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소동파는, 미인이라면 꾸며도 아름답고 안 꾸며도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서호의 풍광은, 청명한 날에 반짝이는 물빛도 아름답지만, 비 오는 날에 안개 낀 산 빛도 똑같이 아름답다고 칭송했다. 서시(西施)는 미인계(美人計)와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말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이른바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시대, 오나라 부차에게 패한 월나라에는 범려라는 충신이 있었다. 그는 나무꾼의 딸이었던 서시를 발견하여 교양과 예능 교육을 시켜 부차에게 진상한다. 부차는 서시의 미색에 빠져 정치를 그르친 나머지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다.
그런데 서시에게는 심장병이 있어서 이따금씩 얼굴을 찡그렸다고 한다. 다른 여인들에게는 그 모습마저도 아름다워 보였다. 그래서 자기들도 가슴에 손을 대고 얼굴을 찡그려 보는 짓을 해보았다고 했다. 서시빈목(西施矉目)이라는 사자숙어는 이래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본질은 챙기지 못하고 외형만 갖추려는 사람에게 쓰면 되는 말이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서시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녀가 대궐로 가는 길은 언제나 사람들로 막혔다. 질서를 잡기 위해 대궐 경비병이 나서야 했다. 그런데 경비병은 불행히도 서시의 얼굴을 오래 볼 수 없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서시를 보고 그 자리에서 졸도한 그는 그 후 일어나지 못기 때문이다.
서호는 무궁무진한 설화를 담고 있다고 했다. 갖가지 탑과 문과 절과 보(保)에는 서민들의 사랑과 자유와 행복, 그리고 배신과 시련과 파탄의 이야기들이 점철되어 있었다.
김태수는 서호의 모든 것들에 매혹되어 버렸다. 그는 객사에 가지 않고 하룻밤을 서호에서 묵기로 했다.
고려상사 대표 민제호는 수상쩍은 사람들이 한국 여자 백주원을 수소문하고 다닌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물론 고려상사는 동제사의 항주 지사가 무역회사로 위장한 이름이었다. 민제호는 백주원이 누구인지를 아는 세 명의 조선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백주원은 동제사 이사장 신규식과 정보참모 역 박찬익과 항주 지사장 민제호 세 사람밖에는 모르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중국의 낭인 비슷한 이들이 백주원을 수소문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민제호 자신도 하도 오랜만에 들어 본 이름이라서 처음에는 무심코 받아들였던 첩보였다. 백주원은 그동안 18호라는 숫자로만 호칭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민제호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첩보였지만 18호가 맡고 있는 비중의 크기로 보아 즉시 동제사 본부에 보고해야 할 사안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박찬익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신규식의 방에 들어왔다.
“형님, 이사장님,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백주원이라는 이름을 수소문하고 다닌답니다.”
“누가 그러던가?”
“항주에서 민 사장이 연락해 왔습니다.”
“분명 배후가 있을 걸세. 배후를 캐 본 다음에 대처해야 할 일이야.”
“형님, 이사장님, 이건 뻔한 일 아니겠습니까? 백주원이란 이름을 아는 것은 셋뿐인데 그런 극비 사항을 캐냈다면 일본 경무부 말고 어디겠습니까?”
“부탁이 하나 있네.”
“말씀하십시오.”
“형님이건 이사장이건 하나로만 불러 주게.”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 웃고 나서 생각하니 아주 심각한 일이었다.
“세 사람밖에는 모른다고 했지?”
“그렇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배후를 더 알아보라고 하게나“
“그러겠습니다.”
신규식은 박찬익을 돌려보냈다. 18호의 정체가 드러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신규식은 18호의 본명과 함께 그녀가 항주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자가 누구일지를 도저히 추리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18호의 정체를 아는 것은 세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임을 불현듯이 깨달았다. 그리고 물론 다른 한 사람은 전 대한독립군 총독부 침투 스파이, 현 한국 동제사 특수요원 제18호인 백주원 그녀 자신이었다.
그는 박찬익을 불렀다.
“박 동지 아무래도 18호를 대피시켜야 할 것 같소.”
“잘 생각하셨습니다. 경무총장 아카시의 코털을 뽑고 왔으니 놈들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을 겁니다.”
“당장은 18호가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하니 완벽하게 한 달 정도 숨기는 방법을 씁시다.”
두 사람은 즉각 18호를 대피시키기로 하고, 항주에 민제호의 동생 민필호를 보내 연락하기로 했다.
김태수가 항주에 온 지 벌써 열흘이었다. 일을 맡았던 중국인들은 일주일이 넘어서야 하나씩 나타났는데 모두가 못 찾겠다는 대답뿐이었다. 그들 중의 반쯤은 매우 미안하다는 기색이었으나, 나머지는 있지도 않은 사람을 찾으라고 해서 불만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김태수는 내일부터는 자신이 직접 돌아다녀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항주에서 못 찾으면 절강성을 다 뒤져서라도, 아니 중국 대륙을 모두 훑어서라도 그녀를 찾을 용의가 그에게는 있었다.
김태수는 항주 거리를 며칠 돌아다니다가 ‘고려상사’라는 간판이 붙은 건물 앞에서 황강을 멈추게 했다. 사무실은 1층이고 출입문은 도로와 접하고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무원인 듯해 보이는 중국 처녀가 김태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인으로 보이는 청년 둘이 홀 안 쪽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민제호와 민필호였다. 그들은 방금 백주원을 배웅하고 와서 앉아 있던 중이었다.
“사람을 찾고 싶어서 왔습니다.”
민제호와 민필호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김태수 쪽을 쳐다보았다. 민제호가 일어나 말했다.
“누구를 찾아오셨는지요?”
“백주원이라는 조선 여자입니다.”
민필호는 퍼뜩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가슴도 조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제호는 침착했다.
“모르는 이름인데, 여하튼 이리 오셔서 차라도 한 잔 하시면서 말씀하시지요.”
“감사합니다.”
김태수는 테이블로 가 앉았다. 그는 두 청년이 형제임을 직감했다.
민제호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김태수에게 건넸다.
“보아 하니 조선인 같으신데. 이역에서 동포를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김태수는 명함이란 것을 처음 보았다. 거기에는 고려상사 대표 민제호라고 적혀 있었다.
“저는 한양 숭교방에 사는 김태수라고 합니다. 며칠 전 중국에 왔습니다.”
“사업 때문에 오신 겁니까?”
“아닙니다. 사람을 만나러 왔는데 의외로 찾기가 어렵군요. 그래서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왔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참, 이 사람은 제 아우입니다.”
민제호는 민필호를 소개했다. 민필호는 일어서며 머리를 숙였다.
“민필호라고 합니다.”
“김태수입니다.”
사무원이 찻잔 하나를 더 가져와 김태수 앞에 놓았다. 민제호는 김태수의 잔에 찻물을 부으며 말했다.
“용정녹차입니다. 한번 드셔 보시지요.”
용정차는 김태수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용정이란 원래 우물의 이름이었고 이 우물물로 끓이는 차가 용정차였다.
“귀한 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제호는 백주원의 행방을 알아봐 주겠다고 말했다. 필호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형의 모습이 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물론 형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필호는 독립운동을 하려면 아주 많은 거짓말을 해야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는 해도 백주원을 찾는 김태수의 표정이 안쓰러웠다. 모르긴 해도 뭔가 절실한 사연이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야망에 찬 인물들의 모험과 사랑을 그린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