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동포들 해외여행을 하다보면 곳곳에서 한국인을 만난다. 한국인이 살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을 만큼 세계 곳곳에는 우리 동포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2004년도 외교통상부 통계에 따르면 약 700만 명의 동포가 해외에 살고 있다고 한다. 나라 별로 보면 미국 215만 명, 중국 214만 명 일본 90만 명(귀화 재일동포 26만 포함)으로 이들 나라에 동포가 가장 많이 살고 있다. 과거에는 중국에 가장 많이 살았는데 최근에는 부쩍 늘어난 미국 이민 탓으로 이들 두 나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모양이다.
중국에 우리 동포가 많이 사는 것은 우리나라와 국경을 맞닿고 있는 점도 있지만, 주로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고자, 또는 삶의 터전을 일제에게 빼앗기고 먹고 살기 위해 괴나리봇짐을 이고 지고 압록강 두만강을 건넌 동포들 때문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제 강점기에 땅을 빼앗기고 먹고 살기 위해, 징용이나 학병 등으로 일본에 자의나 타의로 대한해협을 가서 해방 후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여태 살고 있는 동포들의 1세(대부분 돌아가셨음), 2~ 4세가 대부분이다. 나는 최근 10년 새 항일유적지 답사를 위해 중국을 세 차례 기행하면서 매우 재미있는 사실을 겪었다. 중국에 사는 우리 동포들이 아직도 자기 고향 사투리의 원형을 그대로 지니고 산다는 것이다. 나의 안내자였던 김중생씨는 일송 김동삼 선생의 손자로, 북만 흑룡강성 취원창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 고장은 북만주 항일 근거지로, 우리 동포 거주자 대부분이 안동을 중심으로 한 의성, 영양, 예천 등지의 사람들인데, 1세는 물론 2, 3세 동포들도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원형 그대로 쓰고 있었다. 그와는 달리 국경이 닿은 연길 일대의 동포들은 대부분 함경도 평안도 말씨였다. 그 지방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살기 때문이라고 했다. 언어뿐 아니라 풍습도 원형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이처럼 끈질긴 고국의 얼과 언어, 고향 문화에 대한 전수가 우리 민족이 반만년 동안 나라와 역사를 이어온 원동력이었다. 대동강에서 만난 문인들
2005년 7월 21일 남북작가회의 이틀째 날, 대동강 쑥섬에서 낯선 여섯 사람의 일행을 만났다. 내가 쑥섬 일대를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자 그분들이 소속을 물었다. 내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라고 하였더니, ‘아, 오마이뉴스!’라고 말하고는 명함을 주면서 자기들을 소개하였다. 당신들은 재일본 조선문학예술가동맹 중앙위원들이라고 했다. 그때의 인연으로 그분들이 우리말로 펴내는 시동인지 계간 <종소리>를 철마다 빠짐없이 내가 사는 강원 산골마을까지 보내주셨다. 매호마다 훑어보면 얄팍하면서도 초라한 이 시 동인지에 실린 시들은 한결같이 망향을 주제로 한,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조국 통일을 바라는 울부짖음들이었다. 재작년 일본 가는 길 도쿄에서 <종소리> 시인회 소속 김학렬 오홍심 두 시인을 만나 재일동포들의 한 많은 사연과 일본 땅에서 우리말과 얼을 지켜가는 어려움을 들은 바 있었다. 이분들은 아직도 일본땅에서 독립운동의 연장선인 양, 일본에 동화되지 않고 우리 것을 눈물겹게 지켜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분단의 완충 역할로 남북의 긴장완화, 평화 유지 및 평화 통일 중개자 역할도 충실히 담당하고 있었다. 사실 해외에서 동포를 만나면 그분들은 매우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이나 평화통일 운동에 이바지하고 있었다. 워싱턴에서 만난 한 동포(심재호 언론인)는 그 무서웠던 군사독재시절에도 북한 산하를 수십 차례 누비면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물꼬를 텄고,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한 원로 동포(선우학원 박사)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방북을 주선한 결과, 한반도 긴장 완화에 이바지하였을 뿐 아니라 뒷날 남북정상 회담의 기초도 닦았다. 이처럼 해외동포들은 나라 밖에서도 나라를 위해 크게 이바지하고 있었다. 해외동포는 우리나라가 세계로 나가는 길잡이들이요, 견인차들이다. 이들의 도움 없이는 나라의 평화도 번영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해외동포들의 역할이 매우 크다. 객들만 모인 슬픈 잔치 지난 22일, 한국문학평화포럼 이승철 사무국장으로부터 재일조선인 <종소리> 대표시선집 <치마저고리> 출판기념회가 출판문화협회 강당에서 열린다는 기별을 받고, 특별히 <종소리> 시인회 소속 시인 4인(정화수, 김학렬, 김두권, 오홍심)이 한국을 방문하여 참석한다는 소식에 만사 제치고 달려갔다. 서울로 가는 도중에 약속 장소가 변경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인사동 한 주점에 갔으나 시간이 지나도 주빈은 오지 않고, 객들만 모였다. 잠시 후 객들만 출판기념회를 가졌는데,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후 처음으로 책임편집을 맡았던 김응교 시인이 손전화로, 대한해협을 넘어 저자의 기념사를 생중계하는 걸 들었다. 이런 비극이 지구상 그 어느 나라에 있을까? 이어 사회를 보던 정용국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차장은 “일본에서 출국 전, 한 분이 한국에 가면 조사를 받을 것이라는 관계기관으로부터 통보를 받고, 일행 모두 출국을 단념한 모양”이라고 이번 일의 전말을 전하며 유감을 말했다. 그날 모인 객들은 새정부 출범에 맞춰 시계바늘이 거꾸로 돌아가는 세월에 쓴 소주잔을 나누며 시절을 한탄하다가 뿔뿔이 흩어졌다. 주점을 나오자 잔뜩 흐린 하늘이 마침내 비를 뿌렸다. 아마도 고국을 그리며 흘리는 바다를 건너지 못한 재일 시인들의 눈물이리라. 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길에 우산도 없이 비를 흠뻑 맞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종각에서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갓 나온 따끈따끈한 시집 <치마저고리>를 펼쳤다. 두어 편 시를 소개하는 걸로 그분들이 하고픈 말, 그리고 내가 하고픈 말을 대신한다. 한 땅 홍윤표(1932년 오사카 태생. 본적 제주도 구좌읍) 북만도 아니고 남만도 아니다 바라보는 땅은 찾는 땅에는 어느 산도 어느 강도 어디까지나 푸르게 서고 아롱지는 정서의 물결로 흐른다 전쟁이 있어 겨레 사이에 서로 죽이고 불태우고 산도 타고 강도 피 흘린 그 풍경 아무리 상상의 눈을 비비어도 미울 수 없는 추상화 같다 묻지 말아다오 남측이냐? 북측이냐?고 바다 밖에 떨어지게 된 이 운명 사나운 몸들은 언제나 이어진 한 땅의 편이다 분단이 있건 없건 타국의 뭍에서 바라보면 고국은 선히 하나로 나타나지 않고 반만으로는 떠오르지 않는다 나도 미쳤다 김학렬(1935년 교토 태생. 본적 경상남도 함안) 나도 미쳤다 6월의 그날 빛고을 광주 붉은 석양은 이미 승리의 깃발을 펼쳤다 로마군단에 이어 스페인함대를 접어 젖힌 그 찰나 세계4강에 뛰어오른 그 찰나 나도 미쳤다 함께 한 몸이 되어 발로 차고 머리로 받고 땅위를 날던 우리의 불마음 민족의 이글거리는 피 연장 사투 120분 끝내 천지를 뒤흔드는 환성이 터진 그 찰나 붉은 메아리 바람이 되어 누리에 치달려 간 그 찰나 선수도 겨레도 나도 우린 다 미쳤다 숨결이 뛰었다 더운 핏줄이 터졌다 마구 눈물이 솟구쳤다 우린 한없이 미치고 미쳤다 다 호랑이 되어 으르릉- 세계의 심장을 때렸다 (월드컵, 대 스페인전에서 이긴 날. 2002년 6월 22일) 비빔밥 오홍심(1941년 효고현 태생. 본적 제주도 서귀포) 흰 밥 위에 제자리를 지키는 듯이 들어있는 반찬들 살짝 데친 콩나물이며 청록색 시금치 그 곁에 깨소금무침 도라지 참기름 맛에 달콤한 간장맛 덧붙인 고사리 그래도 모자라선지 고소한 불고기와 입맛을 돋우는 새빨간 배추김치 자기 존재 과시하듯 들어앉았네 매콤달콤한 고추장 한술 듬뿍 떠 넣어 요리조리 비비니 침이 꿀꺽 넘어가네 따로따로 먹어도 맛이 있지만 온갖 반찬 비벼 먹는 비빔밥은 별맛이네 대대손손 전해 오는 우리만의 맛이라네 민족의 맛이라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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