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갈까? 설 연휴 마지막 날 어디론가 떠나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구체적인 목적지를 정하지 못했다. 남쪽 북쪽 아니면 서쪽. 망설임 끝에 오늘은 건봉사에 가자. 멀게만 느껴져 마음에 두기만 했던 곳, 강원도 북쪽 끝 고성 건봉사.
부처님 계신 집에 가자고 하니 아이들이 신나 한다. 절에 자주 가는 것도 아닌데 달력의 불상만 봐도 합장하고 절하는 작은 아이 정윤이. 한글을 배우는 재미에 글씨 읽기를 좋아하는 7살 인화는 반야심경을 다 외운다. 실내놀이터보다 절에 가는 걸 더 좋아하니 이건 또 무슨 인연인가. 먼 길 떠나는 말에 여물 먹이듯이 기름을 채워 넣고 네비게이션에 건봉사를 찍으니 1시간 57분 거리란다.
건봉사는 눈에 파묻혀 있었다. 절집을 오르는 길, 왼쪽의 부도밭은 하얀 눈에 덮여 있어 감히 다가설 엄두를 못 내게 했다. 눈이 온 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무릎 위까지 빠지는 눈밭은 불심이 얕은 이는 돌아가라 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건봉사. 석가모니 부처의 치아사리를 직접 볼 수 있는 곳. 그래서 인가. 대웅전을 참배하고 만일염불원에 안장된 진신사리를 친견하니 어린 딸 둘이 삼배를 올린다. 두 다리 쭉 펴고 바닥에 엎드려 두 손 모은 위에 머리를 대니 그 모습이 진정 오체투지다. 가까이 다가가 사리를 친견하니 욕심이 일어 셔터를 누른다.
사명대사가 가져온 석가모니의 치아 사리
부처님 진신을 여기 두고 대웅전부터 들렀으니 참배 순서가 틀린 것 아닌가? 진신사리를 모신 절에 대웅전은 또 뭔가. 사람만 다니게끔 눈을 치운 길을 따라 적멸보궁을 오르며 드는 생각이다. 그러다가 절집에 와서 부처만 친견하면 됐지 무슨 자로 뭘 재려하는가 분별심만 더 하니 아직 멀었구나 하고는 “관세음보살”을 염송한다.
조선시대 4대 사찰에 들 만큼 세가 강하고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돼 있어도 사람의 다툼은 당할 수 없음인가? 눈에 묻힌 빈터에 서서 웅장한 가람과 골짜기를 가득 메웠을 염불소리를 상상한다. 이 골짜기를 가득 메웠을 포탄 터지는 소리와 총소리 검붉게 타올랐을 화염, 그리고 부상당한 이들의 신음소리. 깨달음을 향한 구도도량이 사람들에 의해 지옥으로 변해 향내음 대신 살과 뼈가 타고 화약 냄새만 가득 했으리라.
신라 법흥왕 7년(520년) 창건된 건봉사. 몇 번에 걸친 화재와 한국전쟁으로 남김없이 불탔지만 일제 강점 초기까지도 31본산의 하나로 백담사와 신흥사를 말사로 거느렸다.
아도화상과 도선국사, 나옹화상, 사명대사, 만해 한용운 등이 이 절의 이름을 널리 알린 고승들이니 한국불교사가 여기 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승군을 일으켰고, 일본에서 석가모니의 치아 사리를 찾아 건봉사에 봉안하기도 했다. 사명대사가 가져온 석가모니의 치아 사리는 만일염불원에 모셔져 있어 일반인들의 친견이 가능하다.
이 치아 사리는 본래 통도사에 있었다. 이것을 임진왜란 때 일본이 훔쳐가자 사명대사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담판을 벌여 되찾아 왔다. 그 후 건봉사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1900년대 초까지 영화로운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우리 근대사의 아픔도 배어 있는 곳이다.
건봉사는 한국전쟁 때 잿더미가 되었다. 사람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1945년 북한의 통치권에 묶이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10일. ‘부처님 오신 날’을 불과 3일 앞두고 재앙을 맞이했다고 한다. 유엔군은 후퇴하던 북한군의 중간집결지였던 건봉사에 무차별 공습을 벌인다. 3~4대의 폭격기는 대웅전 지역의 모든 전각을 불태웠다. 국보 412호 ‘금니화엄경’ 46권과 도금원불, 오동향로, 철장 등 사명대사 유물이 모조리 사라졌다
16년 전 이곳을 참배했을 당시 함께 했던 심상란씨는 국군을 따라 강릉에서 이곳에 와 주먹밥을 만들어 향로봉까지 지게로 져 날랐다고 했다. 이 지역은 2년간 처절한 고지전의 현장이었다. 향로봉·건봉산 전투는 물론 북한 쪽의 351고지전투, 월비산 전투 등 전사에 남을 지루한 싸움이 벌어졌다. 1951년 4월부터 휴전 직전까지 16차례의 공방전에서 국군이 쏘아댄 포탄만 10만발에, 미 7함대 함포사격과 공군기 폭격으로 초토화됐다.
한국전쟁 당시 초토화 돼
국군 수도사단을 시작으로 이곳에 교차 투입된 국군 부대가 7개 사단에 이르고, 그때마다 이곳에 주둔하던 국군에 의해 건봉사의 남아 있던 전각과 요사채는 군부대 막사와 땔감으로 헐려 나갔단다. 휴전 후에는 주둔한 군부대의 실화로 낙서암 지역이 소실되는가 하면 고승들의 부도탑이 밀반출되고 그 많았던 중요 문화재들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1954년 이후에는 불이문 외에는 완전히 폐허로 변해 헐벗고 잡초만 우거진 빈 터가 되어버렸다. 전쟁 직전 640칸 규모의 건봉사가 사라진 것이다. 사람들의 다툼으로 인한 전쟁이 1500년 역사를 지켜온 문화재를 한 순간에 날려 버린 것이다.
16년 전의 또렷한 기억은 없지만 곳곳에 놓인 잘 다듬은 돌과 화려한 단층은 제 모습 찾기의 시작인 듯 하다. 하지만,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1900년대 초의 모습을 회복하려면 아직 멀었다. 건봉사의 당우 가운데 전란을 피한 것은 불이문 하나다.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저가 기둥 받침돌에 새겨진 불이문에는 총탄의 상처가 남아 있다.
건봉사는 눈여겨볼 만한 것이 많다. 적멸보궁과 대웅전을 나누는 계곡 위에는 홍교 양식의 능파교가 걸려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솟대의 머리에는 돌로 새긴 오리가 앉아 있다. 또 능파교 양켠에 있는, 수행의 과정을 나타내는 십바라밀을 새긴 석주 또한 건봉사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최원석기자는 자전거포(http://www.bike1004.com)를 운영하며 강원 영동지방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