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 살 때까지 끌고 다닌 툭툭 기사
현지인 종업원에게 시원한 소다수를 주문했다. 그녀들은 이제 막 도착한 나에게 방콕에 이틀 먼저 온 선배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 말을 꺼냈다. 오늘 하루 반나절은 '툭툭' 기사에게 끌려다니며 실컷 골탕을 먹었다는 것이다. 이야기인 즉 오전에 왕궁 사원을 관광하고 카오산에 가기 위해 툭툭을 탔는데 기사가 보석을 싸게 파는 데를 안내하겠다고 하더란다. "코리아 우먼, 라이크 주얼리!(like jewelry!), 베스트 주얼리!(best jewelry!)"를 외치면서. 사양의 뜻을 표했으나 여자 둘이라서 그런지 툭툭기사는 그녀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어느 보석가게에 그녀들을 내려놓았단다. 그녀들이 사지 않자,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 가더란다. 이러다 하루 종일 끌려다니겠다 싶어 모조가 '뻔할 뻔'자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싼 목걸이 하나를 샀더니 그제야 기사가 카오산으로 안내했단다. 그래도 대놓고 강도는 아니었던지 차비는 받지 않고, 원하는 곳에 곱게 내려주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그녀들은 안도했다. 어쨌든 툭툭 기사 잘못 만나 매연 투성이 방콕 시내를 두어 시간 넘게 끌려다녔다는 것이 남의 얘기가 아닌 것처럼 들린다. 초심자에겐 긴장을 넘어 경계심을 품기에 충분한 얘기다. 세계 어디를 가도, 아니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여행자에겐 현지인의 바가지가 경계 대상 1호 아닌가. "그냥 질렀어요" 들어올 땐 몰랐는데 반백의 동대문 사장 옆에 얼굴이 허여멀끔한 젊은 친구가 앉아 있다. 그 친구가 사장한테 숙소를 소개해 달라고 하자 사장은 망설임 없이 '에라완'하고 짧게 발음한다. 곧이어 당신도 거길 잡으시죠, 하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나도 모르게 "나도 거길 가죠 뭐" 했다. 숙박비는 하루 680바트(1만8000원 정도). 에어컨, 샤워실이 딸려 있단다. 사전 정보로 알고 있는 300~500 바트에 비해 비싼 편이다. 그러나 오늘은 첫날이니 일단 적응하는 차원에서 그곳을 가기로 마음 먹었다. 잠시 후 태국 청년 한 명이 오더니 자기를 따라 오라고 한다. 허여멀끔한 친구도 같이 갔다. 체크인을 하자 그 친구와 방을 나란히 배정 받았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짐을 풀고 카메라 가방만 따로 챙겨 로비에 나가자 마침 그 친구도 막 나왔다. 정식으로 통성명을 요청하자 "정00입니다"하면서 또박하게 자기를 소개한다. 나이는 스물여덟, 서울에서 요리사를 하고 있고 요리를 배운 지는 십년이 됐다고 한다. 일 잘하고 있다가, 어젯밤 갑자기, 무작정 뜨고 싶어서 주방장한테 전화 한 통 하고 바로 방콕으로 날아 왔단다. "그냥 질러버렸어요." 일터에서 일탈하는 것을 무슨 음식 주문하듯이 얘기한다. 그 나이면 아직 주위 사람 의식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질러버릴 수 있는 나이인가? 우리가 밤차를 타고 떠났다면 요즘 세대는 밤비행기를 탄다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끄덕였다. 어쩌면 나 역시 지금 삶에게, 일상에게 질러대는 격 아닌가. 일상이었으면 점잖은 충고라도 할 법한 일도 여행은 각도를 달리 보게 만든다. 젊은 시절의 충동도 크게 보면 삶의 완고함을 다지는 과정에 불과하다. 충동이 불안과 동의어라는 것은 얼마 안 돼 깨우칠 것이니까. 그리하여 그의 일탈도 종국에는 일상의 소중함을 더욱 느끼게 할 터일 것이다. 그가 돌아가는 날까지. "잘 왔어요. 근데 왜 방콕이죠?" "방콕은 이번이 일곱번째예요, 그냥, 딱히 이유는 없지만 방콕이 좋아요. 국제선 타고 밤에 쉽게 뜰 수가 있잖아요. 비행편도 많고…." 그가 방콕에 가는 건 말하자면 우리 세대가 치밀어 오르는 충동을 어쩌지 못해 무작정 바다를 찾아가는 격이다. 우리가 밤차를 타고 떠났다면 요즘 세대는 밤비행기를 탄다. 그만큼 세계화가 되었다는 것인가. 그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으니, 태국 친구에게 연락하여 시내 클럽에 가서 늦게까지 즐기다 올 거라고 한다. 그 전에 여섯 번의 방문을 통해 태국에서 친구까지 사귄 것이다. 시각은 오후 네 시를 막 넘어가고 있다. 나에게도 애매한 시간이다. 관광하기에는 늦은 시간이고 그렇다고 숙소에 마냥 머물기는 아까운 시간이다. 그에게 시내에 같이 가줄 수 있느냐고 요청하자 쾌히 승낙을 한다. 밖에 나가 택시를 탔다. 그는 방콕에서는 툭툭을 타지 않고 택시만 탄다고 한다. 툭툭은 첫째, 바가지를 씌우고, 둘째 흥정을 해야 하니 귀찮고, 셋째 시내의 매연을 고스란히 마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택시를 타면 미터기를 꺾는지 꼭 확인해야 한다고 한다. 미터기를 작동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요금을 요구하는 기사도 있기 때문이란다. 그 유명한 태국 마사지 한번 받아봐?
택시를 타고 간 곳은 실롬이라는 방콕 시내의 유흥과 환락의 중심지였다. 정씨와 저녁을 먹고 나자 그는 시간이 남아 태국 마사지를 받겠다고 한다. 나도 그 유명한 태국 마사지를 받아봐? 하다가 이번 여행을 감각적 즐김에 두고 싶진 않았기에 그만 두겠다고 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에선 뭐 그리 까탈스럽게 구느냐는 자책이 인다. 마사지 비용이 우리 돈으로 일이만 원인데, 그 정도는 정 뭐하면, 네 개인 돈으로도 즐길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반문이다. 마사지도 문화고 그것도 태국이 자랑하는 문화상품 아니던가, 즐기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마사지가 이 나라의 대표적 문화상품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나를 합리화하기 위한 포장에 불과하다. 내 배낭여행의 본질은 문화상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와 생활을 체험하는 것이다. 사는 것과 경험하는 것의 차이는 돈의 매개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다. 문화를 경험하는 과정에서도 돈을 지불할 수도 있다. 가령 태국의 전통음식을 먹거나 전통 가옥에서 숙박을 하면 거기서도 돈을 지불한다. 그러나 그것은 문화 자체를 사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과 자는 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문화를 겪는 것이다. 그러나 마사지는 문화를 빙자한 쾌락과의 거래이다. 여행의 과정에서 쾌락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쾌락의 직접적 자극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것은 순전히 우리 사회에서 비롯된 편견이겠지만, 마사지라는 용어에서 풍겨 나오는 들척지근하고 음험한 퇴폐의 냄새 또한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여행 첫날부터…. 거리는 활기를 찾는데 나는 어디로 갈지 모르고... 정씨와 헤어지고 나니 벌써 저녁 어스름이 몰려들고 있다. 시내의 번잡함은 이곳이 태국인지 한국인지 오가는 사람들의 생김만 제외한다면 구별할 수가 없다. 좁은 보도에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조잡한 장난감을 파는 좌판 행상들의 호객 행위 또한 우리의 대도시와 다를 바 없다. 하나 둘, 간판 불이 들어오고 노점상의 백열등도 켜지자, 거리는 점점 활기가 넘치기 시작한다. 관광으로 먹고 사는 나라답게 거리에는 쇼핑 나온 외국인들도 많이 보인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냥 돌아다녔다. 시내 지도는 이미 나에게 유용성을 상실해 버린 지 오래다. 방향의 가늠도 장소의 위치성도 잃어버린 채 그저 낯선 이국의 밤거리를 쏘다녔다. 한 시간, 두 시간. 어느 휘황한 거리를 들어서니 반쯤 열린 출입문 사이로-필히 행인의 시선을 끌기 위해 일부러 열어 둔 것이 틀림없다-비키니 차림의 여자들이 스탠드 바 위에 올라가 나란히 줄지어서 춤을 춘다. 관능이 되기도 하고, 능욕이 되기도 하는 정육점의 붉은 불빛과 어항의 푸른 불빛들이 묘하게 어우러져 그녀들의 춤추는 모습을 리듬감 있게 비춘다. 방콕 시내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한국 중년 남자들
"우와, 쥑인다!" 그 말을 처음엔 흘러들었다. 그러다 어, 하고 돌아보았다. 이곳은 한국이 아니잖아. 열 명쯤 되는 한국 중년남자들이 불콰해진 얼굴로 남대문 시장에 온 것 마냥 떠들어댔다. "어이! 가이드, 그냥 여 들어가지 뭐, 이 아가씨들이 최고 나은 것 같은디." "아가씨가 아니고, 머스마라니까, 머스마! X달린 놈들이라니까." 경상도 사내들인가 보다. 주위 노점상들도 코리안들의 이같은 행태에 익숙한지 빙긋이 웃으며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들의 미소에 숨어 있는 경멸을. 우리도 그러지 않았는가. 불과 이십년 전, 일본인 관광객들이 환락가에서 그들의 언어로 히히댈 때 우리 역시 경멸과 환멸이 뒤섞인 미소를 보내지 않았는가. (내가 기억하기로 일본인들은 큰 소리로 떠들지 않고 지네들끼리 낄낄거렸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고함에 가까운 소리로 외쳐댄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거나, 좋다 나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외국 사람들에게 각인되는 것은 한국인이 더 확실할 것이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걸음을 빨리 했다. 그때 누가 내 어깨를 짚었다. 돌아보니 웬 한국 사내가 술냄새를 풍기며 "요 앞집에 다 들어갔는데 어디까지 갑니까?"라 한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사내는 "혹시… 000 여행사 아닙니꺼" 하고 머리를 긁적인다. 단체여행객인데 앞서가는 나를 대열에서 이탈한 일행으로 오인한 것이다. 겸연쩍었는지 자신의 실수를 무마하려는 차원에서 "까짓거 같이 가서 놉시다. 돈만 내면 되지"라 한다. 그 말투가 어차피 그들의 일행 자체도 서로 다 아는 처지가 아니니 (돈만 낸다면) 당신 한 명 낀다고 안 될 거 있느냐는 의미다. "어차피 놀러 온 거 아뇨. 알죠, 야들이 게이랍니다. 게이!" 여기 와서까지 스타벅스에 갈 수야 없지...
그는 행여나 내가 '게이'라는 별종의 인간과 즐길 수 있는 특이한 환락의 기회를 모르고 지나칠까 싶어 친절하게 설명까지 덧붙였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내 돌아서 이 요상하고 시끌벅적한 거리를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왔다. 그러고 보니 두 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쏘다녔다. 어디 가서 잠깐 다리라도 쉴까하고 둘러보니 의외로 앉을 만한 곳이 눈에 띄지 않는다. 길 건너에 스타벅스 간판이 보였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전세계적으로 표준화된, 그리하여 내가 살고 있는 곳과 전혀 차별성이 없는 그런 곳에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저녁으로 먹은 태국 국수가 어느새 꺼져 출출함이 슬슬 기지개를 펴고 있다. 밤이 되자 거리에는 노점상들이 부쩍 늘어났다. 플라스틱 탁자와 의자를 벌여놓고 간단한 먹거리를 파는 노점상들이 어느새 이면도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 하나 앞에 섰다. 보아하니 떡 종류 같은데 간단하게 집어먹기 좋아 보였다. 잎사귀로 싼 찰떡인데 무척 달았다. 너무 달아 두 개 정도 먹고 나니 벌써 물린다. 뱃속의 출출함은 괜히 자기 성질만 건드려 놨다고 길길이 날뛴다. 다른 먹거리가 없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문득 내 눈길이 멎는 곳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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