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연구년을 보내는 교수들은 대부분 대학교의 전임교수다. 그것도 중진 이상인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6년 이상 정규직 교수로 근무한 사람에게만 1년간의 연구년을 신청할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연구년을 나오는 교수들은 보통 대학교에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교수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교수들이 연구년으로 외국에서 하는 일은 연구가 아니다. 한 1년 잘 놀다 들어가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주업이 골프인 경우가 많다. 월급 받고 노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져서 방문교수 골프대회를 월례적으로, 그것도 평일에 가진다는 공지가 미국 대학교 한인학생회 홈페이지에 버젓이 실리는 지경이다.
'방문교수로 온 사람들은 골프를 하면 안 되는가'나 '골프대회를 하면 안 되는가' 하는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 왜 안 되겠는가. '골프가 좋다, 안 좋다' 혹은 '사치스러운 운동이다, 아니다'와 같은 논의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교수들의 사적인 여가선용에 대해 시비를 걸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방문교수 골프대회가 열리는 배경과 그러한 분위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우리나라 연구년 제도의 실태를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연구년이 골프와 쇼핑의 기회?한국의 대학교에서 교수가 연구년을 간다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한 1년 잘 쉬고 오세요"라는 말이 지배적이다. 연구년 가는 교수들의 주요관심사도 역시 그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아이를 미국 학교에 입학시키는 데 어떤 문제가 있느냐", "돌아올 때는 자식들을 거기에 남겨놓고 영어를 더 시키는 것이 좋지 않냐", "골프장은 어떠냐?", "미국에서 차를 사 오면 세금관계는 어떻게 되느냐", "여행은 어디로 다니는 것이 좋냐", "달러가 약세이니 쇼핑할 좋은 기회다" 등이 교수 사이에서 연구년과 관련된 대화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구년 가서 이런저런 연구를 하겠다는 이야기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이번 기간 동안에 이런 책을 좀 써 보려고 한다"거나 "그동안 행정에 치여 지냈으니 공부나 좀 맘 편하게 해 보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예 기대도 하지 못한다.
규정에 명시되어있는 연구년의 목적과 취지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연구년을 보내는 대학교의 관계자나, 연구년을 가는 당사자에게 그런 조항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 되었다.
"연구년이라 함은 본교에 일정기간 근속한 교원이 강의를 담당하지 아니하고 학술연구활동에 전념하는 기간을 말한다."(○○대학교 교수연구년제 관한 규정)교수들 사이에 연구년이 노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보니 일반인들의 생각도 역시 그렇다. '안식년'이라는 용어가 더욱 많이 알려져 있고 그 말 그대로 1년 잘 안식하는 것이 연구년이 된다.
이 바닥을 좀 아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1년에 두 번이나 있는 긴 방학 동안에도 그렇게 놀 수 있는 게 교수인데, 아주 한해 동안 가서 뭘 한다고"하는 정도다. "그래도 대학 교수라고 하는데 연구년 동안 뭔가 대단한 연구를 하겠지"라는 생각은 정말이지 개가 웃을 만한 일이 된 지 오래다.
'묻지마 연구년' 만드는 우리 대학의 현실이런 글을 쓰면 돌아오는 반론이 대부분 비슷하다.
"연구년 가서 공부 좀 하다가 골프 할 수도 있는 일이지, 너는 하루 종일 공부만 하냐", "그동안 연구하느라고 그 고생을 했는데 한 1년 잘 쉬어야 재충전이 된다. 교수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정신노동인 줄 아냐", "학문의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동료 교수들과는 사적인 생활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나름대로 다 가서 열심히 한다" 등. 이 정도면 그래도 점잖고 애교스럽다. 보통은 "너나 잘 하세요"다.
그런데 결국 이런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구차한 변명이라는 것을 교수 본인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애당초 학문에는 관심없는 사람이 상당수이고 그들은 연구년 가서 아예 공부할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 참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것이 현주소다. 그러니 우리나라 대학교수 사회가 수많은 비리의 온상이나 꼴불견의 총화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교의 전임교수 제도가 워낙 철밥통이다 보니 그나마 공부에 대한 관심이 있는 교수들도 애당초에 가지고 있던 연구에 대한 열정보다는 다른 것에 재미 붙이는 것이 훨씬 편안해지고 그렇게 적당히 살아가는 나쁜 버릇에 젖어든다. 몇 년 그런 사회 속에서 묻어가다 보면 '근묵자흑'이 된다. 그나마 학문이나 교육에 관심있는 사람들도 만연한 풍토를 역행할 만한 의지와 이유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꿋꿋이 학자적인 소양과 양심을 지켜가려는, 적지만 훌륭한 선생님들이 있어 그들에 의해 그나마 우리 대학교들이 이 정도라도 유지를 하는 것이다. 즉 모든 교수들이 그런 것이 아니며, 정말이지 골프가 됐든 무엇이 됐든 운동이라도 좀 해보라고 도리어 권해 주고 싶은 선생님들이 왜 없겠는가.
그렇지만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몰지각(?)한 일부의 교수들이 아니다. 최소한 대학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다수의 교수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고 그런 교수들이 만들어가는 연구년의 풍토를 말하는 것이다.
홈페이지에 버젓이 올라오는 골프대회 공지
이런 분위기가 존재하기에 월례 골프대회 공지가 현지 대학교 한인학생회 공식홈페이지에 버젓이 올라오는 것이다. 홈페이지에 올라온 방문교수들에 대한 동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 골프 이야기다. 아니 골프 이야기 이 외에는 본 적이 없다.
한인학생회장의 방문교수 모임 동행 후기에도 그놈의 골프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방문교수 인터넷 카페를 만들었다 해서 가 보면 역시 눈을 씻고 봐도 골프 이야기 외에는 없다. 정말이지 신기할 정도로 연구년 교수라는 말과 골프라는 말은 항상 예외 없이 붙어다닌다. 도무지 어디에서도 연구에 대한 관심은 찾아볼 수가 없다.
외국인 교수들은 주로 연구년을 다른 대학에서 강의하거나 새롭게 연구 영역을 심화하고 넓히는 기회로 삼는다. 애당초 자신의 학문분야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이 충만한 사람들이 교수를 하다 보니, 자신의 주전공이나 주변 학문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1년 정도의 기간은 적절한 재충전과 학문적인 발전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된다.
물론 외국교수라고 '농땡이'가 왜 없겠는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연구년에 대한 분위기가 우리나라와는 완전히 다르다. 한국에서는 아예 연구년이라고 하지 말고 '골프년'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놀아도 고액연봉에 신분보장까지 좌우간 이렇게 다달이 골프대회를 하면서 친선을 도모하는 신선놀음식 연구년을 하는 동안에도 월급은 꼬박꼬박 나온다. 이런 교수들 가운데 억대에 가까운 연봉을 받는 사람도 있다. 그 돈은 고스란히 연구년 교수의 자녀 영어연수비용과 골프비로 나가는 셈이 된다. 사모님 명품 쇼핑을 위해서는 특별 연구비를 좀 더 신청해야 할 판이다.
그 돈으로 1년 동안 자식이 미국 학교에 가는 것 뒷바라지하고, 자신은 낮에 골프장 가고, 오후에는 마누라와 명품 매장을 돌며 "샤핑" 좀 해주고…. 또한, 저녁에는 교수사회의 기득권 강화를 위한 친목도모 차원의 회식이 빠지지 않는다.
학생들의 공납금과 국민이 낸 세금으로 이런 환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들의 재정에 국가가 지원하는 비중은 상당하며, 대학교 재정에서 가장 큰 부분은 교수들의 월급이다. 결국 이 돈이 다 학생들과 국민의 호주머니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국가와 대학교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을 정해 놓고 골프하는 교수들의 신분과 경제 환경을 보호해 주는 것이다.
제9조(연구교원의 처우) ① 연구교원에게는 보수 전액을 지급한다.② 연구교원에게는 예산의 범위 내에서 연구년 중의 연구활동에 필요한 연구비를 지급할 수 있다.③ 연구교원은 승진, 연봉책정, 연구비 신청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아니하는 등 본교 교원으로서의 신분이 보장된다.(○○대학교 교수연구년제 관한 규정)만일 공무원이 공무 수행 중에 골프를 했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그것도 평일에. 업무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에 사적으로 골프를 하고서도 당당할 수 있는 직업이 교수와 골프선수 이외에 또 있을까.
평소에 골프 좀 하고 주말에 공부한다느니, 재충전을 위한 연구를 위해서 맑은 공기를 마신다느니, 그야말로 말 잘하는 교수들의 변명은 2만5000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그것이 본질인지 말이다. 연구년 기간이 아닐때도 이러한데 연구년으로 와서는 더 말해 무엇하랴. 한인 학생회 홈페이지에 버젓이 방문교수 월례골프대회 공고를 올리는 것은 전혀 어색할 것이 없다.
이러한 분위기에 젖어있다 보니 이미 자신들이 하는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조차 구별이 되지 않는 것이다. 워낙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다 보니 이런 행동이 뭔가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조차 하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자정능력은 애당초 존재한 적도 없었고 문제에 대한 인식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런 식의 연구년, 이건 아니다그런데 더 우려되는 것이 있다. 이러한 현상을 보는 이곳 한인 학생들의 생각이다. 필자가 방문교수로 온 이 대학교는 미국에서도 학생 수로 수위에 꼽히고 한국학생들도 줄잡아 수백 명이 된다. 한국의 대학교수를 가장 많이 배출한 외국 대학이라는 소리도 얼핏 들었다.
그런 학생들이 연구년을 온 교수들이 올린 골프대회 공지를 접하며, 그리고 그들의 평소 행태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라는 의문이 든다. "아, 교수님들이 공부하시다가 잠깐씩 머리 식히시느라 운동을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려나? 아니면 "역시 한국에서 교수되면 놀고먹고 최고라니까, 나도 한국 가서 어떻게든 교수되어 연구년에 골프나 치고 놀았으면 좋겠다" 혹은 "역시 한국 교수들은 미국 교수와는 많은 차이가 있구나, 참 많이 불성실하구나", "역시 이래서 한국은 안 된다니까"일까. 한번 설문 조사라도 해 보고 싶다.
방문교수들이 골프대회 한다는 공고의 조회 수가 다른 글보다 월등히 많다. 그걸 보는 나의 가슴은 뜨끔하다. 저 공지를 읽은 수백 명의 사람들은 왜 읽은 것일까, 모두 방문교수로 온 사람들은 아닐 텐데…, 읽으면서 무슨 생각들이 들었을까? 하기야 미국에서 최고급 승용차를 몰고 같이 골프 치러 다니는 유학생들이야 뭔 생각이 있겠는가만은….
역시 교수라는 직업은 - 최근 들어 조금 귀찮게 구는 면이 없지 않지만 - 그래도 아직까지는 매력적인 직업이다. 세상에 1년 동안 아무 일도 안 해도 그 많은 월급을 고스란히 주는 직업이 어디에 또 있는가. 연구년 1년간 그야말로 아무것도 안 하고 놀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교수를 나는 너무도 많이 보았다.
연구년 이후 대강이라도 엉터리 논문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20년 전에 만들어 놓은 강의 노트가 바뀌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미국에서 골프를 한 이야기로 강의 중에 여담 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골프에 인생이 담겼다느니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리를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다. 놀던 관성 탓에 학교에 나오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자연스런 현상도 동반한다. 아무리 자율적인 학문의 세계가 어떻고 저떻고 해도 속된 말로 이건 아니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인용한 상황과 글, 조항들은 구체적인 사실이지만 현 실태를 설명하기 위한 예로서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 혹은 기관을 비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용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힙니다. 또한, 이 글이 학문연구에 꼭 필요한 제도로서 연구년의 긍정적인 면을 충실히 수행했거나 수행하려는 학자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기사는 한겨레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