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 해서 '회현동'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반 년 정도 딱 한 번 아파트에 산 적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얼마 전 설 때 우연히 그곳에 들렀다. 1970년대 지어진 아파트가 고스란히 그 자리에 있었다. 78년에 지어졌으니 올해로 정확히 서른 해. 무척 반가웠다.
그 당시 아파트는 아주 신기한 물건이었다. 당시 아파트 중간엔 쓰레기 통로가 있어서 집에서 바로 쓰레기를 버릴 수 있었다. 1층이든 10층이든 통로에 쓰레기를 버리기만 하면 끝이었다.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내게 아파트 계단은 공포였다. 벽으로 둘러싸인 계단을 타고 위층에 갈 때면 감옥에라도 갇힌 기분이었다. 게다가 막힌 통로를 따라 크게 들리는 신발 소리 또한 무서웠다.
어머니 또한 "답답하다"며 아파트를 탐탁치 않아 하셨다. 그러던 차에 전학하면서 자연스레 아파트를 떠났다.
서울에서 그 시절 생각이 나게 한 아파트가 남산 기슭에 있는 회현 제2시범아파트다. 원래 시민아파트였는데, 1970년 4월 8일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33명이 죽자, 당시 서울시장이 회현 제2시민아파트를 가리키며 "이 아파트를 시범삼아 튼튼하게 지어라"라고 해서 시범아파트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회현 제2시범아파트는 1969년 준공한 금화시민아파트를 시작으로 3년 동안 서울 시내에 지어진 434동 시민아파트 중 하나다. 지금은 대부분 시민아파트가 철거되고 금화시민아파트와 회현 제2시범아파트만 건물이 남아 있다.
서울시 중구 남산 자락에 있는 회현동은 어진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모일 '회' 어질 '현') 세종대 주문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조말생, 세조 중종조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을 비롯해 조광조, 이황 등과 함께 5현(五賢)의 한 사람인 정여창, 인조의 장인인 한준겸,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인 강세황 등이 회현동 사람이다. 특히 정광필 집안은 회현동에서만 12명의 정승을 배출할 정도로 회현동 인맥은 화려하다.
지금 우리은행 본점 주변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수령이 500년 가량 된다.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서울 육백년사'에 보면 '회현동 은행나무'에 얽힌 재미있는 설화가 한 편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서울로 쳐들어 왔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일본군의 소서행장(小西行長) 부대는 서울의 동대문으로 쳐들어오고 가등청정(加藤淸正) 부대는 그 이튿날 남대문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이보다 먼저 우리나라 군사의 척후는 일본군의 형편을 지금의 서울 회현동 2가 36번지 집 뒤 뜰에 있는 큰 은행나무에 올라가서 정찰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입성하자 이 은행나무를 도끼로 베어 버리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도끼를 가지고 그 나무 밑둥을 깊이 찍기 시작하자 이상하게도 그 찍힌 곳에서 시퍼런 핏물이 솟아오르기 시작하므로 일본군은 두려운 생각이 들어 그 나무 베는 것을 중지하였다고 한다."설화에 나오는 은행나무가 우리은행 본점에 있는 은행나무는 아닌 듯하다. 우리은행 본점 주소는 회현동 1가 14-3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노닐던 마을 회현동을 찾았다.
1평 미만 쪽방촌과 영세업체 많은 동네
2007년 일부 포털 사이트 검색어 순위에 '회현동'이 1위에 올랐다. 회현동 여관골목을 다룬 기사가 나왔기 때문이다. 여관골목에서 매춘을 한다는 내용이어서 네티즌들의 눈길을 끌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노닐던 곳이었지만 근대화 이후 회현동의 역사는 다르다. 회현동은 주거지인 동시에
'초저녁이면 인력거꾼에 끌린 흰 얼굴의 게이샤들이 머리의 향내를 내뿜으며 언덕을 올라가던' 경성 제일의 화류였다.(<강홍빈의 도시문화탐사>)
이상의 소설 <날개>에도 미쓰비시 백화점에서 본 매음굴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동네가 회현동과 묵정동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미쓰비시 백화점 자리가 지금 신세계백화점으로 백화점과 회현동은 붙어 있다.
경제개발기 이후에는 여관골목을 통해 그 명맥을 이어갔다. 그렇게 된 것이 회현동 잘못은 아니었다. 어느 도시에나 욕망을 내뱉을 공간은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그 공간은 기이하게도 돈과 사람이 모이는 지역 주변부였다.
회현동은 경제성장기 대한민국 경제를 대표한 남대문시장이 있는 곳이다. 일제시대에는 상업중심지였던 충무로와 명동이 인근에 있다. 몸 안에 독이 쌓이면 자연스레 종기가 나듯이 회현동은 그런 역할을 했다.
인근 소공동이 재개발되면서 밀려난 중국상인들도 회현동에 둥지를 틀었다. 남대문시장에 물건을 대기 위한 가내 하청업소들도 회현동에 자리를 잡았다.
회현동은 전국에서 사장님이 가장 많은 동네이기도 하다. 2000년 회현동의 사업체 수는 1만1144개로 서울 종로 1-4동, 광희동에 이어 세 번째. 1997년 조사에선 1만1464개로 전국에서 사업체가 가장 많았다.
회현동은 서울 시내에서 큰 쪽방촌 중 하나이기도 하다. 쪽방이란 0.6평-1평의 작은 방으로 남대문시장과 충무로 일대 일꾼들이 주로 회현동 쪽방촌 이용자다.
1999년 조사에서(서울시의회 이해식 의원) 서울시내 전체 쪽방 수는 4662개. 그 중 중구 회현동은 1745개로 전체의 37.4%를 차지했다.
지난해 6월 11일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이 통계청의 '2005년 인구 주택 총조사 자료'를 토대로 한 분석에 따르면 쪽방, 여인숙, 고시원 등에 사는 사람 비율이 회현동은 30%(803가구)로 명동 42%(488가구)에 이어 전국 2위를 기록했다.
1970년 지은 회현시범아파트, 철거될 날 기다리고 있어
회현 지하철역에서 남산방향으로 나오면 명동의 번화함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눈길을 끈다. LP와 CD를 다량 보유하고 있는 '리빙사'. 1968년 생긴 곳이다.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할 것 같은 '회현문구'. 임시건물인 '우리약국' 등.
여기서 산길을 따라 걷다보면 114번지에 아주 오래된 집이 보인다. 한 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다. 건축된 지 75년이 넘은 이 오래된 집은 'E급 재난 위험시설'로 지정돼 있다. 일제시대 회현동엔 많은 일본인들이 살았고, 해방 뒤엔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인이 남긴 적산가옥(敵産家屋)에 살았다.
회현동 사무소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회현 제2시범아파트가 나온다. 영화 <주먹이 운다>와 <친절한 금자씨>, 최근 개봉한 <추격자>를 여기에서 촬영했다.
1970년에 지은 아파트는 실평수가 11.6평에 불과하지만 방이 세 개나 된다. 18평도 좁다고 하는 요즘이지만 당시 회현 제2시범아파트는 최신 건물이었다.
국내 최초 중앙난방식 아파트에 화장실은 수세식이었다. 비록 승강기는 없지만 건물 중간에 다리를 놓아 1층을 거치지 않고 5층부터 바로 걸어올라갈 수 있게 해놓았다.
이 아파트도 이제 사라질 날이 멀지 않았다. 이미 재건축 공고는 떨어진 상태다. 하지만 재건축을 둘러싼 주민과 서울시 간 갈등이 마무리되지 않았다. 아파트 입구에 내걸린 숱한 플래카드가 그 갈등을 잘 보여준다.
"서울시장 오세훈은 우선배정 약속을 지켜라.""주택기획과는 다른 지역 시민아파트 정리와 동일한 보상하라.""형평성 어긋나지 않게 최선을 다하라."
오래된 건물엔 그 시대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파트 통로를 걷다 보면 '새마을을 만들자'고 독려하던 그 시대 문화가 느껴진다. 통로 계단마다 빠짐없이 '착한 어린이는 휴지도 안 버립니다'라고 적혀 있다.
아파트는 기숙사처럼 개폐 시간이 있다. 개문시간은 새벽 4시 30분, 폐문시간은 오후 12시 30분이다.
아파트는 남산 일대 철거민들을 위해 지어졌지만 최신식 아파트라는 점 때문에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 인기였다. 중앙정보부와 KBS 직원, 연예인들이 많이 살았다. 당시 중앙정보부와 KBS가 남산에 있던 시절이었다.
허나 영원히 새로운 게 어디 있을까. 1978년 석유파동이 일어나면서 아파트의 비싼 중앙난방비는 주민들에게 오히려 부담이 됐다. 게다가 여의도 등에 더 좋은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시범아파트는 서민아파트로 성격이 바뀌었다.
지금 시범아파트는 사라지는 풍경을 담으려는 '디카족'들과 재개발 이익을 노리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지금은 사라진 남산식물원, 3000원 들고 찾았던 가난한 놀이터
회현 제2시범아파트에서 남산 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이 나오는데, 그 뒤 광장에 남산식물원과 동물원이 있었다.
싼 입장료와 한적한 풍경이 좋아 종종 찾았다. '남산공원 소동물원'엔 스물 여덟 종류 동물이 있었다. 너구리, 토끼, 다람쥐원숭이, 십자매, 오골계, 검독수리, 수리부엉이, 인도공작 등 거의 어느 동물원에나 있을 법한 동물들이었다.
1968년 12월 23일 문을 연 남산식물원에 있는 식물 종은 1100종 1만2000여본. 1관부터 4관까지 있어 제법 규모가 컸다. 입장료는 단 500원.
인근 매점에서 컵라면 하나 사먹으면 지하철 왕복 차비까지 포함해서 단 돈 3000원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놀이터였다.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연간 이용자 수가 30만 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2000년대 들어선 인기가 뚝 떨어졌다.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놀이동산이나 도심 번화가와 남산공원이 경쟁이 될 턱이 없었다.
남산식물원과 동물원을 찾는 사람들 발길이 드물어진 가운데, 두 곳 다 2006년 10월 1일 폐쇄됐다.
재래시장 즐거움 느낄 수 있는 남대문시장
회현동을 구경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남대문시장이다. 서울 구경을 부탁받을 때 빼놓지 않고 데려가는 곳이 회현동 남산길과 남대문시장이다. 남대문시장 법정동은 남창동이다. 조선 선조대 설치된 선혜청 창고가 있던 남쪽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남창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이 회현동이다.
남대문시장 길 이름은 '상정승길'이다. 대대로 정승이 나온 동네라는 자부심이 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얼마 전 골목여행 동행자인 정래와 함께 찾았을 때 1번 출구에서 숭례문을 찍었다. 당시엔 그게 마지막 사진이 되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1번 출구에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갈치골목을 볼 수 있다. 저녁 끼니는 거의 이 곳에서 때웠다. 골방분위기가 좋았고, 맛도 좋았다. 언젠가 중국손님 세 명을 데리고 간 적이 있는데, 모두 대만족이었다.
남대문시장의 역사는 조선조 태종 14년(1414) 임대시전에서 시작했으니 역사가 600년 가까이 된다. 영조 16년(1740)에 오늘날 점포기능을 갖춘 시전이 늘면서 지금처럼 유통시장의 모습을 띠게 된다. 1964년 10월 13일 서울남대문주식회사가 세워졌다.
남대문시장이 유명하다곤 하지만 재래시장의 어려움을 이곳도 겪고 있다. 올해 초 설을 며칠 앞두고 찾았을 때도 시장은 생각만큼 붐비지 않았다. <동아일보>(1월 30일자)는 남대문시장과 신세계백화점 탐방기를 쓰면서 양쪽을 '겨울과 봄'이라고 표현했다. 기사에선 인근 신세계백화점은 매출이 늘고 있는데, 남대문시장은 제자리걸음이라고 적었다.
숭례문이 불타고 난 뒤 남대문시장 상인들의 시름은 더 깊어졌을 것이다. 조만간 술안주를 사러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목포의 눈물' 이난영이 생을 마감한 곳
자전거를 타고 서울에서 목포까지 갔을 때 유달산에서 '목포의 눈물' 노래비를 봤다. '목포의 눈물'이라는 불멸의 히트곡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동상이었다.
1935년 10월 19세 때 취입한 '목포의 눈물'로 이난영은 지금 원더걸스를 뛰어넘는 인기를 얻는다. 당시 레코드 판매고가 수만장에 이르렀다니 초대박이었다.
이난영이 줄곧 살다가 생을 마감한 곳이 서울 중구 회현동이다.
이난영의 생은 파란만장했다.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바로 취직해야 할 정도로 집은 가난했다. 노래가 잇달아 히트하고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해 행복을 얻는 듯했지만 한국전쟁 때 남편 김해송이 납북되면서 다시 불행이 시작됐다.
7남매를 홀로 키우면서 김시스터즈를 창설해 재기했다. 당대 최고 가수 중 한명이었던 남인수와 동거하기도 했다. 남인수 또한 1962년에 41세 나이로 요절했다. 이난영은 1965년 4월 49세 나이로 회현동 빈집에서 죽었다고 알려진다.
회현동을 이야기하면서 쓸쓸한 기억만 끄집어낸 듯하다. 하지만 회현동은 큰 변화를 앞두고 있다. 회현동 입구 우리은행 본점이 대규모 공사 중이고, 인근 구역도 재개발지구로 지정돼 한창 공사 중이다. 양반 동네가 서민 동네로 바뀐 것처럼 명동을 뛰어넘는 상업중심지가 될지는 또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