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 외국인'이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니. 누굴 지칭하는 말이던가. 한국계 외국인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적어도 한국계나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닌 외국인을 뜻하는 말과 동의어이다. 검은 머리 외국인? 그들을 저급하게 취급말라
이명박 특검은 어제(21일) 당선인의 의혹에 관한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검은 머리 외국인에게 이명박 당선인을 포함해 전 국민이 우롱당했다'라고 했다. 여기에서 검은 머리 외국인은 BBK 사기 사건의 핵심 중 한 사람인 김경준씨를 말하는 것일 테다. '검은 머리 외국인', 증권가에서 흘러다니던 말이 어느덧 정치권과 법조계까지 번졌다. 이번 일로 전국민의 관심사가 된 '검은 머리 외국인'은 한국인의 순수 혈통을 지녔든 절반이 섞였든, 교포 3세든 포괄적으로 대한민국 동포들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대한민국 동포의 수를 7백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해외 동포들에게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고까지 말이 나왔을 정도로 그들을 엄연한 대한민국 사람으로 대접하거나 인정해왔다. 한국계 미식 축구 선수인 하인즈 워드가 미식 축구 슈퍼볼대회에서 MVP에 뽑혔을 땐 미국보다 대한민국이 더 열광했다. 더불어 대한민국은 그의 성공 스토리를 한동안 우려먹었다. 이번 이명박 당선인의 대통령 취임식에까지 초대되었다니 그의 위상은 이명박 당선인도 인정해주는 듯 하다. 지난 해 여름, 미국을 뒤흔든 또 하나의 사건인 버지니아 공대 총격 사건을 일으킨 조승희에 대한 대한민국의 시선은 싸늘했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국적까지 대한민국인 그였지만 대한민국은 그가 조승희라는 이름을 쓰는 것조차 부끄러워했다. 당시 그는 대한민국에서 검은 머리 외국인 대접을 받았다. 국위선양? "와아!", 총기난사? "그런 사람 몰라!"... 선택 취사하는 대한민국 극명하게 갈리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이중성.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닌 탓에 그 문제가 크다. 먼 나라에서 국위를 선양하면 호들갑을 떨며 칭찬 일색이고, 국위를 깎아내리는 사람은 동포 대접은 언감생심이이고 인간 취급도 안 한다. 에리카 김, 한국명 김미혜다. BBK사기 사건으로 오명의 이름의 되었지만 그녀도 한 때는 한국인 대접을 극진하게 받았다. 그녀는 1995년 10월 <나는 언제나 한국인>이라는 자서전을 펴내고 서울의 힐튼호텔에서 출판기념회까지 성대하게 치렀다. 당시 언론은 서른 초반인 미모의 미국 변호사인 그녀를 추켜세우느라 바빴다. 출판기념회 자리엔 당시 민자당 전국구 의원이던 이명박 당선인이 참석해 그녀와 함께 축하 케이크를 잘랐다. 그때만 해도 이명박 당선인과 김미혜씨와의 관계는 좋았다. 에리카 김의 소개로 알게된 그녀의 동생인 김경준. 그도 이명박 당선인으로부터 상당한 능력을 인정받았던 한국인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2008년 BBK 사건으로 에리카 김이나 김경준은 한국인 대접을 받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그들 오누이를 '검은 머리 외국인'으로 칭했다. 이제 그들은 더이상 한국인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냉정한 관계를 내포하고 있으며, 때로는 냉혹한 현실이 숨겨져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끝나야 한다. 그런데 그 일이 국가적으로 자행되고 있다. 증권가에서 떠도는 은어가 정치권으로 이어지더니 심지어는 특별검사의 입에서까지 나왔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그런 혐의가 있는 한국 동포들은 이제 한국인이 아니라 '검의 머리 외국인'으로 사회적 정의를 넘어 국가적 정의가 내려졌다. 무서운 일이다. 언론이 만들어내는 폭력보다 더 큰 폭력이고 더 큰 비겁이다. 모국을 잃은 사람들, 7백만 해외 동포들 "우리가 외국인이냐!" 대한민국은 잘못된 길을 가는 자식을 품어주듯 그들을 품으려 하는 모성애나 부성애조차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모국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7백만 동포들에겐 충격일 수 밖에 없는 사건이다. 국가가 나서서 관계를 끊자고 선언하는 상황에서 해외에 있는 수많은 '검은 머리 외국인'들은 모국을 잃었다. 25일 출발하는 이명박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으로 내정된 남주홍 내정자 자녀들의 이중국적이 문제가 있다고 한다. 자녀 중엔 시민권자도 있고 영주권자도 있단다. 그렇다면 그들도 이제부터는 '검은 머리 외국인'이다. 비단 이런 문제가 남주홍 내정만의 일일까. 그건 아니다. 대한민국을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혹은 그들의 자녀들이 '검은 머리 외국인'의 범주에 들어간다. 이러한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은 대한민국 사회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 문제를 풀 길이 보이지 않는다. 어제의 일로 인해 해외에 사는 '검은 머리 외국인'들이 모국을 향해 섭섭하다는 말도 하고 항의도 한다고 한다.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유행어치고는 그 정도가 지나치다. 해외에 사는 그들에겐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는 말이 뼛속까지 그 아픔이 전해지는 언어 폭력이요, 국가 폭력과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은 해외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를 해야 한다. 그들과의 관계를 그렇게 설정해서는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없으며, 국익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숙하지 못한 몇몇 사람들의 언어 폭력으로 치부하기엔 그 파장이 너무 크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대한민국. 우물 안에서 하던 통속적인 짓거리 아니던가. 그런 일을 버릇처럼 하며 살았다고 해도 우물 밖을 향해서는 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입에 든 쓴 것들을 뱉었다. 뱉은 우리의 동포를 다시 품어야 할 자들은 누구여야 하는가. 대한민국인가. 아니면 철없는 몇몇 사람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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