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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기슭 눈과 얼음이 채 녹기도 전에 피어나는 꽃이 있습니다. 행복과 건강을 몰고 와 얼어붙은 가슴을 녹여내며 우리들에게 축복을 안겨주는 꽃, 복수초(福壽草)입니다. 땅 위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어 ‘땅꽃’, 얼음 사이를 비집고 솟아나 ‘얼음새꽃’, 설 즈음에 핀다 하여 ‘원일초(元日草)’, 연꽃을 닮아 ‘설연화(雪蓮花)’라고도 부릅니다. 봄볕을 담뿍 받고 피어나면 ‘황금의 꽃’이란 별명이 붙기도 합니다.

 

 언땅을 녹이고 비집고 올라와 '얼음새꽃' 또는 '눈색이꽃'이라고도 합니다.
언땅을 녹이고 비집고 올라와 '얼음새꽃' 또는 '눈색이꽃'이라고도 합니다. ⓒ 윤희경

 

많은 이름 중에 얼음을 뚫고 솟아나는 얼음새꽃, 눈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눈색이꽃’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겨울의 끝자락을 작정 없이 밀어내고 강인한 생명력으로 봄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쌓인 잔설들을 헤집고 지난한 몸짓으로 피어오르는 모습은 그냥 그대로 동트는 새벽이며 부서지는 아침햇살입니다.

 

복수초 피어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봄 마중을 떠납니다. 언 땅을 녹여 사정없이 치솟으면 어쩌자는 것인지, 봄볕을 받아 꽃물을 빨아들이기 시작하면 온몸의 신열이 나고 뿌리에선 식물난로처럼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릅니다. 

 

 복수초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신열을 앓듯 몸이 뜨거워옵니다.
복수초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신열을 앓듯 몸이 뜨거워옵니다. ⓒ 윤희경

복수초는 이름만큼이나 많은 전설을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크노맨’이란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답니다.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녀가 드레스자락을 나부끼면 태양은 황홀하여 황금빛을 내뿜고, 바람은 가던 길을 멈추었으며, 달은 머리카락을 만져보려고 가까이 다가서곤 했답니다. 눈을 한 번 꿈쩍이면 나는 새와 지는 짐승들도 눈이 멀 지경이었답니다.

 

욕심쟁이 왕은 여러 신랑감을 물색하던 중 땅 부자 두더지와 결혼을 시키려고 갖은 수를 다 썼답니다. 하필이면 세상에서 제일 못난이 두더지와 짝을 맺어 주려 하다니 왕도 참 딱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크노맨 공주는 태양만을 사랑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왕은 공주에게 벌을 내리려 하자, 춥고 어두운 겨울 밤 도망을 치다 얼어 죽어 노란 꽃이 되었다는데….

 

 '누나야, 벌써 복수꽃이 피었어' 어쩌면 좋아 누나
'누나야, 벌써 복수꽃이 피었어' 어쩌면 좋아 누나 ⓒ 윤희경

 

그래서일까, 복수초는 갈색 대지 위에 샛노란 얼굴을 내밀고 태양만을 기다립니다. 비나 눈이 내리면 이내 조동일 다물고 눈을 감고 있다가 태양이면 환한 미소로 봄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눈 속을 헤집고 애잔하게 피어나는 복수 꽃, 태양이 솟아나면 가슴 무너져 울지도 못합니다. 입술만 벙긋 웃지도 못합니다.

 

꽃말은 ‘영원한 사랑’ ‘봄의 미소’ ‘슬픈 추억’이라 합니다. 내게도 아리고 시린 추억 하나 있습니다.

 

양지 말에 살던 누나는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태양을 닮은 둥근 얼굴과 얼음처럼 하얀 살결을 갖고 있던 소녀, 겨울 끝자락 등교 길이었습니다. 털장갑을 내밀며 ‘손이 많이 텄구나’ 했고, 목도리를 걸어주며 ‘목이 허전하겠네’ 했습니다. 그러나 단발머리에서 풍겨나던 노란 꽃 내움만 알았지 그 소리가 무슨 뜻인 줄 몰랐습니다.

 

 봄의 전령사 복수초 사이로 미소가 일렁입니다.
봄의 전령사 복수초 사이로 미소가 일렁입니다. ⓒ 윤희경

 

눈처럼 사라져간 풋풋한 향기, 누나는 복수초(福壽草)를 좋아했습니다. 죽으면 샛노란 복수 꽃이 되고자 했습니다. 겨울이 지나갈 무렵이면 날마다 복수 꽃 피어나는 소리를 듣습니다. 바람 사이를 스쳐 오는 복수 꽃 피는 소리, 매운 겨울 숲을 건너가는 복수 꽃 선율을 들으며 이 봄을 맞이합니다.

 

 복수꽃이 피기 시작하면 난 봄맞이 긴 봄편지를 써야합니다.
복수꽃이 피기 시작하면 난 봄맞이 긴 봄편지를 써야합니다. ⓒ 윤희경

봄의 전령사 복수초, 노란 꽃술이 터질 때마다 멈췄던 시간을 되돌려내고, 땅을 흔들어 깨우며 봄을 이고 나옵니다. 다른 식물들이 동면에서 깨어나 자리다툼을 시작하면 복수꽃은 벌써 저만치 물러나 있습니다.

 

서둘러 피어나 복을 나눠주고 훌쩍 떠나간 자리에 누나 냄새가 납니다. 누나를 닮은 꽃, 복과 부귀와 장수를 가져다준다는 복수초, 올해엔 더 많은 행복을 달라 해봅니다. 겨울이 뒷걸음질치고 있습니다. 따사로운 햇살에 묻어나는 복수꽃 내움, 허하고 시린 가슴 사이로 꽃바람 일어나는 봄.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 농촌공사 전원생활 포탈사이즈, 네오넷코리아 북집에도 함께합니다.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이야기'를 클릭하면 고향과 시골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복수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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