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브레곤(Obregon)을 출발해 나바호아(Navojoa)로 가는 길. 여행의 완성도는 식도락에서 가늠되는 것이라는 게 언제부턴가 여행 철학으로 바뀌고 있었다. 가는 중에 늦은 아침 식사를 위해 차량을 개조해 만든 야외 타코집에 들렀다.
구수한 고기 냄새에 지친 몸도 언제 그랬냐는 듯 불끈 활력을 되찾는다. 멕시코에 들어와 한 가지 버릇이 생겼는데 그것은 가격을 흥정하거나 계산할 때 반드시 손가락으로 확인한 다음 거래를 하는 것이다. 처음에 언어가 통하지 않고 발음상의 어려움 때문에 시작한 것이 이젠 아예 몸에 밴 것이다.
"타코 얼마예요?"
"오초(8) 페소."
다시금 왼쪽 손가락을 다 펴고 오른쪽 손가락 세 개를 펴 8페소가 맞냐며 거듭 확인했다.
"Si(그래)!"
흰자위가 넘칠 만큼 동그라니 부릅뜬 눈을 치켜들던 주인은 마치 자신을 의심하기라도 하냐는 듯 당연함에 대한 역설을 보여주었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난 자리를 잡고 일단 타코 4개를 시켰다.
이 타코 가게는 부부와 아들, 이렇게 세 명의 가족이 운영하고 있었다. 가족이라서 그런지 함께 일하는 모습에서 더욱 훈훈한 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윽고 주문했던 타코가 나왔고 배가 고팠던 나는 맛을 음미하는 과정을 생략할 만큼 재빨리 음식들을 뱃속으로 밀어 넣었다.
야외에서 먹는 타코는 어느 포장마차로 가는가에 따라 성패가 갈리는데 특히 고기와 토르티야를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고기에 비계가 많이 섞여 질기거나 토르티야가 찰지지 못하고 퍽퍽한 경우 그 맛이 절대적으로 손상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소스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 또 딸려 나오는 다른 부대양념은 없는지도 맛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가 될 수 있다.
내가 간 곳은 아쉽게도 조금 더 지불을 하더라도 양질의 서비스라곤 기대할 수 없는 노점이었다. 작은 토르티야 크기, 소스라곤 살사 소스 달랑 하나, 그리고 부대양념은 오로지 양파 뿐. 이것으로 풍부한 미각을 알싸하게 자극해 목을 넘긴다는 건 쉽지 않았지만 시장이 반찬이었기에 어쨌든 맛있게 먹고 계산하기 위해 주인을 불렀다.
계산하려는데 큰 돈 밖에 없어 가방에서 꺼낸 200페소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그런데 초라한 행색의 나그네로부터 예상치 못한 큰 돈을 받아서였을까? 주인과 아들이 잔돈을 찾다 말고 차 뒤로 가더니 뭐라고 웅성대는 것이었다.
그냥 넘어가야 될 부분에서의 지체라면 뭔가 예감이 좋지 않다. 하나의 불분명한 사건이 개입된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일단 그 자리에서 바로 거스름돈을 주지 않았다. 잔돈이 없었는지 옆에 상인과 화폐를 교환한 다음 꾸역꾸역 주머니를 뒤져 있는 잔돈을 끌어 모아 거슬러줬다.
'잔돈은 항상 그 자리에서 확인하라!' 당연한 얘기다. 언제 어디에서 허술한 여행자의 빈틈을 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계산대로라면 32페소어치 먹었으니 168페소를 거슬러줘야 하는데 내 손에 쥐어진 돈은 152페소. 원래 가격과 16페소나 차이가 났다.
"이게 뭐죠? 잘못 거슬러 준 것 같은데요?"
하지만 주인은 아무 이상 없다는 듯이 잔돈을 보더니 되레 내게 큰소리였다.
"정확한데 뭘? 하나에 12페소니 4개면 48페소. 여기 보라구!"
주인은 친절한 악의로 잔돈을 하나하나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확인시켜 주었다.
"152페소 맞잖아. 무슨 문제야?"
그리고는 바닥의 돈을 검지 손가락으로 힘있게 가리키며 내게 상황을 주지시켰다. 타코 하나에 12페소란다. 갑자기 말을 바꾼 것이다. 슬쩍 좋지 않은 예감이 들긴 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당황했다.
8페소라고 해 놓고서 이제 와서 왜 말을 바꾸냐고 흥분해가며 침을 튀기니 별반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한 번에 고개를 젓더니 무조건 12페소라고 우기며 버티는 게 쇠심줄이다. 혹시라도 불필요한 오해나 억측을 피하기 위해 손가락까지 사용했는데도 말이다. 내가 손가락 8개를 펴 보이며 물어볼 땐 당연하다는 듯이 '씨(Si)' 하더니 이제 와서 아니라고 딱 잡아떼는 변고라.
아예 설명이나 논쟁조차 하지 않을 분위기다. 주위에 사람들 몇 명이 있었지만 그들도 장사꾼인지라 강 건너 불구경이었고 게다가 낯선 나를 옹호해 줄 분위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바로 전날 밤 타코 전문점을 갔을 때도 좋은 재료와 양념을 쓴 타코를 10페소에 먹었는데 양념도 달랑 살사소스 하나에 양파만 주어놓고선 무려 12페소를 받다니.
이걸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수업료라 생각하고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기로 했다. 논쟁은 또다른 불행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접은 것이다. 대신 나는 확실히 잘못됐다는 표시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를 떴다.
며칠 후. 따가운 햇살에 몸도 피할 겸 식사 차 이번엔 포장마차풍의 멕시칸 식당에 들어갔다. 말이 식당이지 탁자 두 개만 갔다놓은 허름한 공간이었다. 건조한 도로 위에 다 고만고만한 식당들이어서 아무 곳이나 한 곳에 들어가 주인이 추천하는 해물 음식을 주문했다. 튀긴 토르티야 위에 새우와 야채, 치즈를 넣어 만든 새우 토스타다(Shrimp tostada)였다.
맛은 환상적이었다. 타코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차원의 맛을 접했다. 야들야들한 치즈와 달짝지근 씹히는 새우, 신선한 야채가 어우러진 틈 사이로 스며든 살사와 칠레 소스의 완벽한 맛의 하모니. 여기서 레몬 세 방울 뿌려주는 센스는 잊지 않아야 한다. 물렁물렁한 토르티야 대신 고소하게 튀겨 낸 토스타다의 맛에 입꼬리가 한껏 치켜 올라갔다. 새로운 맛에 대한 발견은 여행을 늘 흥분시키는 법.
기분 좋게 토스타다 3개와 음료수 1병을 먹고 여전히 아쉬워 입맛을 다시면서 계산을 하려고 했다. 음료수가 6페소에 그 맛난 토스타다 역시 8페소였으니 50페소 지폐를 건넨 내가 받아야 할 거스름돈은 20페소가 아마도 정확할 것이다. '아마도'가 붙은 건 확실한 것도 우기면 불확실한 것으로 변질되는 멕시코 특유의 윽박지름에 대한 불안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 그 심히 불쾌했던 난센스한 사건이 또 벌어졌다. 도대체 아무래도 홀수 거스름돈이 나올 수 없는 상황에 내게 10페소짜리 동전과 2페소짜리 동전 3개, 그리고 1페소짜리 동전 하나가 손 위로 떨어졌다. 이유 없이 3페소가 증발해 버린 셈이다.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냐 싶어 재빨리 잘못된 부분에 대해 항의를 했고 주인 딸은 마치 깜빡 실수했다는 듯 너무도 태연하게 다시 잔돈을 거슬러줬다.
정말 웃긴 건 이미 50페소를 건넸을 때 분명 그녀는 내가 뻔히 보는 앞에서 엄마에게 물어 내가 무엇을 얼마나 먹었는지 다 파악하고 나서 준 것이라는 점이다. 혹시 내가 눈치 못 챌 요행을 바랐던 것일까. 모르고 떫은 감을 씹은 듯 씁쓸한 이 기분. 같은 장면도 한 번이면 실수지만 두 번이면 계획이다. 그런데 세 번이면 정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주의하라. 요금표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숙박시설에서는 가격을 물어볼 때와 체크인 하려고 할 때의 가격이 틀려진다. 분명 밖에 서성이며 고객을 유치하는 주인과 흥정하며 100페소가 확실함을 물어보고 호텔 안으로 들어가면 반갑게 손님을 맞이하며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려는 주인은 뻔뻔하게도 200페소로 인상된 가격을 부른다. 그리고는 '여기까지 들어와서 귀찮게 다시 나가려고?' 하는 얍삽한 표정으로 해맑게 웃는데 이를 어찌할꼬?(그럴때면 물론 나는 미련없이 뒤돌아선다)
관광지나 유적지 등을 가면 "헤이 아미고, 기브 미 원 달러 플리즈!"라며 그들이 말하기를 '여기에서만 파는 대단한 물건'을 가지고 살갑게 다가오는 상인들이 있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상품을 1달러라고 고래고래 소리쳐 놓고 막상 구입하려고 하면 말을 확 바꾸어 5달러로 부르는 식이다. 너무 잦은 속임수에 끝까지 가 봐야 그들의 진정성을 파악할 때가 적지 않다.
이 여행을 준비하면서 나는 소망했다. 누구든지 나를 만나는 것이 축복이고 행운이기를. 나 때문에 웃고 나와 함께 울고 나이기에 함께하는 시간들, 메일함을 열어 내 이름을 확인했을 때 잔잔한 파고가 심장에서 울려대며 지난 추억에 행복해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그래서 언젠가 깊숙한 기억의 편린들을 다시 끄집어내었을 때 나란 녀석에 대해 한 번쯤 미소 지을 수 있기를. 다시 만날 때를 기약하며 일상에 설렘을 껴안아 줄 수 있는 인연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자꾸 서글퍼지는 건 바로 그러한 인생으로 가는 길에 자꾸 넘어지는 나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힘들어도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이며 웃어야 했는데, 내가 더 손해보는 인생의 멋을 지녀야 했는데, 결국 이 모든 것이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했던 것인데. 그러니까 한 번 쯤은 웃으면서 타코를 만든 노고의 손길을 슬쩍 눈 감으며 위로해 줬어야 했는데. 난 나를 위한 계산적인 것에만 몰두한 채 서로가 불완전한 인격체이기에 나올 수 밖에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협화음을 경멸하고 있었던 것이다. 판단 전에 이해가 있고, 공의 위에 사랑이 있어야 하거늘.
여행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신념은 고집으로 변해가고 타협은 평화적인 협상으로 둔갑해 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걸 다 알고 있는데도 이렇게 나는 찡그리기만 한다. 누군가의 실수든 잘못이든 그것을 관용하지 못한 속 좁은 마음. 불평과 불만을 통해 내 인생의 주도권을 그저 감정에 이끌려 세상에게 내어 준 여전히 철없는 어른. 고단한 광야의 여정에 지친 걸까.
나는 그렇다. 눈이 마주치고 손이 건네지고 대화를 하는 거리는 한 발짝이지만 마음의 거리가 한 뼘 사이일 때 비로소 친구가 될 거라고 믿는다. 너무 붙어있으면서 구속하지도 또 너무 떨어져 있어 무관심하지도 않은 마음으로 닿은 한 뼘의 거리. 그런데 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실은 한 뼘 사이의 거리에서 마주한 기분 좋은 일들이 훨씬 많이 있다. 그것이 멕시코 여행을 절대 중단할 수 없는 매혹적인 이유이다. 이젠 그 얘기 한 번 시작해 볼까?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