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평소 좋아하는 음식 중의 하나인 비빔냉면을 먹는 날이었습니다. 비빔냉면도 특별히 먹는 날이 있느냐고 묻는 누리꾼도 계시겠지만, 저에게는 매달 있습니다. 자장면과 잡채밥도 먹는 날이 있거든요. 기다려지는 날이고 기쁜 날이기도 합니다.
30년 넘게 하던 사업을 그만두고 빈둥거리면서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생각해낸 것이, 몸 관리 잘하고, 절약하는 것도 아내를 위하는 길이고, 버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보내주는 생활비에서 전기료와 관리비를 뺀 금액을 30일로 나누면 하루 생활비가 7천원 꼴인데, 마음을 크게 먹고 ‘비빔냉면 먹는 날’, ‘자장면 먹는 날’ 그리고 ‘잡채밥 먹는 날’을 정하고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비빔냉면을 먹고 며칠 지나면 자장면, 또 며칠 지나면 잡채밥 먹는 날인데, 잡채밥은 장모님과 함께 먹습니다. 모두가 기다려지는 날이지요. 그러고 보니 매일 기다리면서 사는 것 같네요. 하긴, 기다림은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니 나쁠 것도 없겠네요.
아내는 월급을 타는 월말을 전후해서 30만원씩 보내줍니다. 제가 청구한 금액이지요. 넉넉하지는 않지만 먹고 싶은 반찬 만들어 먹으면서 지낼 수 있습니다. 전화료나 원거리 교통비는 보너스(?) 형식으로 따로 나오니까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반가운 소식에, 냉면 맛도 두 배아침 뉴스에서, 중부지역 황사가 남쪽지방까지 내려왔으니 오전에는 외출을 삼가라는 날씨정보를 접했습니다. 해서, 저녁 5시쯤에나 시장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집 때문에··· 금강 하구둑 넘어서 산소 가는 쪽으로 철새도래지 가는 길 있지··· 그쪽에 14평 아파트가 하나 나왔다고 해서 가봤는데, 지금 사는 곳보다 깨끗하고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서 계약을 하려고 하는데, 자기는 어떻게 생각해요?”월말 부부로 지낼 것을 먼저 제의하긴 했지만, 혼자서 10개월째 밥을 해먹으며 기다리던 소식인데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어떤 집이든 좋으니 알아서 하라고 했지요. 아직 시간이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이사 준비를 하라는 말이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운하고 허전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지금 사는 집이 재건축에 들어간 25년 가까이 된 13평짜리 주공아파트이지만 정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주변의 자연환경이 웬만한 고급 아파트보다 좋거든요.
그래도 아내와 함께 산다고 생각하니 흥분이 되었습니다. 장보기를 마치면 냉면을 먹으려고 했는데 맛이 두 배로 오를 것 같더라고요. 마음을 정리하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카메라와 지갑을 챙겨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지갑이 두둑하면 발걸음이 가볍고, 지갑이 가벼우면 발걸음이 무거운 걸 보면, 지갑과 발걸음은 반비례하는 모양입니다. 지갑도 두툼하겠다, 발걸음도 가볍고, 오랜만에 먹을 비빔냉면을 생각하니 콧노래가 나왔습니다.
마침 장날이라 근처 길가에도 생기가 돌았습니다. 4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길가에서 쑥을 다듬는데 손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습니다. 봄기운을 느끼게 하는 싱그러운 풍경을 놓칠 수 없어 허락을 받고 카메라에 담았지요.
정육점이 손님들로 북적이기에 “항상 바쁘시네요” 했더니, “오늘이 3월 3일 삼겹살 먹는 날 아입니꺼” 하더라고요. ‘빼빼로 데이’는 들어봤지만 ‘삼겹살 먹는 날’은 처음 알았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마케팅인데 누가 개발했는지 기발하다는 생각과 함께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오늘도 쇠고기와 멸치조림, 콩자반을 사고 찹쌀떡과 굴 무침 앞에서는 몇 번 망설이다 다음으로 미루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렇게 아끼고 절약하다보면 몇만 원씩 남는 달도 있는데 그때는 부자가 된 기분입니다.
장보기를 마치고 냉면집에서 비빔냉면을 먹는데, 반가운 소식이 더해져서 그런지 맛이 그만이더라고요. 사진을 찍으니까 아저씨가 놀라면서 다가오더니 “손님! 냉면에 뭐가 들어갔서예?” 하고 묻더라고요. 해서 맛이 좋아 자랑하려고 한다며 웃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하는 표정으로 돌아가더군요.
하루 생활비가 7천 원이면서 6천 원 하는 냉면을 먹는 과다지출을 했으니 앞으로 사흘은 지갑을 건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사를 앞둔 이달에는 무리해서라도 비빔냉면은 물론 ‘자장면 먹는 날’도 ‘잡채밥 먹는 날’도 두 번으로 늘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낙동강을 끼고 걸어오는데, 을숙도 쪽으로 넘어가려는 해가 구름 속으로 숨으려는 순간을 놓칠 수 없었습니다. 어지러운 도시 풍경이지만 실루엣으로 처리해서 그런지 차분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아 올립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보이(http://www.newsboy.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