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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간밤에 단잠을 잔 숙소는 월드비전 스위스 지원, 봉고 인적자원개발센터(가나 동북부 지역 봉고 군 소재)
숙소간밤에 단잠을 잔 숙소는 월드비전 스위스 지원, 봉고 인적자원개발센터(가나 동북부 지역 봉고 군 소재) ⓒ 차승만

눈을 떴다. 숙소 창문에 가느다란 아침 햇볕이 한 가닥 새어 들어왔다. 아침나절에 불어오는 초원의 바람이 창틀을 비집고 들어와 겨드랑이를 간질였다. 커튼을 열어젖히니 벌써 울타리 밖 숲 속의 마른 풀들이 새벽기운을 가득 머금고 있었고, 하늘의 불그스레한 기운이 지면으로 내려와 건조한 대지 위에서 눈부시게 부서지고 있었다. 동이 트고 있던 것이다.

도마뱀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던 그 도마뱀
도마뱀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던 그 도마뱀 ⓒ 차승만

간밤에 나를 놀라게 만든 도마뱀 녀석의 뒤뚱거리는 줄달음질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지난 밤 나의 단잠을 채근한 알 수 없는 야생동물의 소리, 그 중 단연코 나를 향한 간절한 절규임을 직감하게 한 소리가 있었으니, 도마뱀 녀석의 외마디 비명이었다. 강약, 장중단음의 뭔가 석연찮은 엇박자의 마찰음이었지만 모르스 부호처럼 리듬을 타고 부엌에서 들려오기를 몇 분여.

나는 불을 끈 채 슬며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밤, 화장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덩치 큰 녀석이 아닌 것으로 봐서 이곳까지 접근할 놈은 분명 파충류일 것이라 짐작을 하며 욕조로 다가가니 과연 살이 통통히 오른 도마뱀 녀석이 있는 것이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세면대에서 찬 물을 한 움큼 쥐고 녀석의 등 위로 흩뿌렸다. 내 장난에 부아가 난 것인지 아니면 처음으로 살아날 방도를 찾은 안도감 때문인지, 갑자기 녀석이 잠시 중지했던 발 구르기를 재개하며 살려달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숙소 방문 기록을 보아하니 내가 도착하기 몇 주간 방문자가 없었던 걸로 봐서, 녀석은 그 사이에 적어도 몇 주 동안은 이곳에 갇혀 있었나 보다. 저 바깥의 대 초원에서 이곳까지 무슨 호기심이 발동해서 왔을까? 나는 숙소를 뒤져 바구니를 찾아서 녀석을 집어넣고 숙소 마당으로 데리고 나가 녀석을 망망 대초원으로 달려 보냈다. 녀석은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그 방정맞은 발 구르기를 하면서 사라졌다.

한참이 지났을까? 녀석은 허기를 다 채우고 다시 내 창문에 나타난 것이다. 오랜만에 마주한 방문객과 수다를 떨며, 초원생활의 무료함을 달래볼 요량이었을까? 창가에서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며,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대고 있는 모습이 너무 익살스럽고 장난스러웠지만, 나는 오랜만에 맛보는 이 절대적인 적막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으니 가라’는 고루한 거짓말은 왠지 안 통할 것 같아, 부러 못 본 척 시선을 천정에만 고정시키노라니, 녀석은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떨어뜨린 채 다시 초원으로 줄걸음을 쳤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녀석의 뒷모습은 조금도 쓸쓸해 보이지도 않았고 외로워 보이지도 않았다.

몇 시쯤 되었을까? 여태까지 내 세포질을 구성하는 분자들이 밤을 낮이라고, 낮을 밤이라고 우격다짐을 해온지라 한 번도 깊은 잠에 든 적이 없었던 중, 처음으로 노곤히 잠에 든 것이다. 덤불 태우기가 더 이상 저질러지지 않는 깊은 숲 속에서의 꿀맛 같은 단잠이었다. 

동틀 무렵 산들거리는 아침바람이 창문틈으로 들어와 내 겨드랑이를 간질였다.
동틀 무렵산들거리는 아침바람이 창문틈으로 들어와 내 겨드랑이를 간질였다. ⓒ 차승만

새벽하늘을 놓치진 않을까 하는 염려에 나는 부리나케 옷을 입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아직 모두들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이른 아침인 모양이다. 시계가 없는 세상은 그래서 행복하기만 하다. 이른 햇빛이 창문을 두드리면 그것이 아침이고, 뉘엿뉘엿 대지를 넘어 석양이 잦아들 즈음이면 그것이 저녁인 것이다.

모든 신체리듬은 시곗바늘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해와 달의 동선을 따라 갈려진다. 하루의 일과를 보채는 것은 시침이 아니라, 아침임을 알리는 자연의 모든 풍경이고 그 마무리를 알리는 것도 어슴푸레 잦아드는 저녁기운이다. 사람들의 꿈틀거림은 다른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들이 그렇듯 낮과 밤, 그 밀물과 썰물의 리듬을 자연스럽게 타면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모든 세포의 움직임이 매일의 날씨 그리고 온도와 습도에 따라 다른데, 1년 365일 똑 같은 초침대로 움직이는 우리 도시의 ‘시간’이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미개한 제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바위 언덕 그리고 넉넉하게 내게 자리를 권하는 바위 언덕, 그 등성이에 올라앉아 묵상을 드렸다.
바위 언덕그리고 넉넉하게 내게 자리를 권하는 바위 언덕, 그 등성이에 올라앉아 묵상을 드렸다. ⓒ 차승만

바오밥 믿음직한 바위가 다정하게 밀생하고, 바오밥은 지나가는 바람을 아쉬운 듯 붙잡은 채 점재하는 곳
바오밥믿음직한 바위가 다정하게 밀생하고, 바오밥은 지나가는 바람을 아쉬운 듯 붙잡은 채 점재하는 곳 ⓒ 차승만


더 강렬한 햇빛이 초원의 이슬을 다 내쫓기 전에 서둘러 숲 속으로 갈 채비를 끝냈다. 봉고 지역의 숲은 여태껏 가나에서 보아온 숲보다 훨씬 더 장엄하였다. 보이는 곳마다 정말 믿음직하고 넉넉한 바위언덕이, 언제든지 쉬었다 가라고 누구에게나 다정히 이야기하며 밀생하고 있었고, 바오밥 나무들이 지나가는 바람과 아침볕을 아쉬운 듯 붙잡으며 점재하고 있었다.

나무가 말을 건다. 이 숲은 나무도, 바위도, 구름도, 바람도 그 누구도 내게 말을 걸어왔다.
말이 많은 자는 이곳에선 그저 피곤할 뿐이다.
나무가 말을 건다.이 숲은 나무도, 바위도, 구름도, 바람도 그 누구도 내게 말을 걸어왔다. 말이 많은 자는 이곳에선 그저 피곤할 뿐이다. ⓒ 차승만

나는 둔덕에 올라 편안하게 내게 자리를 건네는 바윗등성이에 걸터앉았다. 콧등을 스쳐가는 아침 바람과 귓불을 간질이는 풀잎들이 보채는 동안 가나의 풍요로움에 대한 감동에 젖어 묵상을 드렸다. 이렇게 주어지는 고독의 시간이란 얼마나 복에 겨운 일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나무도, 새들도, 구름도, 바람도, 그리고 초원의 덤불숲도 내게 자꾸 말을 걸어왔다. 고독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방목되는 기니아 파울(Guinea Fowl) 초원에서 방목되는 서아프리카산 뿔닭
방목되는 기니아 파울(Guinea Fowl)초원에서 방목되는 서아프리카산 뿔닭 ⓒ 차승만

그리고 내게 또 말을 건 염소 부스럭 거리며 내게 또 말을 건넨 것은 염소였다.
그리고 내게 또 말을 건 염소부스럭 거리며 내게 또 말을 건넨 것은 염소였다. ⓒ 차승만

“안녕.”
“안녕.”

“너 못 보던 친구구나. 어디서 왔니?”
“어 나 한국이란 나라에서 왔어.”

“그래 한국. 그런데 이 아침부터 웬일이니?”
“어 아침 공기가 너무 좋아. 그리고 이렇게 끝없는 초원과 바오밥 나무 숲 속은 처음이야. 한국에서는 이런 광경을 목격할 수가 없어. 바윗등성이에 올라앉아 묵상을 하는데 이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리더라고. 너였구나.”

“응 부지런히 밥을 먹어야 되거든. 보다시피 난 애기를 가지고 있잖아. 많이 먹어야 해.”
“그런데 부럽다 네가. 이렇게 드넓은 초원에서 아무런 목줄도 없이 그냥 네가 걷고 싶은 곳을 걷는구나.”

“응. 너무 당연한 거 아니니? 여기는 언제나 먹을 것이 풍성해. 먹다가 지치면 한 숨 잘 공간도 가득해. 특히나 저 바위언덕 위 나무 밑 그늘은 딱 안성맞춤이야. 우기 때 바오밥 나무가 만들어 주는 그늘 밑에서 한나절 졸린 오후를 보내다가 풀을 먹는 걸 잊기도 하거든. 한국은 어떠니?”

“어. 한국은 이제 방목하는 곳은 거의 없어. 조그만, 진짜 조그만 우리에 다 가두어서 키우거든.”
“저런, 얼마나 힘들까? 우린 이렇게 자유로운데. 풀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고.”

“그래. 너희들  정말 행복한 것 같아.”
“응. 듣고 보니 그렇구나. 그런데 한국은 자유롭게 풀을 뜯어 먹을 곳이 없는 것이니?”

“어 글쎄. 그게 분명 그건 아니었는데. 지금은 많이 힘이 들어. 그리고 아.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네. 아무튼 한국에서는 사육되는 동물들도 한 평생 스트레스 속에서 자라는 것 같아. 문명이 발달되었다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상황이 비슷해. 땅이 너른 미국에서도 역시 마찬가지거든. 물론 안 그런 동물들도 가끔 있긴 하지만 말이지.”

“그러니? 난 잘 이해를 못하겠어. 한 평생 좁은 공간에서 가두어지낸다는 것은 난 상상도 못할 일인 것 같아. 가두어진 채 자라는 것은 너무 부자연스럽겠다.”
“어… 그래. 원래 가두어진 채 자랐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어. 원래는….”

가나는 모든 것이 방목이었다. 사람들의 소용대로 키우는 가축들이긴 하지만 이들은 방목의 자유를 죽기 직전까지 마음껏 맛본다. 이 곳 가나 사람들이 가난 속에서도 그늘 없는 웃음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갇힌 채로 자라는 동물들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염소도, 돼지도, 기니아 파울도, 그리고 혹 달린 소도 방목된다. 그리고 그 초원에는 자연을 닮은 아이들의 소박한 꿈과 희망마저도 이들과 함께 방목되고 있었다.

작별 인사를 나눌 참으로 이번에는 내가 먼저 염소에게 말을 걸었다.

“참 그런데 저쪽에 있는 저 기니아 파울(뿔닭) 녀석들 말이지.”
“어 왜?”

“사진을 찍으려는데 자꾸 도망쳐버리네.”
“어 그 친구들 원래 겁이 많아서 그래. 머리가 얼마나 작은지 봤어. 아주 조막만 해.”

“헤헤. 그렇구나. 아무튼 반가웠어. 고마워. 애기 건강하게 잘 낳고.”
“어 그래. 가나에서 많은 것 보고 갔으면 좋겠다.”

“그래. 이미 많은 것을 보고 있어. 가나는 정말 축복받은 곳이야. 알지? 늘 그걸 생각해.”
“응 그래 고마워!”

염소와 인사를 나눈 후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다니엘, 클레멘트, 골드프레드 모두 깨어 조반을 먹으려고 숙소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토스트가 큰 접시에 놓여 있었고 바람이 불면 훅훅 날아가는 안남미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이보리코스트 산 블랙커피에 손이 갔다. 가나에 오자마자 생긴 이상한 버릇이다. '아이보리코스트'는 내게, 오래전 한국에서 감금된 채 생활을 해야 했던 코트디부아르 예술단 사건을 떠올리게 했고, 이것은 아무런 연관성도 없을지 모르는 그 나라 커피에 습관적으로 내 손이 가게 만들었다.

나는 커피를 찻잔에 부어넣었다. 덩달아 커피 잔에 커피를 부어넣는 다니엘은 며칠 전 숙소에서 가져온 설탕봉지를 뜯으며 막 설탕을 부어넣으려 하고 있었다.

“다니엘, 커피보다 사실 설탕이 더 몸에 안 좋은 거 알죠?”
“네?”

염소와 나눈 대화에서 영감을 얻은 나는, 다니엘이 커피 잔에 뜯어 넣는 설탕덩어리를 화두로 삼아, 방목에 대해서 그리고 가두어진 채 성장하는 도시의 삶에 대해서 오후 한나절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의 재산 상속을 모두 거부하고 유제품과 축산제품 뒤에 숨어 있는 괴담을 폭로한 존 로빈스의 음식 혁명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다니엘은 끝내 반쯤 뜯겨진 설탕봉지를 도로 접시로 집어넣었다.

해는 벌써 중천을 지나고 있었다.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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