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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역 할아버지’에 대한 집착이 옅어지신 게 분명해 보였다. ‘백운역 할아버지’는 일어나 걷고 싶은 어머니의 깊은 서원이 상징화된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이 확실했다. 감기 몸살이 나서 콧물이 흐른다고 콧구멍을 탓할 수 없듯이 수십 년 전에 돌아가신 구두 수선쟁이 ‘백운역 할아버지’가 난데없이 서울 여동생네 뒷집에 침쟁이가 되어 나타나셨다는 어머니의 주장을 판단력과 기억력의 잘못으로 문제 삼을 일이 아닌 것이다.

 

판단력과 기억력 이전에 원 뿌리는 걷고 싶다는데 있었다. 남들처럼 벌떡 서서 걸어 보고 싶은 것이다. 걷지 못한다는 이유로 갇혀 살기 싫다는 것이고, 바깥구경 좀 하자는 것이다. 걷고 싶은 것뿐이었는데 오줌싸개가 되어야 했고, 집안의 천덕꾸러기가 되어야 했다. 아무도 어머니 하시는 얘기를 귀담아듣는 이가 없다는데서 증세는 악화되어 갔던 것이다. 이것을 어찌 어머니 탓이라 하겠는가.

 

나는 어머니 손을 떼어 놓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 없잖아요. 잠깐 올라가서 찾아보고 올게요”

 

어머니의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뒤로 하고 당당하고 부지런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전자 서비스센터는 밝고 깨끗했다. 번쩍거리는 전자제품들이 화려한 조명 밑에서 고객들의 시선 아래로 발가벗은 몸체를 뒤채고 있었다. 상냥한 점원이 뭐가 필요하시냐고 물었다. 내 몸을 어머니 눈 밖에 숨길 시간이 필요했다. ‘백운역 할아버지’로 상징화된 한 서린 어머니의 비원이 소멸되도록 기도 할 공간이 필요했다.

 

내가 가는 발자국마다 빗물이 흘러내렸다. 바지는 물론 윗도리까지 젖어 있었다. 고객 대기용 의자에 앉아 신문을 펼쳤다. 피로가 몰려왔다. 기대기라도 하면 잠이 들것 같아 일어섰다. 종종걸음으로 트럭에 돌아왔다.

 

어머니는 백운역 할아버지가 노인정에 있던지는 묻지도 않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셨다.

 

“백운역 할아버지가 종일 여기 노인정에서 놀다가 얼마 전에 저 아래쪽에 있는 식당에 가셨대요. 어머니 멀지 않으니까 가 봐요.”

“됐다. 멀쩡한 노인네가 한 군데 가만히 있것나. 가자. 인자 집으로 가자.”

“한 군데만 가보고요.”

“있으면 뭐 하노. 저 바빠서 나돌아 댕기는 사람 만나믄 뭐 하노. 우리는 그냥 가자.”

 

나는 차를 몰고 모래내 시장 쪽 식당가로 갔다. 트럭에 앉은 어머니가 잘 보이는 곳의 식당들을 골라 두세 군데를 돌았다. 어머니 눈초리가 내 뒤 꼭지를 따라다니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조짐 같은 게 왔다.

 

석양 석양 빛 받으며 하루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
석양석양 빛 받으며 하루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 ⓒ 전희식

 

‘백운역 할아버지’ 망령이 완전히 사라지는 조짐이었다. 종일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죽을 둥 살 둥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자식이 있어 더 이상 백운역 할아버지는 필요 없었다. 아침부터 빗속을 뚫고 서울까지 와서 이곳저곳으로 ‘백운역 할아버지’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아들이 있어 어머니의 맺힌 한 덩어리가 절로 녹아내린 것이다.

 

장계 집으로 차 머리를 돌렸을 때는 하늘이 걷히고 석양의 온화한 햇살이 젖은 산천을 비추고 있었다. 어머니 마음은 자동차 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 가셨다.

 

“집에 있는 달구 새끼들 모시도 안 줘서 이것들이 배고푸겠네.”

“마당에 널린 게 먹을 것들인데 뭐가 걱정이에요.”

“주인이 있고 없고가 집 짐승들한테는 그기 아인기라.”

“백운역 할아버지 못 만나서 영 섭섭하네요.”

“찾아 가도 없는 걸 오짜노. 우리도 할 만큼 했다 아이가. 됐다.”

“인제 비도 안 오고 날이 드네요.”

“해 넘어갈 때 하늘이 빨갛게 되면 가문다는기라. 인자 비 안 올끼구마.”

 

어머니 말씀처럼 비가 그쳤으면 싶은 만큼 어머니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앉은 ‘백운역 할아버지’가 오늘 소낙비에 다 씻겨 나갔으면 싶었다. 실제 이후로 어머니 입에서 ‘백운역 할아버지’가 싹 사라져 버렸고 이걸로 상징되는 한풀이식 고집 세우기는 2008년 1월 말경에 한번 나타났었다. (44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국농어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치매 어머니와 함께한 자연치유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달고 <똥꽃>이라는 책이 그물코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치매#똥꽃#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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