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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회에 이어)

어머니가 잃어버린 길을 나는 알고 있다. 바퀴의자를 밀고 근덕근덕 올라간다. 어머니를 어디까지 밀고 올라가야 하는지는 모른다.  50년 전 새악시 같았던 그 어머니를 태우고 가는 것이다. 텅 빈 밭에는 털고 난 들깨 다발이 하얗게 서리를 뒤집어쓰고 무덤처럼 고요하다.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가는 길에는 두 줄기 바퀴 자욱이 남는다. 물병과 수건이 담긴 재생고무 함지박을 무릎 위에 거머쥐고 어머니는 말이 없다.

감자밭 감자캐러 가는 길
감자밭감자캐러 가는 길 ⓒ 전희식

나는 계속 감자밭으로 간다. 서리처럼 새하얀 감자. 어둠 속 비밀같이 툭툭 호미 끝에서 나뒹구는 감자. 어머니가 세우라고 할 때까지 우리는 감자 캐러 가는 것이다.

“길이 없어졌는 갑따.”

어머니가 스스로를 구하러 나섰다. 난처해져 있는 당신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청신호다.

“벌쌔 그때가 언제라. 다 떠나고 남아 있는 사람이 있어야제. 사람도 안 댕깅께 질도 업써.”

더 침묵을 지키다가는 되돌아 갈 길이 없어진다는 걸 알아채셨을까. 한마디도 없이 입을 꾹 다물고 휠체어를 밀고 가는 아들 복잡한 심사를 눈치 챘을까.

“저기 저기는 암매 자손들이 돈깨나 있는 집인가 봐. 석물을 반듯반듯하게 세우디마는 무덤도 맬가이 깎아 놨네.”
“아. 저 건너 저기요? 접때 사람들이 많이 올라가더니 잘 다듬어 놨네요.”
“죽고 나서 저렁거 세운닥꼬 어찌 알끼라. 죽어믄 그뿐이지.”
“어머니 뫼똥에도 저런 거 하나 세워 드릴까요?”
“함부래 그런 소리 하지 마래이. 그냥 태워각꼬 뿌리삐라. 뫼똥 쓰고 할꺼도 엄따.”

이렇게 우리는 머릿속 감자밭을 지워버렸다. 늦가을 쌉쌀한 아침에 모자가 호젓하게 나들이 나온 것으로 상황을 바꾸어 나갔다. 단호박을 심었던 밭까지 왔다. 마치 그러려고 온 것처럼 나는 낫을 들고 호박 밭 주위 잡목들을 깎았다.

“깎아 냉께 터가 넓네. 그거 다 우리 밭으로 쳐 넣자. 내년에 고구마나 심으까?”

어머니는 태연히 현재로 돌아오셨다.

봄동으로 먹으려고 짚으로 덮어 놓은 배추 한 포기를 뽑아서 돌아왔다. 우리는 감자를 가득 캐기로 되어 있는 함지박에 뻣뻣한 늦가을 배추 한 포기 담아 집으로 왔다. 아침 산책을 다녀왔으니 기분도 상쾌했다.

이것이 이른바 첫 번째 요법인 <앞장서서 방향 돌리기 요법>이었다. 치매 노인의 엉뚱한 요구나 주장에 대해 최고의 대응법인 이 요법은 아주 간단하다. 어머니가 뭘 요구하시면 무조건 수용하고 그대로 따르면 되는 것이다.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는데 그걸 어떻게 수용하느냐고?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 해 보면 된다. 해 보면 신기하게도 해결책을 어머니가 다 가르쳐 주신다. 단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될까 안 될까 의심하면서 어설프게 하면 실패한다는 것이다.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늘에 있는 별이라도 따 드리겠다는 심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상황을 완전히 주도해 버려야 한다. 뒤에서 투덜대며 끌려 다니지 말고 한 발 앞서 가라는 얘기다.

치매 부모의 터무니없이 강경한 주장은 그동안 아무도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이 없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나는 두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앞장서서 방향 돌리기 요법>을 배운 셈이다. (41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국농어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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