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을 벗어나 국도 2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길 옆에 동화사라는 작은 표지판이 보인다. 사계절삼거리에서 구룡방향으로 내려서면 동화사 6㎞를 안내하고 있다. 낙안으로 가는 길을 따라 몇 개의 마을을 지나니 개운산동화사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상당히 큰 저수지를 바라보면서 올라가니 늙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너머로 반듯한 산사가 눈에 들어온다. 동화사를 찾은 것은 잘 생긴 삼층석탑이 있다고 해서 찾아들었다. 당연히 산에도 가야 하고.
상륜부를 고스란히 간직한 삼층석탑
낮은 담장 너머로 절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인다. 담장 일부가 열려 있어 굳이 문을 찾아 들어갈 필요가 없겠지만 그래도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절로 들어가는 문에는 개운산동화사(開雲山桐華寺)라고 흘려 쓴 현판을 달았다. 원래는 천왕문(天王門)이었을 건데 사천왕상은 없고 북(鼓)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지키고 있다.
마당 한가운데 삼층석탑이 중심을 잡고 있다. 삼층석탑(보물 제831호)을 보자마자 상륜부가 눈에 들어온다. 돌이끼를 두껍게 입은 채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이름도 어려운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등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탑신부도 옥개석 귀퉁이가 한두 군데 떨어져 나갔을 뿐 온전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아쉽게도 하얗게 빛나는 석재를 사용했더라면 더욱 아름다웠을 텐데, 거무스레한 탑돌은 아름다움을 덜어내고 있다.
왜 개운산동화사라고 했을까?개운산동화사(開雲山桐華寺)는 고려시대 초기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창건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대각국사가 지방을 남유(南遊)하다가 낙주(樂州, 현. 낙안)에 이르러 동쪽에 상서로운 구름이 낀 것을 보고 그 산의 이름을 ‘개운(開雲)’이라 하고, 그곳에 대가람을 조영하였다.
그곳의 지형이 오동봉서형(五桐鳳捿形)으로 봉황은 오동나무에 깃든다고 하여 ‘동화사(桐華寺)’라 이름 지었고, 그 후 오동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조선 선조 때 정유재란에 화를 입었으나, 여러 차례 중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멋스러운 불단이 눈길을 사로잡다절의 구조는 중앙에 대웅전이 있고 왼쪽에 삼성각, 오른쪽에 지장전, 양 아래로 요사채가 자리를 잡고 있다. 절 규모는 크지 않지만 아주 안정적으로 배치를 해서 들어서면 편안한 마음이 들게 한다.
평평한 곳에 낮은 기단을 쌓고 세운 대웅전(大雄殿,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은 조선중기에 만들어진 건물이다. 기둥을 높게 세웠으며, 팔작지붕에 활주를 대서 웅장하게 보인다. 안으로 들어서니 한눈에 들어오는 게 있다. 부처님을 모신 불단(佛壇)이다. 일정하게 면을 나누고 꽃과 동물들을 아름답게 조각해 놓았다. 채색도 적당히 바래서 보는 순간 오랫동안 옆에 있었던 듯 친근하게 다가온다. 한동안 넋을 놓고 감상을 했다.
부처님 후면으로 돌아 들어가니 후면 벽화가 있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관음보살이 부드러운 손을 내민다. 아쉽게도 벽화는 오랜 세월 앞에 살점을 여기저기 떼어냈다. 어둡고 좁은 공간은 관음보살과 눈을 마주칠 기회를 주지 않고 올려다보게만 만든다.
대웅전 뒤에는 오래된 동백숲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간간히 핀 동백꽃이 커다란 나무 속에서 알알이 붉은빛을 자랑하고 있다. 삼성각 옆으로 큰 터가 있다. 예전에 큰 절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물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하다.
초라한 부도탑에 마음을 주고삼층석탑을 한 번 더 돌아보고 나오려니, 천왕문 뒷면에는 봉황루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들어설 때는 천왕문, 나올 때는 봉황루(鳳凰樓)가 된다. 봉황이 쉬어가라고 천왕문을 치워 놓았을까?
그 옆으로 들어올 때부터 눈길을 끌던 부도탑이 3기 서 있다. 안내판은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는가 보다. 하지만 쉽게 만들지 않았음직한 잘 생긴 부도다.
옥개석이 급격히 경사를 주어 안정감이 떨어진 느낌이 들지만 아주 잘 만들어졌다. 가운데 작은 부도탑은 제짝도 잃어버리고 지붕돌도 깨져 험난한 여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기왓골을 파고 처마를 만들었던 기교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더욱 정감이 간다. 남은 하나는 최근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노래가 절로 나오는 고갯길절을 나와 등산로를 찾는 데 안내판이 없다.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조금 올라가니 집이 몇 채 있고 ‘제석산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안도의 한숨을 쉰다. 산에 갈 때 길을 잘못 들어 되돌아 올 때면 힘이 빠진다. 오늘은 제대로 찾아간다. 흑염소 목장을 지나 임도로 이어진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갔다. 그렇게 올라가다보니 낙안쪽에서 올라온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와 다시 만난다.
포장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임도는 산비탈을 따라 부드럽게 돌아간다. 흙길이 부드럽게 밟힌다. 절로 노랫가락이 나온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진도아리랑 장단에 걷는 길이 흥이 겹다. 청산도가 아니어도 소리길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40분 정도 걸어 올라왔을까? 얼마 전에 만들어 놓았는지 나무 탁자와 의자가 있다. 배낭을 내려놓고 보온병에 담아온 따끈한 커피를 한 잔 했다. 감칠맛이 나면서 커피향이 오래도록 입안을 즐겁게 한다. 가져온 빵으로 점심을 먹었다.
제석산(帝釋山) 붙는 불은임도가 끝나는 곳에서는 키 작은 잡풀만 무성한 민둥산이다. 오래 전에 산불이 나서 민둥산이 되었다고 한다. 예전에 송골매가 불렀던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라는 노래가 나온다.
‘돌아서면 무심타’고 하는 말이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으랴.제석산(帝釋山)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의무덤엣 풀이라도 태웠으면! <김소월>소월의 시에 나오는 제석산은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산이지만 우연의 일치인지 자꾸만 노래구절이 되새겨진다.
소설 속의 아픔이 되살아나는 듯제석산(帝釋山, 563.3m) 정상에 섰다. 정상표지석에는 산이름이 불경에 나오는 제석천왕(帝釋天王)에서 유래했다는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북으로는 산능선을 따라 금전산과 조계산이 이어지고 있다. 남으로는 순천만으로 이어지는 벌교 앞바다가 보인다.
바로 아래는 네모네모로 반듯하게 구획된 낙안벌이 보이다. 소설 <태백산맥>이 생각난다. 염상진이 부상당한 안창민과 자애병원을 탈출하면서 저 훤한 들판을 지나지 않으려고 제석산을 타고 넘어 조계산으로 달아났다. 목숨을 걸고 숲길을 헤쳐 나갔을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
정상에서 능선을 타고 조금 내려가면 전망이 좋은 신선대가 있다. 신선대 꼭대기에 있는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벌교 읍내가 반쯤 가려 보인다. 소설 속 주무대인 철교, 소화다리, 북국민학교 그리고 중도벌판과 중도방죽이 보인다.
소설 속에서 덕순이와 광조는 며칠째 앓아누운 엄마의 입맛을 되찾아주기 위해 참게를 잡으러 가는 길에 중도방죽을 걸어간다.
‘똑 엄니 한숨맹키로 질다’ 광조가 불쑥 말했다. ‘머시가?’ 덕순이가 동생을 쳐다보았다.‘방죽 말이여.’ ‘방죽이 엄니 한숨 맹키로 길어?’덕순이는 의아해 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방죽 길은 끝없이 뻗쳐 있었다. - 소설 <태백산맥>에서
덧붙이는 글 | 제석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군데가 있으며, 동화사에서는 정상넘어 신선대까지 2시간 반정도면 갔다가 돌아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