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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의 부모 가진 건 변변찮지만 조건 없는 사랑으로 함께 정을 나누는 가족.
올가의 부모가진 건 변변찮지만 조건 없는 사랑으로 함께 정을 나누는 가족. ⓒ 문종성

이런 외딴 집에 아름다운 두 숙녀가 있다니! 

"잠자리는 괜찮았어요?"
"좋았어요."

어젯밤 밤바람을 맞으며 저 멀리 가로등만이 희미하게 빛나는 황량한 도로를 달리다 소노라(Sonora) 주와 시날로아(Sinaloa) 주의 경계에 세워진 단 한 채의 건물이 빈 공공장소인 줄 알고 텐트치러 들어갔었다. 그런데 뜻밖에 인기척이 들렸고 전후사정을 들은 맘씨 착한 가족들은 흔쾌히 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야말로 딱 주 경계선상에 놓인 집 한 채가 날 살린 것이다.

이불을 세 겹이나 뒤집어쓰고는 잠을 청했지만 집이 도로 한복판에 위치해 있는데다가 그나마 실내에까지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구조여서 추워도 너무 추워 도저히 못 견디고 일찌감치 잠에서 깼다. 그런데 집이 조용했다. 다들 벌써 출근을 마쳤나 싶었는데 사실은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것. 내가 일어난 후에 비로소 가족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차례로 일어났다.

아침을 토르띠야에 햄과 치즈를 얹고 고기를 볶은 퀘사디야로 먹었다. 그러고는 어젯밤 미처 인사 외에 얘기를 나누지 못한 두 자매와 함께 옥상에 올라가 따뜻한 아침햇살을 맞으며 차와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사실 꽤나 놀랐다. 이런 외딴 집에 건강하고 아름다운 두 숙녀가 있다는 게 말이다. 언니 올가(23·Olga)는 새침데기 풍의 조용한 스타일이지만 애교가 많았고, 동생 마리벨(17·Maribel)은 쾌활하고 시원한 성격이면서 붙임성도 좋았다.

올가(Olga) 헤어 디자이너를 꿈꾸는 요조숙녀
올가(Olga)헤어 디자이너를 꿈꾸는 요조숙녀 ⓒ 문종성

마리벨(Maribel) 비즈니스를 꿈꾸는 말괄량이 소녀.
마리벨(Maribel)비즈니스를 꿈꾸는 말괄량이 소녀. ⓒ 문종성

옥상에서 나눈 얘기는 특별할 것 없이 소소한 개인의 일상사들이었다. 치과 진료를 받는 올가의 작은 꿈은 헤어 디자이너가 되어 미용실을 차리는 것이고 대학을 포기한 마리벨의 꿈은 개인 비즈니스를 하며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비록 부유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이 상황을 불평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소박한 꿈을 위해 오늘 하루도 충실히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예쁜 두 자매를 손수 키우신 부모와 자식 간의 정은 유난히 돈독해 보였다. 조건 없이 사랑하는 모습, 이것이 가족의 참모습이겠지.

꼬르디따스의 맛에 입꼬리는 한껏 치켜 올라갔지만...

주 경계 소노라 주와 시날로아 주의 경계에서. 바로 뒷 편이 경계를 알리는 표지판이고 왼편에 유일한 건물인 올가의 집이 있다.
주 경계소노라 주와 시날로아 주의 경계에서. 바로 뒷 편이 경계를 알리는 표지판이고 왼편에 유일한 건물인 올가의 집이 있다. ⓒ 문종성
충분히 햇살을 쬐었다 싶어 올가네 가족들과 인사를 하고 로스모치스로 떠나는 길.

따가운 햇살에 몸도 피할 겸 식사 차 이번엔 포장마차풍의 멕시칸 식당에 들어갔다. 말이 식당이지 탁자 두 개만 갖다놓은 허름한 공간이었다.

건조한 도로 위에 다 고만고만한 식당들이어서 아무 곳이나 한 곳에 들어가 주인이 추천하는 새로운 음식을 주문했다.

토르띠야를 완전히 편 채로 그 위에 으깨삶은 콩을 바르고 닭고기를 얹은 다음 야채와 치즈로 마무리. 거기에 기호에 따라 칠레 소스와 살사 소스를 넣어 먹은 환상적인 맛, 꼬르디따스(Gorditas)였다.

야들야들한 치즈와 달짝지근 씹히는 닭고기, 신선한 야채가 어우러진 틈 사이로 스며든 살사와 칠레 소스의 완벽한 맛의 하모니. 여기서 레몬 세 방울 뿌려주는 센스는 잊지 않아야 한다. 살살 구워낸 토르띠야 위에 펼쳐진 꼬르디따스의 맛에 입꼬리가 한껏 치켜 올라갔다. 새로운 맛에 대한 발견은 여행을 늘 흥분시키는 법.

기분 좋게 꼬르디따스 3개와 음료수 1병을 먹고 여전히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면서 계산을 하려고 했다. 음료수가 6페소에 그 맛난 토스타다 역시 8페소였으니 50페소 지폐를 건넨 내가 받아야 할 거스름돈은 20페소가 아마도 정확할 것이다. '아마도'가 붙은 건 확실한 것도 우기면 불확실한 것으로 변질되는 멕시코 특유의 윽박지름에 대한 불안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도 8페소라고 분명 손가락까지 세며 확인한 타코를 12페소라고 우기는 망할 주인 때문에 기분 상한 적이 있었는데 심히 불쾌했던 넌센스한 사건이 또 벌어졌다. 도대체 아무래도 홀수 거스름 돈이 나올 수 없는 상황에 내게 10페소짜리 동전과 2페소짜리 동전 3개, 그리고 1페소짜리 동전 하나가 손 위로 떨어졌다. 이유 없이 3페소가 증발해 버린 셈이다.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냐 싶어 재빨리 잘못된 부분에 대해 항의를 했고 주인 딸은 마치 깜빡 실수했다는 듯 너무도 태연하게 다시 잔돈을 거슬러줬다. 혹시 내가 눈치 못 챌 요행을 바랐던 것일까. 모르고 떫은 감을 씹은 듯 씁쓸한 이 기분.

꼬르디따스 닭고기와 야채, 치즈가 어우러내는 환상적인 맛.
꼬르디따스닭고기와 야채, 치즈가 어우러내는 환상적인 맛. ⓒ 문종성

세계일주는 로망 아닌 리얼리티

큰 돈만 보면 어떻게든 구워 삶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지금까지 동양인인 나를 슬쩍 떠보면서 계산서에 중복 기재나 오버 차지를 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말이 서투르다는 걸 악용한 사례다. 며칠 사이에 연이어 두 번이나 계산 착오라니. 한 번 속은 것은 사기친 사람이 잘못이라지만 두 번 속인 것은 속는 사람 잘못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오후 늦게 로스모치스에 도착했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넘어가 금방 추위가 찾아왔다. 지난 번 '치와와-태평양 연안 철도'타고 마지막에 한 번 구경한 적이 있었기에 그리 낯설지는 않았지만 어느 새 내려온 밤은 또 달랐다. 당장 추위에 배고픔이 밀려왔다. 일단 숙소부터 정하고 뭐라도 먹을 참이었다. 하지만 멕시코 시티까지 버텨내야 할 노잣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곳곳에서 강도사건 후유증이 나타나는 것이다.

또 경찰서로 발길을 향했다. 강도 사건 이후로 최고의 친구가 되어 준 믿음직한 서민의 지팡이가 아니던가. 세계일주는 로망이 아니다. 리얼리티다. 하루 경비에 울고 웃고 때로는 자존심도 억누르고 세상 밑바닥까지 가보아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대신 언젠가는 초특급 휴양지에서 한없는 여유를 만끽할 날도 있을 거란 꿈을 버리지는 않고서. 어쨌든 지금은 서글픈 현실이다.

그런데 길을 가던 중 과속 방지턱을 넘다가 그만 페니어(자전거 짐가방)를 떨어뜨렸다. 떨어뜨린 건 괜찮은데 그걸 뒤따라오던 버스가 무심하게 밟고 지나가 버렸다. 오마이 갓! 놀라서 뛰어 가보니 다행히 끝부분만 사뿐히 짓이겨 놓고 갔다. 하지만 고리 부분이 부러져버렸다. 맙소사! 뒤 패니어의 고리 부분은 일반 플라스틱이 아닌 쇠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 새로 교체할 수가 없다.

이 패니어, 시카고에서 280불 거금을 주고 구입한 건데. 용접을 하든, 뭘 하든 쇠로 다시 만들어 이어붙여야 한다. 하지만 '괜·찮·다.' 그래도 오른쪽 패니어가 아닌 왼쪽이 떨어진 게 아닌가. 오른쪽이었다면 노트북이 든 쪽인데 그걸 버스가 밟고 지나갔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떨어져 버린 하나의 고리 때문에 기울어진 패니어를 뒷짐받이에 조심스레 걸친 채 경찰서를 찾아갔다.

과일노점 무엇을 먹어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에도 행복하다.
과일노점무엇을 먹어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에도 행복하다. ⓒ 문종성

그래도 난 '괜·찮·다'

길은 사람들에게 묻는 게 최선이다. 많이 물어보면 물어볼수록 지도보다 정확한 게 사람이다. 그런데 이 멕시코란 나라. 사람들이 친절하긴 한데 다들 엄한 곳으로 방향을 가르쳐주니 찾기가 쉽지 않다. 날씨도 더 추워졌다. 결국 인텔리들이 모여 있겠다 싶은 병원으로 가서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병원에서 친절하게 약도까지 첨부해줘 경찰서를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오른쪽으로 12블록, 앞으로 4블록, 다시 재차 오른쪽으로 3블록이면 경찰서가 나옵니다."

자전거로 20분 안이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려준 약도를 들고 찬바람을 쐬며 12블록을 지나 다시 턴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마침 교통 경찰들을 만났다. 사정을 얘기하니 "거기 경찰서는 문 닫았어. 로스모치스에서 가장 큰 경찰서를 가야 해"라며 다시 수정된 약도를 그려 주었다.

"다시 앞으로 10블록, 오른쪽으로 9블록 가야 해."

경찰서만 찾을 수 있다면 이 정도 고생쯤이야. 가다가 숙소 구하기도 전에 쓰러지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타코부터 사 먹었다. 허겁지겁 입으로 밀어 넣으며 푸짐한 양과 맛에 허우적댈 때였다. 내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주인이 웃으며 감질나게 푸른빛을 띠는 고추를 권유했다.

"괜찮아, 맵지 않은 거야."

그렇잖아도 달달함 속에 살짝 매운 맛이 필요했는데 딸려나온 고추를 한 입 시원하게 베어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그러고는 잘 익었구나 생각하고 다시 타코를 집었을 때 입에서 열불이 나며 갑자기 눈물로 뿌얘진 세상 속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일단 눈물부터 쏟아내고는 타들어가듯 얼얼해진 입술 주위를 맹렬히 혀로 핥아내야 했다. 그리고 정신없이 콜라를 한 병 털어넣었다. 고추가 얘기와는 다르게 무척 매운 것이었다.

"맵잖아요!"
"그게 맵다고?"
주인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고추를 씹어먹었다. 그리곤 여유 있는 한마디.
"맛있는데 뭘."

하긴 태어날 때부터 아니 조상 대대로 먹었을 테니 생득적 혀의 미각세포부터가 차이가 나는 게 어쩌면 당연하겠지 싶다. 그래도 '괜·찮·다.' 고추의 매운기도 없앨 겸 맛있었기에 한 접시 더 시켜먹고는 포만감에 만족할 수 있었으니까.

길을 물어물어 이윽고 경찰서에 도착했다. 영어를 할 만한 경찰은 없었지만 겨우겨우 내 말 뜻을 알아먹었다. (과테말라에서 배우려는 계획이지만 스페인어 공부가 필시 필요하다) 경찰들은 나를 아무것도 없는 사방이 빈 방으로 안내했다. 아마도 몇 달은 쓰지 않은 공간인 듯했다.

그것은 꼭 사고치는 사람 가둬놨을 법한, 영화에서 나오는 백색 폐쇄공포증을 일으킬 만한 실내였다. 그래도 '괜·찮·다.' 최소한의 요건인 샤워 시설도 있고 어설픈 소파 형식의 침대도 있었으니.

 바퀴벌레. 누군가 참혹하게 짓밟힌 듯 .
바퀴벌레. 누군가 참혹하게 짓밟힌 듯 . ⓒ 문종성

혼자 덩그러니 남은 방에서 내뱉은 독백

4평 정도 되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구석엔 먹다 남은 콜라 페트병과 치킨 찌꺼기들이 있었다. 바닥을 보니 이번엔 바퀴벌레가 배가 터진 채 죽어 있었다. 누군가 귀찮아서 죽였겠지. 인류의 적이 될지도 모를. '괜·찮·다.' 그 정도야 뭐 청소하면 되는 거니.

여행을 거듭하면서 환경에 의해 어느 새 체면을 버리고 있는, 내 모습 그대로 나가는 자신이 완성되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미국에선 예의에 맞게 깔끔 떨면 되는 것이고 멕시코에선 조금 지저분해도 여행이 구차해지거나 하등 불편할 이유가 없으니까.

샤워 준비를 하고 옆에 위치한 샤워실로 들어갔다. 온통 먼지와 흙으로 도배가 된 샤워실. 그리고 온수가 나오지 않는 수도꼭지. 뭐 어때? 냉수마찰 즐기는 거지 뭐. 옷을 벗고 먼저 머리부터 감기 시작했다. 차가움이 머리털 하나하나까지 빠닷빠닷하게 만드는 듯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렸다. 본격적으로 샤워를 해야 하는 찬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타이밍에서 말이다.

심호흡을 하고 마음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외쳤다. 하지만 쉽사리 들어가지지 않았다. 난 추운 건 정말이지 질색이다. 그래도 '괜·찮·다.' 어제 올가 집에서는 아예 샤워장이 없는 관계로 제대로 씻지도 못했으니까.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하나 둘 셋! 무슨 큰 결단을 내린 듯이 비장함으로 물 속에 뛰어들어갔다. 어찌나 추웠던지 닭살이 돋고 내내 오들오들 떨었다. 그 와중에 건성으로 비누칠을 하고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샤워를 마쳤다.

하지만 샤워보다 샤워 후 밖에 나올 때가 더 춥다는 건 자명한 사실. 또 다시 딱따구리 부리로 나무 찍듯 이가 부딪히는 가운데 김이 모락모락 피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르르 떠는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은 후 소파에 누웠다.

그러고는 경찰서 오기 전 구입했던 바나나와 귤로 '분노의 과식'을 했다. 무언가 일이 안 풀려 답답하고 화가 날 땐 금식보다 과식투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던 내 성격이다. 그리고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방에서 내뱉은 독백이 메아리로 울려 다시 내 귀로 들어왔다.

'오늘 정말 괜찮은 하루였어.'

이것이 여행! 어떤 환경에도 감사하고 그 환경에 적응하고 극복해 나가는 것이 여행이다. 그게 또한 인생이다.
이것이 여행!어떤 환경에도 감사하고 그 환경에 적응하고 극복해 나가는 것이 여행이다. 그게 또한 인생이다. ⓒ 문종성

마음먹은 만큼 행복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내뱉고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계산이 틀리고, 패니어 고리가 부러지고, 찬바람에 길을 헤매고, 고추의 매운 맛을 보고, 정이 안 가는 숙소에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샤워까지.

하지만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했던 오늘, 정말, 괜찮았던 하루라고 믿고 보니 문득 무척이나 나 자신이 행복한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이 높을수록 골짜기가 깊듯 최선의 여행을 위한 최악의 상황도 있을테니 인생사 다 그렇고 그런 새옹지마 아닐까.

여행이든 인생이든 마음먹은 만큼 행복하게 되어 있다. 참, 그리고 보니 밤새 왱왱거리는 모기 소리가 오늘 괜찮은 하루에 종지부를 찍는구나.

덧붙이는 글 | 지난 번 기사(세계일주 55호)에 나왔던 음식은 토스따다가 아닌 '고르디따스'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모양의 음식을 먹어 혼동했습니다. 55호에 실린 기사 중 일부가 이번 기사와 같은 날 일어난 일이라 연관성이 있어 첨부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세계일주#멕시코#문종성#자전거#비전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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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비전노마드, 지구를 순례하다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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