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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일장갑 먼지를 많이 뒤집어쓴 책을 닦고 손질하고 다듬어 놓으면서 끼는 일장갑.
아저씨 일장갑먼지를 많이 뒤집어쓴 책을 닦고 손질하고 다듬어 놓으면서 끼는 일장갑. ⓒ 최종규

 (1) 젊은 사람

동네 일로 바빠서 인천 밖으로 거의 못 나가고 있습니다. 집 앞에 있는 헌책방에 느긋하게 찾아가서 한갓지게 책을 즐길 짬마저 없습니다. 인천시에서 우리 사는 동네를 삽날로 구석구석 파제끼고 무너뜨리려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여러 사람이 힘을 기울이고 있으나, 거의 모두 어르신들입니다. 소식지를 엮는다든지, 사진을 찍어서 자료로 둔다든지, 무엇무엇 준비하고 마련하는 데에서 일을 거들어 주는 젊은이가 없습니다.

‘이 동네에는 젊은 사람이 없는가?’하고 생각해 보면, 꼭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동네 젊은이는 새벽바람으로 전철을 타고 서울로 일하러 가거나 공부하러 떠납니다. 밤늦게나 되어야 비로소 고단함에 쩐 몸으로 다시 전철을 타고, 또는 삼화고속을 타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동네에 일자리를 얻어서 뿌리내리는 이들이 있기는 하나, 웬만한 젊은이는 어찌어찌 해서든 서울 쪽으로 들어가려고 아우성입니다. 쪽방을 얻건 반지하나 지하집을 얻건 옥탑집을 얻건, 인천에 머물기보다는 서울로 가려고 발버둥입니다.

서울로 가야만 빛을 볼 수 있는지 모를 일이고, 서울에서 움직여야 무언가 이름을 얻고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따지고 보면, 서울 집값이나 가게삯은 인천과 견주어 몹시 비쌉니다. 높은 집값이나 가게삯이라 함은, 그만한 돈을 치르고 그곳에 머물러 있어도 ‘그 집값이나 가게삯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함이라고 느낍니다. 한 달에 천만 원 매출이 될 수 있으니 300만원 달삯을 치르고도 서울에 가게를 열 테지요. 한 달에 200~300원 매출이라 한다면, 달삯 50만원도 버겁지 않겠습니까.

안쪽 책시렁 자리 안쪽에 있는 작은 방. 이곳에는 외국책, 사진책, 일본책 들이 촘촘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작은 걸상에 앉아서 이런저런 책을 살피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잊게 됩니다.
안쪽 책시렁 자리안쪽에 있는 작은 방. 이곳에는 외국책, 사진책, 일본책 들이 촘촘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작은 걸상에 앉아서 이런저런 책을 살피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잊게 됩니다. ⓒ 최종규

 (2)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는 책

일에 묻히고 치이는 가운데, 이러다가 그예 뻗어버리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슬그머니 일구덩이에서 빠져나와 전철을 탑니다. 잠깐이나마 책마실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덜커덩덜커덩 달리는 전철에 앉아서 책을 펼칩니다. 잠깐 떠나 있는다고 동네 일에서 홀가분할 수 없습니다만, 이렇게나마 숨을 돌리고 쉬어 주어야 다시 일손을 잡을 수 있겠지요. 노량진역에서 내립니다. 낮에도 북적대는 사람들 틈을 헤집으며 걷습니다. 참 사람이 많군요. 노량진에서 낮부터 북적대는 사람은 이곳 학원골목에서 시험공부를 하는 사람인가요.

지하철 공사를 한다며 여러 해 앞서부터 파헤쳐져 있는 길은 거님길을 잡아먹습니다. 찻길 한켠으로 조그맣게 틈을 내어서 그리로 다니도록 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차들이 오가며 내뿜는 배기가스와 지하철 공사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먼지 … 시끄러운 소리 … 귀가 아프고 눈이 아프고 코가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한동안 숨을 참고 지나갑니다. 공사터를 다 지나간 뒤 헉헉대면서 숨을 들이쉽니다. 책방 앞에 섭니다. 사진기를 꺼내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아니, 오랜만에 왔어?” “네, 어찌어찌하다 보니 그러네요. 늦었지만, 올해에도 복 많이 받으셔요.”

안부인사 몇 마디를 나눈 뒤 책시렁을 죽 둘러봅니다. 이, 얼마만인가. 반가운 책시렁들, 반가운 책탑들, 반가운 난로와 사다리와 끈으로 묶인 책덩이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뜹니다. 히, 후,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쉽니다. 차근차근 이 책 저 책 집어듭니다. 주머니에 있는 돈을 헤아리면서, 오늘은 꼭 사들일 책만 사자고 되뇌어 봅니다.

책들 언제나 깔끔하게 손질해 놓고 있는 <책방 진호> 책들을 보면, 책에 담긴 이야기를 읽어내거나 곰삭여내는 일뿐 아니라, 책 하나를 간수하는 매무새에도 깊이 마음을 기울여야 함을 느낍니다.
책들언제나 깔끔하게 손질해 놓고 있는 <책방 진호> 책들을 보면, 책에 담긴 이야기를 읽어내거나 곰삭여내는 일뿐 아니라, 책 하나를 간수하는 매무새에도 깊이 마음을 기울여야 함을 느낍니다. ⓒ 최종규
<이향숙-휴식>(관훈기획,2002)이라는 사진책이 눈에 뜨입니다. 조그마한 사진책. 그런데. 그러한데 사진들은 좀 …. 영 내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자리에 내려놓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집어듭니다. 나한테는 내키지 않더라도, 사진책 도서관이랍시고 열어 놓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다른 누군가한테는 남다른 느낌을 선사할지 모르니 다시 살펴보아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면서.

.. 사진을 찍을 땐, 잘 찍겠다는 생각보다 그 대상을 사랑하고 소중히 대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땅의 산과 들, 하늘과 바다, 우리 주변의 이웃들, 이름모를 풀 한 포기, 어느 것 하나 사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은 것이 없다. 좋은 사진을 찍겠다는 마음처럼 그 모든 것들을 대할 수 있다면 우리 삶도 더욱 풍성해질 수 있을 텐데 ..  (9쪽)

이번에는 사진 사이사이 손글씨로 적혀 있는 사진쟁이 말을 들여다봅니다. 한 마디 읽고 두 마디 읽고 세 마디 읽고, 끝까지 다 읽어냅니다.

.. 다만 우리는 렌즈를 잘 닦아 주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사랑의 마음으로 파인더를 들여다보면 거기, 따스한 햇살과 포근한 하늘 아래 내 조용한 반란이 꿈틀대고 있다 ..  (82쪽)

책끝에 실린 사진쟁이 발자국을 보니, 이분 이향숙 님은 ‘성우’입니다. 성우라. 그렇구나, 성우.

<엉뚱한 철학자의 수다>(앤소니 드 멜로/김현천 옮김, 알짬,1992)라는 책이 보입니다. 지난 한때, 앤소니 드 멜로 님 책이 봇물 터지듯 여러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요사이는 거의 숨죽이고 있지만.

..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피해자를 둘러싸고 있어서 그것을 취재하려는 한 신문기자가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문득 묘책을 떠올린 그 기자가 외쳤다. “비켜 주세요, 전 희생자의 아버지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비켜 주었고, 그는 사고를 당한 바로 그 앞까지 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그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은 당나귀가 아니겠는가! ..  (25쪽)

겨울나무 앞 잎이 모두 떨어진 겨울나무 앞 헌책방. 이제 봄이 다가왔으니, 책방 앞 나무에도 잎이 주렁주렁 달리며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줄 테지요.
겨울나무 앞잎이 모두 떨어진 겨울나무 앞 헌책방. 이제 봄이 다가왔으니, 책방 앞 나무에도 잎이 주렁주렁 달리며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줄 테지요. ⓒ 최종규
앤소니 드 멜로 님은 짤막한 우화로 사람들 마음을 움직입니다.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펼치고, 쉽게 알아들어 깨닫고는 자기 마음을 고쳐서 세상을 아름다이 부대낄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日本古書通信社’라는 곳에서 펴내는 소식지 <日本 古書通信> 67권 1호(모두 870호,평성14년)가 보입니다. 한 달에 한 번 펴낸다고 하는데 870호까지 냈다니. 예전에는 좀더 자주 나오기도 했구나 싶습니다. 그나저나 67권이면, 이 소식지를 낸 역사가 예순일곱 해. 책 역사와 책 문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새삼 돌아보게 됩니다.

<Edward Landon-Picture framing>(American artist group,1945)은 사진틀이나 그림틀 만드는 법을 일러 주는 이야기책입니다. 사진과 그림을 넣어서 집에서 손수 틀 하나 짜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림책 <시本幸造(그림)/神澤利子(글)-おべんとうを たべたのは だあれ>(ひさかたチャイルド,1983)를 봅니다.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도시락 하나 들고 산속으로 나들이를 나와서 딸기를 따서 먹습니다. 그렇게 숲에 들어가서 놀고 있는 동안 도시락은 그루터기에 올려놓습니다. 이러는 사이 큰곰이 몰래 다가와 도시락을 냠냠짭짭 해 버렸고 계집아이는 엉엉 웁니다. 그러자 큰곰이 머쓱해하는 얼굴로 돌아와 딸기를 두 손 가득 선물로 주고는 뒷통수를 긁적이며 숲속 깊숙이 들어갑니다. 계집아이는 바구니가 넘치도록 담긴 딸기를 들고 집으로 내려옵니다.

 (3) 마지막에 한 권 더

어느덧 책 구경을 마치고 돌아갈 때가 됩니다. 책값을 셈하려고 아저씨한테 책을 건넵니다. 자리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던 '책방 진호' 아저씨는 제가 건네는 책을 받아서 하나하나 살핍니다. 이동안 사진 몇 장 찍으려고 책방을 다시 한 번 둘러봅니다. 낯익은 이름이 찍힌 책 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아름다운 전쟁>(최홍이, 말과창조사,2005). 최홍이 님은 지난 1999년에 <평교사는 아름답다>라는 이야기책 하나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때 그 책을 즐겁게 읽고 느낌글도 한 번 끄적인 적 있습니다. 2005년에도 책을 하나 내셨군요.

.. 교단에서 정년으로 조용히 물러나려던 내가 교사들의 부름을 물리치지 못하고 교육위원이 된 것은 나의 불운이다. 천진난만한 학생들과 수업만 하다 교육위원이 되어 경험한 교육계의 일들, 특히 예산 집행이나 승진, 자리를 둘러싼 지연, 학연 문제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들이 저 청순한 아이들을 가르쳤단 말인가. 그래서, 아이들이 어른 되면 그 역사가 되풀이되나 ..  (19∼20쪽)

최홍이 선생님이 2005년에 낸 책은 소식을 못 들었습니다. 조용히 나왔다가 조용히 사라져 버리는 책이 되고 마는가요. 어쩌면, “정신 나간 공무원들, 외압에 굴복하는 교육감 때문에 교육 혈세가 이렇게 낭비되어도 문책은 없다. 공직자들에게 행정의 책임을 묻지 않아 공무원 하기 좋은 나라다.(199쪽)” 같은 말을 거침없이 쏟아낼 줄 알고, 또 평교사로 있을 때나 교육위원으로 있을 때나 바른길을 꼿꼿이 걸어가는 분 책이라, 오늘날 같은 우리 사회에서는 씨알이 안 먹히거나 두루 읽히기 어려운 책이 되고 마는지요.

“아름다운 전쟁, 최홍이, 음.” 골라놓은 책에 이 한 권을 얹으니 '책방 진호'아저씨가 한 마디 합니다. 그러더니 “이 책 하나는 내가 선물로 주지.” 하고 덧붙입니다. “어, 그러시면 ….”

책읽는 아저씨 틈나는 대로 책 하나 펼쳐놓고 있는 <책방 진호> 아저씨입니다.
책읽는 아저씨틈나는 대로 책 하나 펼쳐놓고 있는 <책방 진호> 아저씨입니다. ⓒ 최종규

책값 치른 책을 가방에 넣고 책방 문을 나섭니다. “오늘도 좋은 책 구경 잘하고 갑니다. 다음에 또 올게요.” 오던 길을 되짚어 노량진역으로 갑니다. 공사터를 또 지나야 합니다. 이번에는 길을 건너기로 합니다. 한참 기다리니 건널목 신호가 바뀝니다. 자동차 오가는 푸른불은 길지만 사람 건너는 푸른불은 짧습니다. 지하철 공사로 잔뜩 파헤쳐지고 어지러운 거님길을 건넙니다. 이쪽이나 건너쪽이나 비슷비슷입니다. 전철역에는 아까나 이제나 사람으로 가득가득입니다. 이렇게 사람들 많은 서울이니 무엇을 해도 어지간하면 장사가 되겠구나.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 무어라도 이렇게 서울에 와서 판을 벌여 보려고 하겠구나.

전철을 탑니다. 책방에서 골라든 책을 꺼내어 읽습니다. 덜커덩덜커덩 소리, 사람들 전화받는 소리, 무리지은 사람들 수다 소리를 한귀로 흘려가면서 책을 읽습니다. 저는 저대로 전철 안 이웃에 무디어지고, 전철 안 다른 사람도 다른 이웃한테 무디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 서울 노량진 〈책방 진호〉 / 02) 815-9363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헌책방+책+우리 말 이야기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헌책방#책방 진호#진호서적#서울#노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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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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