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만 쳐다보고 원망하다 열흘이 넘게 호남의병 순례기를 한 자도 쓰지 못하였다. 그새 설 연휴로 가족을 만나기 위한 나들이도 있었지만, 설 연휴 마지막 날인 지난 2월 10일 밤에 일어난 숭례문 화재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인지는 모르나, 정초에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둔 즈음에 국보 제1호가 방화로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민족문화 현주소의 한 단면을 보는 듯, 창자가 찢어지는 아픔에 하늘만 쳐다보고 원망하였다. 일전에는 우리 얼의 가장 알짜 고갱이인 우리말을 제치고,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영어 이외의 일반과목도 영어로 수업하는 방안을 새 정부 인수위에서 검토하겠다고 하여 산골 서생을 까무러치도록 놀라게 한 바 있었다. 이즈음, 우리나라가 갑자기 다시 식민지로 전락한 듯 암담하다. 평생 우리말을 가르쳐 온 훈장으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전율에 마른 하늘에서 벼락을 맞은 기분이다. 이런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외부의 충격이 나와는 상관없는 양, 어찌 산골 글방에서 마음 편히 일백년 전 의병 이야기를 쓸 수가 있으랴. 일찍이 조선 정조 때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소리와 빛은 외물(外物 바깥세계의 사물)이니, 이 외물이 항상 이목(耳目)에 누(累)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똑바로 보고 듣는 것을 잃게 한다”고, 눈과 귀로 보고 듣는 바깥세상의 사물에 경계하라고 말씀하였다. 하지만, 내 수양이 부족한 탓으로 천인공노할 현실을 외면도 못하고, 그렇다고 행동으로 옮기지도 못한 채, 탄식만 하고 지냈다. 내 글을 열독해 주시는 몇몇 분들이 이런 내 마음을 읽고 계신 듯, 안부와 격려 전화도 해 주셨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글 하기는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에 바르고 어진 지도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조만 하더라도 세종대왕과 같은 성군(聖君)도 있었고, 연산군과 같은 부도덕한 폭군(暴君)도 있었다. 백성들은 성군을 만날 때는 태평성대를 누렸고, 폭군을 만날 때는 학정에 시달리면서도 반정(反正)의 날을 기다리며 역사를 면면히 이어왔다.
나의 이 의병전적지 순례기는 오히려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글일 것이다. 나는 평생 교육자로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이 나라를 지켜 온 선열들의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 그리하여 자라나는 세대들이 나라 사랑과 우리 얼을 일깨우고 민족 문화의 소중함을 알게 해야 한다. 다음 세대들이 자자손손 이 나라를 더욱 굳건하게 지켜나갈 수 있도록 자긍심을 심어주는 게 내 남은 인생의 소명이다. 어떤 이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한 세기 전 단발령이 내릴 때와 같은 시대착오의 얘기를 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구촌이 점점 가까워지는 국제화, 세계화된 세상에 살수록 더욱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우리 역사와 문화를 지키는 게 세계인으로 당당하게 사는 지름길이다. 해외로 이민을 가보면 자기 모국이 번듯할수록 다른 나라 사람으로부터 대접받고 자긍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이치와 같다. 양진여 의병장 생애
양진여(梁振汝) 의병장은 1862년 5월 11일 광주군 서양면 니동(현,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과 문흥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이며, 호는 서암(瑞菴) 휘는 진영(振永)이며, 자는 진여(振汝)다. 어려서부터 청운의 꿈을 품고 공부하였으나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은 나라를 보고서 과거를 볼 생각을 단념한 채 부인 밀양 박씨와 함께 주막을 하면서 거병준비를 하였다.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이때 교환된 비밀각서에 따라 구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었다. 양진여는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1907년 10월 3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부대를 조직, 광주 담양 창평 일대를 근거지로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양진여 의병부대는 단독으로, 혹은 전해산 강판열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으로 일제 군경에 맞섰다. 1908년 10월 23일에는 단독으로 담양에서 일본군 기병 2명을 기습 공격하고, 10월 26일에는 나까코지(中小路) 군조가 인솔하는 일본군 헌병과 순사로 편성된 이른바 폭도(의병)토벌대를 광주군 송정읍 신촌리에서 치열한 교전 끝에 물리치기도 하였다. 1908년 11월 25일, 일본군 야마다(山田) 소위가 이끄는 토벌대가 담양 추월산에 머물고 있는 양진여 의병부대를 공격해 왔다. 이에 양진여 의병부대는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감투정신으로 적을 공격하여 많은 전과도 올렸지만, 끝내 화력의 열세를 극복치 못하고 아군 15명이 전사하였다. 1909년 2월, 양진여는 새로 구성된 연합 의진에 총대장으로 추대되었지만 지병과 부상으로 원활한 활동은 하지 못하였다. 그해 3월 이후에는 양진여 의병부대는 사실상 와해된 채, 부대원 일부는 아들 양상기 의병부대에, 다른 일부는 새로운 독립부대로 활동하였다. 1909년 8월 25일, 양진여 의병장은 일제 토벌대를 피해 장성군 갑향면 향정리에서 은둔하며 부상을 치료 중, 일제 정찰대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09년 12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불복, 공소하였으나 대구공소원에서도 교수형을 받았다.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지만 1910년 4월 13일 기각됨에 따라 교수형이 확정, 그해 5월 30일 대구형무소에서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순국 당시 다음의 말씀을 남겼다고 한다. “내 한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이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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