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이른 아침 서울 교대역 1번 출구, 시각장애인 김진도씨가 시각장애인용 지팡이(케인)을 들고 조심스런 걸음으로 한발씩 걷는다.
잘 가는 듯 하지만 이내 왼쪽 오른쪽으로 치우친다. 차도로 떨어질 뻔하기도 했다. 다시 지팡이로 길을 더듬어 인도로 걷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번엔 주차된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다. 차와 부딪히기 직전 지팡이에 차가 먼저 툭 걸리고 그제서야 김씨는 멈춰 선다. 또다시 방향을 바꿔 돌아간다.
그래도 다행이다. 만일 지팡이 때문에 차가 손상되었다면 주인에게 한 소리 들어야 했을 것이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엔 신호등 없는 작은 횡단보도다. 그 곳에는 돌로 된 차단석 '볼라드'도 함께 있다. 지팡이로 차단석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그의 무릎이 쿵하고 부딪힌다. 그가 가야하는 길엔 이런 보도가 아직 네 개나 더 있다.
이렇게 김씨는 이 곳을 4년 동안 걸어다녔다. 그의 직업은 '안마사협회' 교사. 교대역 1번 출구에서 약 5~10분 거리에 있는 협회 사무실에서 그는 시각장애인들에게 안마와 침술을 가르쳐주고 있다.
교대역부터 안마사협회까지, 10분은 너무 험난했다사실 유도블록과 차단석 등 시각장애인들의 통행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어제 오늘 문제가 아니다. 교대역과 안마사협회를 오가는 약 10분 정도의 '불편함'은 서울 시내 다른 길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 곳이 좀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안마사협회'를 다니는 70명의 시각장애인들이 매일같이 이 길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대형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높은 이 곳에서조차, 시각장애인을 배려하는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장애인 복지의 현 주소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안마사협회'는 시각장애인들에게 안마 기술과 의학을 가르쳐주는 곳이다. 이 곳의 1·2학년 시각장애인 학생들과 교사 약 70여명의 대부분이 1·2급 중급 시각장애인들이다. 대부분의 교사들과 학생들이 지하철을 이용하기 때문에 김씨처럼 역과 안마사협회를 오가는 길을 자주 이용하고 있다.
많은 시각 장애인들이 오고 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배려는 없다. 안마사협회가 교대역 근처로 이사한지 4년이 다 되어가는데, 교대역과 안마사협회 사이의 길은 아직도 시각장애인들에게 위험천만한 길일 뿐이다.
교대역 안과 밖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더 확연해진다.
역 안 유도블록은 장애인이 다니기 쉽게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지하철 출구 앞까지만이다. 시각장애인들의 유도블록 설치 요구에 궁여지책으로 바닥에 페인트를 칠해놓았지만 약시를 가진 시각장애인들에게만 겨우 보일뿐, 전맹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또한 거리에는 차단석과 불법주차된 자동차가 시각장애인들의 자유로운 통행을 방해하고 있다.
김씨는 "유도블록이 없어서 옆길로 빠질 때가 많아 위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며 "우리에겐 생명선이나 다름없는데 그게 없으니 차단석에 부딪히고 심지어 지팡이까지 부러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세 차례 민원 넣었지만, 아직도 유도블록은 무소식어째서 이 곳에는 그 흔한 유도블록조차 깔려있지 않은 걸까? '안마사협회' 1학년 학생인 안창호씨는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직접 구청으로 찾아갔다.
"서초구청에 찾아가 문의했는데 처음엔 사유지라서 안된다고 하더니, 나중엔 도로(차도) 확장공사 때문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아직 확장 공사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제가 졸업할 때까지 유도블록이 설치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서초구청의 정확한 입장은 무엇일까? 구청 토목과에 이에 대해 문의했지만, 담당자는 상황을 잘 알지 못했다.
토목과 직원은 12일 전화 인터뷰 요청에서 "이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고, 기자가 이를 설명하자 "사유지는 구청 마음대로 할 수 없으므로 소유자에게 유도블록 설치를 요구할 수 없다"고 답했다. 도로 확장 공사에 관한 설명은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잘 아는 담당자를 연결해달라는 부탁에 다시 전화해주기로 하였으나 연락이 오지 않았고 기자의 두 번째 인터뷰 요청에도 "현장 근무 때문에 전화해줄 시간이 없었다"는 말로 답변을 회피했다.
피창석 대한안마사협회 교무주임교사는 "2004년 9월부터 세 번쯤 계속 민원을 제기했지만 그때부터 (구청은) 도로 확장 공사 계획이 있다고 했다"면서 "하지만 아직 그 공사는 시작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피 교사는 이어 "인도가 사유재산이어서 안 된다고 하지만, 별다른 피해를 주지도 않고 큰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닌데 유도블록 설치가 왜 그렇게 어려운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안마사협회라는 단체의 이름으로 제기한 민원도 이렇게 수년째 방치되고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이 그 불편함을 해결하지 못하고 사는지 짐작이 간다.
이제 참다 못한 '대한안마사협회' 시각 장애인들이 더 구체적으로 나서고 있다. 구청에 유도블록 설치 요구서를 전달하고 서명 운동을 펼칠 계획이다. '교대역 1번 출구'가 과연 장애인 보호 구역의 사례로 바뀔 수 있을지 주목된다.
덧붙이는 글 | 김혜민 기자는 <오마이뉴스> 7기 인턴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