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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도보순례 셋째 날 아침, 순례단이 하룻밤을 보낸 김포 용화사에 도착했다. 하루 일정을 시작하면서 이필완 목사가 한 마디 한다.

 

"어제 회의에서 이야기했듯이 오늘부터는 길을 걸을 때 한 줄로 서서 걷고 되도록 말은 하지 않도록 합시다. 취재팀도 인터뷰는 쉬는 시간에 해주세요."

 

눈앞이 캄캄해진다. 지난 이틀은 순례단과 함께 걸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거기서 '기사거리'를 얻었는데, '묵언수행'이라니. 입을 꾹 다물고 한 줄로 서서 걸어가는 순례단을 보니 걱정이 앞선다. '오늘 기사 못 쓰는 거 아냐?'

 

그런데 말을 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강도 보고 산도 보고 하늘도 보고, 날이 조금 풀린 덕분에 바람도 시원하게 느껴진다.

 

어제는 '생중계' 형식으로 기사를 송고해야 했기 때문에 걸으면서도 쉴 새 없이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쓰느라 정말이지 하루가 '전쟁'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손에 꼭 쥐고 있던 수첩도 펜도 디카도 주머니에 넣은 채 '인턴기자'가 아니라 '순례단 중 한 명'이 되어 걷는다.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과 함께 걷고있는 홍현진 인턴기자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과 함께 걷고있는 홍현진 인턴기자 ⓒ 김호중

 

생태적 가치를 최우선시 하는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전날 밤 나눴던 대화에서 수경스님은 "대운하를 찬성하냐 반대하냐를 떠나서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인 '생명'과 '평화'를 성찰하려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순례길 역시 강 길을 따라 걸으며 운하건설로 인해 파괴될 혹은 이미 개발로 인해 파괴된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도록 짜여 있다.   

 

순례단의 깃발에도 어깨띠에도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강은 생명입니다'라는 말이 적혀있다. 이들은 단순히 '대운하 건설 저지'만을 위해 도보순례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생명' '평화'라는 보다 더 큰 틀 속에서 걷고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솔직히 저도 인권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지만, '자연'이라고 하면 추상적인 개념 같거든요.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만을 쫓는 시대이기는 하지만, 환경문제로 가면 더욱 그런 것 같아요. 인간이 고통받고 있는 건 눈에 보이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잖아요."

 

"왜 사람들이 약자에 대한 배려는 하면서,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명백히 약자인 자연은 배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묻는 생태지평 명호 홍보팀장의 질문에 내가 답했다. 

 

그러고 보면 초등학교 시절 환경보호 포스터를 그릴 때를 제외하고 자연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있던가. 도시에서 자라서 그런지 공부를 안 해서 그런지 몰라도, 오늘 윤순영 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님께서 생태계 파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시는데 억새와 갈대의 차이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들이 손에 잡히지 않고 붕붕 떠다니는 것 같았다. 

 

이처럼 자연·환경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했던 내가 생태적 가치를 최우선시 하는 순례단과 함께 있다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강예찬'을 늘어놓으며 눈을 반짝 반짝 거리시던 연관스님, 10년, 20년이 걸리더라도 한강하구를, 재두루미를 지켜내고 싶다고 말하던 윤순영 이사장, 이들은 자연이 있기에 행복한 그래서 자연을 지켜주고 싶은 사람들이다

 

 지난 2003년 삼보일배로 서울에 입성한 직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수경스님과 문규현 신부(자료사진).
지난 2003년 삼보일배로 서울에 입성한 직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수경스님과 문규현 신부(자료사진). ⓒ 권우성
순례단 중에는 이번 순례 이전에도 전국 각지를 돌며 '생명'과 '평화'를 위한 순례를 해온 사람들이 다수 포함됐다.

 

수경스님은 문규현 신부 등과 함께 새만금 사업 반대를 위한 '삼보일배'를 했고, 도법스님 역시 이번 순례에도 함께 참여한 김민해 목사, 이원규, 박남준 시인 등과 함께 4년간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했다.

 

부끄럽지만 순례에 참여하기 전에는 나는 수경스님이 누구인지도 잘 몰랐다. 그런데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 탈진한 상태에서도 휠체어를 타고 끝까지 삼보일배를 마쳤던 수경스님의 사진을 보았다. 

 

서울에 입성하는 순간 문규현 신부와 함께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 힘든 길을 스님은, 순례단은 다시 걷고 있는 것이다.

 

어리바리 인턴기자, 그들과 인연을 맺다

 

지난 3일 동안 '안면인식장애'로 인터뷰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이 안 나 "혹시 저랑 인터뷰 하셨어요?"라고 물어보며 행렬 속을 따라다니고, 스님은 승복을 입고 있어 누군지 알겠는데 목사님과 신부님은 구분이 안 가 신부님한테 가서 "목사님이세요?"라고 묻고, 그러고는 또 잊어버리고, '밥 남기면 혼난다'고 해서 마지막 남은 한 톨까지 꾸역꾸역 집어넣다 결국 체해서 사경을 헤매고.

 

이렇게 어리바리한 인턴기자였지만 추운 날씨에도 여기저기 열심히 뛰어다니며 취재하는 게 기특해 보였던지 "힘들지 않아?"라며 걱정해 주기도 하고, 수경스님은 "니가 예쁘니까 주는겨"라며 손에 사탕을 쥐어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순례단이 종교인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천막에서 노숙을 해도 추위를 느끼지 않을 것 같고, 100일을 걸어도 '신념'이 있기 때문에 힘들지 않을 것만 같은 '환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사람이었다. 영하의 날씨에 길바닥에서 자려니 '얼어죽을 것'만 같고, 많이 걸으면 '백두대간이 문제가 아니라 내 대간이 문제'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순례단과 나누는 대화 역시, 생태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람 사는 이야기'도 나눈다. 내가 대학생이다 보니 "앞으로 진로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기도 하고, 무덤에 놓여있는 조화를 보며 '무덤에 조화를 놓겠냐, 생화를 놓겠냐'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김영동 목사는 "생화도 이미 꺾은 꽃이기에 더 이상 살아있는 꽃이 아니다"는 아이러니를 내게 알려준다. 점심을 같이 먹던 월간 <풍경소리> 대표 김민해 목사는 내가 영문과에 재학 중이라고 하자 "이것도 인연인데 언제 한 번 번역이라도 해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이번 2박 3일간의 취재에 합류하게 된 것은 '운하건설로 인한 환경파괴가 걱정되서' 라기 보다는 '새로운 경험을 하겠구나, 재미있겠다'는 이유가 더 컸다. 이런 기회가 없었다면 나는 순례단원들을 만나고 인연을 맺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평생을 미디어를 통해서만 이들의 소식을 접하고 '아,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하고 넘어가진 않았을까.  

 

 걷고 있는 도보순례단
걷고 있는 도보순례단 ⓒ 김호중

 

'생평', '평화' 그리고 '희망'을 보았던 2박 3일

 

지원팀인 불교환경연대 명계환 조직팀장은 "이번 순례에 참여한 종교인들이 워낙 성정이 맑으신 분들이라 함께 다니는 것만으로도 수행이 되는 것 같다"며 "모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라고 말했다.

 

나 역시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3일간 순례단과 함께 다니면서 나 스스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 날 이들과 함께, 자연과 함께 걸으면서 정말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례단을 떠나던 날 수경스님은 인턴기자들에게 "가지 말고 100일 동안 따라다녀, 학교 가봤자 배우는 거 하나 없어"라며 아쉬워한다. 그리고 "가끔씩 찾아오라"고 말한다. 2박3일이라는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희망'을 보았다. "100년 전 사람들에게 서울이 이렇게 번창할 거라고 말한다면 믿겠냐"며 "가치에 천착한다면 패배해도 후회는 없다"는 도법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당장 눈앞에 있는 가치에만 연연하지 않고, 10년, 20년, 나아가 100년 앞을 내다보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이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순례단은 한강 어딘가를 거닐고 있을 것이다. 따뜻한 봄 그들이 낙동강 을숙도에 도착하기 전에 꼭 한 번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을 찾아가고 싶다. 

덧붙이는 글 | 홍현진 기자는 <오마이뉴스> 7기 인턴기자입니다. 


#대운하#도보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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