되었기에, 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된 우리의 역할을 찾고 우리 사회의 대안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통일과 자주의 가치를 운동권 세력인 '자주파'와 이제 분리해서 사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가치와 분리하여 그동안 학생운동의 몰락과 노동운동의 쇠락과정 등에서 '자주파'가 한 역할에 대하여 진보운동 전체가 재평가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제 퇴행적 운동권 집단으로 변질되어 버린 '자주파'가 그 특유의 조직력으로 또 다른 진보운동을 망가트리는 것을 방치하기엔 우리에겐 이미 기회가 바닥나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의 과제와 자주의 가치가 '자주파'의 전유물이 되어 진보운동에서 함께 몰락하기엔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부질없는 부탁인 줄은 알지만 자주파에 속한 이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맹목적이리만큼 쫓는 그 '자주'와 '통일'의 가치를 스스로 어떻게 퇴락시키고 있는지 돌아보길 바란다. 반성도, 혁신도 부정하는 당신들은 다른 이들이 부정하기 전에 스스로 진보임을 부정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몰락도, 심지어 지난 대선 문국현 후보의 출마까지 미 중앙정보부의 농간이라고 부르짖는 그대들은 심각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경영과 형님 아우 할 소리일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블로그(http://idea.borongs.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