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왜 이 곳인가. 도시 생활을 뒤로 한 채, 개별 가정의 단독 생활이 아닌 공동체의 삶을 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전북 부안 변산공동체에 도착한 15일뿐만 아니라 도착하고 나서도 한동안 해결되지 않은 물음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16일 윤구병 선생과의 인터뷰에서 들은 생체 에너지, 자급자족의 생활 등에 대한 이야기도 나에겐 뜬구름만 잡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그 이유를 다짜고짜 물어보기는 힘들었다. 내게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공동체의 삶이 일상인 그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물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도시에서 사는 나를 이 곳 사람들이 배척할지 모른다는 편견도 나를 주저하게 했다.
변산에 도착한 지 사흘째인 17일, 조금씩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면서부터였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일을 하면서 우리는 소통을 물꼬를 틀 수 있었다.
지난해 가을 이곳에 들어온 김영재(28), 김영찬(25)씨. 형제인 이들은 3월에 문을 열 예정인 대안학교의 예비교사다. 이들은 요즘 대안학교의 기숙사가 될 건물을 짓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17일, 하루종일 두 형제와 황토벽돌 찍는 작업을 함께 하며 그들의 사연도 들을 수 있었다.
영재·영찬씨 둘 모두 부천 서울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렇게 보여요?"라는 영찬씨의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차림새는 깔끔한 신학대생보다는 전형적인 농부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목사가 되려던 꿈을 버리고 이곳에 들어온 이유가 궁금해졌다. 묵묵히 일을 하던 영찬씨의 긴 이야기가 시작됐다.
"아버지가 목사여서 어렸을 때부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어요. 그래서 목사가 되려고 했죠."
신학교에 들어간 그들이지만, 곧 교회와 기독교에 염증을 느꼈다고 한다. 그 즈음인 2005년 영찬씨는 우연히 윤구병 선생의 <잡초는 없다>를 읽었다. 그리고 변산공동체에 막연한 동경을 갖게 됐다. 당시 그의 직업은 영어학원 강사였다.
"영어가 좋아서 영어강사까지 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 곳 시스템에 적응이 안 되고 그렇게 좋게 느껴지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미련없이 그만뒀습니다."
그 후 영찬씨는 변산 공동체를 떠올렸고, 먼저 들어온 형을 따라 3박 4일 동안 머물게 되었다. 그 때가 지금으로부터 3개월 전이다. 4일 동안 체험을 마친 영찬씨는 바로 자취집을 정리했다. 그리고 변산공동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목사인 아버지의 반대는 심했지만, 그의 꿈은 명확했다. 그리고 밝았다.
"농사일을 배우러 여기 온 거에요. 하지만, 농사꾼만 되려고 온 것은 아니죠. 저는 작곡하는 농사꾼, 기타 연주하는 농사꾼, 소설을 쓰는 농사꾼이 되고 싶어요."
첫번째 직업은 농사, 두번째 직업은 음악
영찬씨는 노래를 꽤 잘했다. 밥을 먹고 쉬는 시간이면 형과 함께 노래를 부르곤 했다. 노래 실력에 감탄한 내 생각에는 직업으로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나의 조심스런 질문에 그는 벽돌을 나르다 말고 씩씩한 목소리로 답했다.
"옛말에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일은 두 번째 직업으로 하라고 하잖아요. 저는 음악으로 먹고 살고 싶지 않아요. 일하는 시간을 줄여 취미로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최대한의 여가 시간을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농사라고 생각했어요. 최소한의 소비가 가능한 곳이 바로 여기 농촌이죠. 또 노동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여 하루 6시간만 일을 하면, 나머지 시간에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어요. 삭막한 도시보다 이 곳에서 창작력도 더 풍부해집니다."
허름한 차림새의 영찬씨였지만, 눈만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꿈을 훌륭한 방식으로 이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곧 열릴 대안학교에서 형과 영어·음악 선생님을 하면서 지낼 생각이에요. 지금은 그 때를 위해 학생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요. 지금처럼 손수 기숙사를 만드는 것도 그 준비 과정 중에 하나이고요."
여자친구가 있냐는 물음에, 둘 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여기서 결혼하고 분가해서 나간 집은 6~7채 정도 있어요. 하지만 농촌 총각이 결혼하기는 쉽지 않아요. 우리 무슨 종교라도 가입해야 하는 거 아니야 형?"
영찬씨의 말에 난 웃음을 터트렸다. 쉽지 않은 결정, 쉽지 않은 생활 속에서도 그는 이처럼 웃음을 잃지 않았다.
처음 변산공동체 구성원들에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벽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함께 노동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런 편견은 조금씩 사라졌다. 이들은 나와 특별히 다른 거창한 목적의식이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도시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각자의 목표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가는 것 뿐이었다.
변산 공동체에는 이들 말고도, 오는 3월 대안학교 입학을 기다리는 학생들이 있다. 이들은 다른 어른들과 마찬가지고 맡겨진 일을 한다. 그리고 함께 밥을 먹고, 마을 회의에 참석한다. 사실 나는 이들 학생들에게 "왜 이 곳에 왔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 가장 내밀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2박 3일이란 시간은 짧았다. 게다가 내게는 이들과 함께 일할 기회가 없었다.
박함선양은 얼마 전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분가하여 공동체 생활을 하는 고모 댁에서 함께 살았다.
"변산 공동체의 계절학기를 통해 애들을 알게 됐어요. 고모 댁이 하도 심심해서, 이 곳에 함께 살자고 아이들을 제가 꼬셨죠."
공동체 생활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심심한 것보다 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함선양은 시종일관 밝게 웃었다. 학교를 그만두는 힘든 일을 겪었지만, 이곳 생활은 그 기억을 잊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변산 근처에 사는 박아루양과 윤연상군도 또래 아이들이 없는 집보다 이 곳을 좋아했다. 박양은 "여긴 재미있는 일이 많아요, 저희 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거든요"라며 밝게 웃었다.
문득 영찬씨의 말이 생각났다. 영찬씨는 "학교 가기 싫은데 갈 데가 없어서 꾸역꾸역 다니는 아이들이 많다"며 "그 아이들이 여길 알게 되면 아마 많이들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가 싫은 아이들, 또래가 없는 산골에 사는 학생들에게 이 곳 변산공동체는 좋은 쉼터가 되어주는 듯했다.
17일 오후 영재·영찬씨와 일을 하다가 잠깐 쉬었던 적이 있다. 힘든 육체노동에 피곤했던 나는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았다. 어디선가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두 형제가 바닥 누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 땅이 끝나는 곳에서 뭉게구름이 되어
저 푸른 하늘 벗 삼아 훨훨 날아다니리라
이 하늘 끝까지 가는 날 맑은 빗물이 되어
가만히 이 땅에 내리면 어디라도 외로울까
이 땅의 끝에서 모두 다시 만나면
우리는 또다시 둥글게 뭉게구름 되리라
잠결에 그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나는 순간 편안해졌다. 한없이 평화롭고 자유로운 느낌도 들었다. 그 때 처음으로, 변산공동체로 내려온 두 형제가 부럽게 느껴졌다.
덧붙이는 글 | 김혜민 기자는 <오마이뉴스> 7기 대학생 인턴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