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교육현장성의 위기와 지성의 대응 - 대구경북과 간도를 중심으로'.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이름이다. 연구원들은 경북대학교 교육학과 소속이며 또한 '(사)지역문화연구 사람대사람' 소속이기도 하다.
조사연구지역이 대구경북과 간도지역이라, 그동안 중국 동북 3성을 몇 차례 다녀왔다. 간도연구는 일제시대 대구경북민들의 이주역사와 교육역사를 탐구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1차~3차 조사연구는 2007년에 진행되었고, 지난 1월27일~2월8일까지 4차 조사연구가 진행되었다. 나는 1차, 2차, 4차에 동참했다. 이 글에는 내가 참여한 조사연구에서 만난 조선족들의 이야기를 실으려 한다. 1차와 2차는 다녀온 지가 좀 돼 우선 최근에 다녀온 이야기부터 시작하려 한다. 이야기는 시간순서를 따르지 않고, 기억나는 순으로 적으려 한다.조사연구기간동안 많은 만남이 있었다. 주로 지역 노인분들과 연구자들이었다. 만남도 품이 많이 드는 노동이다. 품을 들이지 않고 메뚜기떼마냥 먹이만 먹어치우고 지나가겠다는 욕심을 버려야만 만남은 시작된다. 휩쓸고 지나가는 객에 불과한 나의 섣부른 판단보다는 그들 삶의 진정성을 믿는다. 도움을 주신 많은 조선족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 기자주지난 1월 27일 우리 "세길녀"들은 호기롭게 배낭을 울러매고 대구에서 김해공항으로 출발했다. "세 명의 길 떠나는 여자들"이라 이름짓고, 깔깔거리며 여자들끼리의 여행을 기꺼워했다.
그러나 김해공항은 우리를 막아섰다. 중국에 폭설이 내려 비행기가 출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하루는 부산의 어느 모텔에서 묵었다. 그리고 다음 날 드디어 중국 연길로 떠났다. 1월 28일 연길에 도착하여 2월 8일 돌아오는 날까지 우리들의 주요행선지는 '길림성 연길→용정→흑룡강성 목단강시→해림시→길림성 왕청→태양촌→연길'이었다.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2월 3일 길림성 왕청으로 내려왔다. 그 이야기부터 시작하려 한다.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기차를 타고 5시간을 달려내려와 길림성 왕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는 첫 걸음에 내 몸은 바싹 얼어버리는 듯했다. 연길에서 한창 북쪽인 목단강시에 도착했을 때, 한낮인데도 숨쉴 때마다 따라 나오는 입김에 그 추위를 실감했었다. 연길은 목단강시보다 한참 남쪽이었지만 겨울밤은 달랐다.
바람 한 줄기, 제 소리 내지 않는데, 어찌 그리 추운지. 동장군이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기차에서 발을 떼자마자 동장군은 기차에서 몰고 나오는 훈기를 휘리릭 에워싸버렸고, 바람 한 점 없이 에일 듯한 찬 기운에 종종 걸음을 친다. 다물어도 다물어도 턱은 털리고, 다리는 후들거린다.
왕청 어느 호텔에 들어섰다. 설 밑이라 호텔에서 식사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왜 식사를 하지 않냐는 따짐에 우리도 설을 쇠야할 게 아니냐고 당당하게 대답한다. 그래, 우리가 이방인이지. 다음 날, 체크아웃을 기다리는 동안 쇼파에서 우연히 누군가를 만났다. 행운의 여신이 그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그 분은 경기도에서 가구사업을 하다 중국으로 공장을 옮겨 일한 지 10년이 다 되었다고 한다. 태양촌에 있는 경상도 사람들을 만나러 왔다는 말에 그 분은 자기 일인냥 "설에 누구를 만날 수 있을려나" 걱정이다. 그러더니 공장노동자 중 조선족이 있는데, 그 분 어머니가 경상도에서 태양촌에 와서 좁쌀 한줌 배급받았다는 얘기를 한 걸 들은 적 있다고 한다.
가구공장 사장님은 "그 노동자의 살림이 어려우니 돈이 있거든, 인터뷰하고 쌀이라도 좀 사먹게 돈을 좀 주면 좋을 텐데"라고 혼잣말을 했다. 아무래도 모두가 들으라는 말인 듯하다. 그 노동자가 택시를 타고 호텔까지 달려왔다. 밥을 먹고 택시를 타고 그의 어머니가 있다는 집으로 향했다.
김남이라는 분이다. 그 분은 참 순하게도 생겼다. 약간 큰 키에 동글납짝하게 생긴 얼굴, 선한 눈을 씀벅인다. 집으로 들어서면서 "우리가 이래 살아요. 우리는 집도 없고, 그냥 세를 삽니다." 다 기울어질 듯한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루(거실이랄까)로 사용한다는 곳이 나왔는데, 벽에 솥이 걸린 부엌이다. 밑에서 불을 때면 밥도 짓고, 마루바닥도 뜨근해지는 온돌이다. 부엌과 방이 완전히 구분된 남한의 집과 달리, 바람이 많고 추위가 심한 북녘의 집은 대략 하나에 다 아우러진다. 따끈한 마루를 딛고 방으로 들어서려니, 할머니가 먼저 나와 귀여운 손주마냥 반긴다.
귀가 어둡다고 미리 얘기를 들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할머니와 바로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곧 포기했다. 우리들은 아들 말은 잘 알아듣는 할머니와 대화하기 위해 아들에게 묻고 대답을 할머니에게서 들어야 했다.
권옥선(82) 할머니는 13살 무렵에 집단이주를 했다고 한다. 낙동강가에서 살았다고 한다. 언니들도 있었고 동생들도 있었고…. 그러나 농사를 지으면 낙동강은 무심하게도 쓸어가버리고 쓸어가버리고, 가난을 이길 수가 없어서 부모님은 이주를 결심했다고 한다. 풍산에서 안동으로 걸어나갔다. 홑껍데기같은 옷을 입고 기차를 탔다. 기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사흘정도 걸려 중국땅인 도문에 도착했고, 거기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 천교령에 내렸다. 천교령, 한자로는 天橋領, 한자이름으로 보면 꽤나 높은 고갯마루가 있었나보다. 천고령에서 태양촌까지는 달구지를 타고 들어갔다고 한다. 1937년 2월. 추위가 뼈속까지 스며들어 어린 13살 계집아이는 허허벌판 태양촌에 도착했을 때 다리가 펴지지 않았다.
일본은 1936년과 1937년 집단강제이주를 실시했다. 1932년 만주국 설립, 1934년 만주제국 설립 이후, 일본은 '민족협화'의 명목으로 동북3성을 지배하였고, 1936년, 1937년 중일전쟁으로 군수물자 조달이 시급해지면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만주 집단이주를 실시하였다.
조선인들은 주로 산골짜기 물이 흐르는 곳으로 배치하였다. 물론 너른 들판은 대부분 한족의 땅이었고, 그 땅에 조선인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아무도 손 대지 않은 황폐한 산골짜기에 조선인들을 이주시킴으로써, 논을 개척하게도 하고, 산으로 숨어든 독립운동가, 공산주의자들을 감시하게도 하였다.
집단이주는 당연한 수순처럼 거짓말로 꼬이는 것에서 시작됐다. 옥수수가 얼마나 큰지, 지게 양쪽으로 척 걸쳐지고, 감자 하나가 지게에 얹혀지고, 보리밥 대신 이밥을 배불리 먹고 혹 이밥이 없다해도 옥수수는 배 터지도록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만주의 들판은 너르고 널러 땅끝이 안 보이는데, 그 땅의 주인마저도 없으니 가서 개척하는 놈이 임자라고 했다. 뻔한 거짓말인 듯해도, 정말 하루하루 밥 먹고 살기가 힘든 이들에게는 조선땅보다야 낫지 않겠나 하는 맘으로 기차에 몸을 실었다.
권옥선 할머니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도착한 태양촌은 산으로 둘러싸인 허허벌판. 아무 것도 없는 맨 땅에 우선 사람 몸 눕힐 움막부터 짓기 시작했다. 그 해 겨울은 움막을 짓느라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일본의 강제에 의해서 마을에 토성도 쌓았다. 공산주의자들이 마을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마을에 삥둘러 큰 싸리나무를 쌓았다.
집지을라네, 토성쌓을라네, 농사지을 터를 닦을라네 몸은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러나 배급은 좁쌀 한 줌씩. 주린 배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배급받은 감자는 농사용으로 사용했다. 그 해는 논농사란 있을 수가 없었다. 몇 해가 지나고 논을 만들고 논농사가 시작되었으나 분재소에 다 세금으로 내고 다시 빈털털이가 됐다.
어느 해, 정확히 몇 년도인지는 몰라도 단오 즈음에 사고가 일어났다. 토성에는 망을 보는 사람들을 세워 놨는데 그날 밤 총소리가 요란하게 탕탕 들렸다. 공산주의자들이 내려왔고, 망을 보던 동네주민 한 명은 저세상으로 갔다. 그들은 일본 분재소를 박살내고 먹을 것을 가지고 갔다.
토성쌓기는 일제의 정책이었다. 산골짜기 밑에 한두 채씩 있던 집들은 다 한 마을에 몰아넣었다. 이를 '귀툰(歸屯)'이라 불렀다. 마을에는 높은 담을 쌓아서 사람들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아침에 문을 열어주면 나가 농사짓고, 저녁이 되면 문을 닫았다. 몰래 도망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잡히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흩어져 있는 집들은 독립운동가들, 공산주의자들에게 보급투쟁의 장소였기 때문에 일본은 그 싹을 자르고자 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올 수 없도록, 또 다가와도 먹을 것이 없도록 만들어버리고자 하였다.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고 가난도 끝이 없었다. 이주를 오고 몇 해 뒤 마을에 학교가 생겼지만 학교근처도 가 볼 수 없었다. 언니랑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밭과 논을 갈았다. 그렇게 열 아홉이 되었다. 열아홉에 시집을 갔다. 그리고 이듬해 스물이 되던 해 해방을 맞았다. 남편도 역시 가난했다. 게다가 한국전쟁에 나갔다가 몸마저 성치못하게 돌아왔다.
스물 네살에는 가난하고 병든 그 남편마저도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남편의 죽음으로 다시 태양촌으로 돌아왔고, 스물 일곱이 되던 해 재가하여 천교령으로 갔다. 아들 셋이 있고, 딸이 있다. 아들 하나는 천교령에서 농사짓고, 둘째 아들은 연길에서 의사를 하고, 막내 아들은 이것저것 고치는 기술자로 먹고 산다. 막내 아들은 한국으로 돈 벌러 간 뒤 소식 끊긴 아내를 애타게 찾고 있다고 했지만, 우리가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늦가을 아침 햇발 두리둥둥추수도 씨껍질도 남먼저 했으니에헤라 탈곡 남먼저 서둘러가진 정성 다하여 공량의무 완성하자.공량은 미제를 처부수는 힘이니불타는 애국열정 공량으로 바치자."할머니는 정확히 언제 노래인지는 몰라도, 공량을 많이 바쳤냐는 물음에 이 노래를 불러 대답했다. "공량 많이 바쳐야했지. 노래까지 지어 불렀는데…." 일제시대인지 해방이후인지 헷갈렸으나, '미제'라는 단어도 그렇고, 태양촌에서 불렀다는 시기도 그렇고 해방 이후가 아닌가 짐작됐다. 태양촌에 들어가서 노인분들에게 확인하니, 그 노래는 해방이후 노래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