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 해 겨울 한국은 'IMF 사태'를 맞았다. 어른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에 나를 비롯한 또래 친구들은 곧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근심에 사로잡히곤 했다. 언론은 연일 외환위기의 원인을 분석하는 기사들을 내놓았다. 혹자는 '해외여행을 너무 자주 나가서'라고 했고 '수입산 모피코트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렇게 온 사회가 술렁이던 어느 날 아침 조례 시간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떠들고 있는 우리를 향해 교장 선생님은 소리를 질렀다. 산만한 분위기를 다잡으려는 주의치고는 위협의 강도가 너무 셌기에 운동장에는 일순간 침묵이 흘렀다. 그때부터 교장 선생님은 나라가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돌아가는데 너희는 대체 뭘 하고 있느냐고 다그치기 시작했다.
평소 조례 시간을 훌쩍 넘긴 그날 교장 선생님 '말씀'의 요지는 이랬다. IMF 사태를 가져온 장본인은 바로 우리들이다. 나라가 어떻게 돼가는지도 몰랐던 우리가 죄인이다. 참회는 못할망정 그렇게 떠들고 있어서야 되겠냐는 것. 운동장이 숙연해졌다.
그날 국어 선생님은 조례시간 동안 느낀 점을 써서 내도록 했다. 나는 교장 선생님의 '쓴소리'가 해이해진 나를 일깨웠고 참회를 통해 거듭나겠다고 썼다.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친구들이 부끄럽다는 고백과 함께.
조례 시간에 떠든 우리가 IMF 사태 불러왔구나그날의 '훈계'를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것도 같고 눈물이 나올 것도 같다. IMF 외환위기의 원인을 고작 '해이해진 기강' 따위에서 찾는 교장 선생님의 지적 태만함이 안타까워 웃음이 난다면, 아무런 잘못도 없는 우리를 희생양 삼아 그가 정작 변호하고 싶었던 대상이 누구인지 생각하면 울분이 치밀어 오른다.
나는 왜 그날 교장선생님께 따져 묻지 못했을까. 해외여행 한 번 가보지 않은 우리가, 모피코트 한 벌 사 입지 않은 우리가, 정부의 외환 운용 방식에 영향력을 행사한 적도,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을 부추긴 적도 없는 우리가 대체 어떻게 IMF를 불러왔다는 것인지.
생각해 보면 이건 참 음흉한 비판이었던 것 같다. 애먼 사람을 희생양 삼아 정작 비판받아야 할 사람을 은폐시키는.
1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칼럼을 읽으며 그날의 아침 조례가 떠올랐다. 정성희 논설위원은 "'아줌마 코드'로 장관 되겠나"라는 제하의 칼럼에서, 이명박 정부가 여성 장관을 한 명밖에 내지 못한 이유가 '아줌마 코드’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알파걸'이 나올 만큼 '유리 천장'이 없어진 시대에 이명박 정부가 여성 장관을 하나밖에 내놓지 못한 것은 자기 관리에 철저하지 못한 여성계 인사들의 책임이 크고, 몇몇 여성 장관 후보자들이 낙마한 이유는 프로답지 못한 그들의 '아줌마 코드'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칼럼의 전제가 되는 "사회가 전문성과 리더십을 갖춘 '알파걸'의 등장을 환영하고 이끌어주는 분위기"라는 주장은 반박이 여지가 많다. 알파걸의 등장이 곧 알파우먼으로 이어지지 않는 현실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유리천장이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부분은 이것이 아니다.
여성을 매도하는 목소리, 아줌마 코드이 칼럼의 진짜 문제는 두 집단을 희생양 삼아 다른 두 집단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는 점이다. 정성희 논설위원은 여성 집단을 희생양 삼아 제대로 된 인재풀을 가동하지 못한 이명박 정부에 면죄부를 주고 있다.
문제가 된 것은 이명박 정부가 지목한 여성계 인사들 중 몇몇임에도 그것이 마치 여성계 전부의 문제인 듯 호도하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 한 가닥 하는 여성 500여 명을 검증했는데 깨끗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김대중 정부 한 인사의 말을 인용해 자신의 주장이 객관적인 '사실'인양 왜곡하고 있다.
또한, 이 칼럼은 '아줌마'를 희생양 삼아 이명박 정부에서 뽑혔다가 낙마한 고위층 여성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 내가 이 칼럼을 읽으며 가장 화가 났던 부분은 마지막에서 두번째 문단이었다.
"이번에 낙마한 여성장관 후보자들의 문제점을 나는 '아줌마 코드'라고 본다. 여기서 아줌마란 '조직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란 뜻이다. "유방암이 아니라고 해서 남편이 오피스텔을 사줬다"느니 "아는 친지가 권유해 땅을 샀다"는 말은 어쩌면 아줌마 세계에게는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장관의 언행은 동네 찜질방에서의 언행과는 달라야 한다."
일부 고위층 여성들의 부동산 투기가 어떻게 '아줌마 코드'의 문제인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아줌마를 '조직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으로 단정하는가. 정성희 논설위원은 조직생활을 했으니 아줌마가 아니라는 의미인가. 아줌마에 대한 비하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비판 받아야 할 고위층을 두둔하는 교묘한 말장난이런 교묘한 말장난을 통해 이 칼럼은 부동산 투기 자체의 문제에는 눈을 감고 언행을 관리하지 못한 그들의 아마추어리즘만 질책한다. 일부 고위층의 부동산 투기보다 더 나쁜 것이 동네 찜질방 언행을 일삼는 '아줌마 코드'라는 말인가.
내가 아는 대다수의 '아줌마'들은 암이 아니라고 해서 오피스텔을 선물받지 않는다. 땅값이 오른다고 귀띔해 줄 만한 힘있는 친지도, 투기에 사용할 자금도 없다. 일부 고위층 여성(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위층)의 잘못된 행태를 '아줌마 코드'로 몰아가는 것은 비판의 논점을 슬며시 바꿔 정작 비판 받아야 할 사회 고위층들을 두둔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인선한 여성 장관 후보자들의 부정을 '여성계 인사'의 문제로 그리고 다시 '아줌마 코드'의 문제로 몰고 가는 것은 비판에 대한 전형적인 '물타기'다. '이명박 정부가 인선한 여성 장관 후보자'라는 특수한 집단의 문제를 무고한 여성이나 아줌마에게 묻는 것은 IMF 사태의 책임을 중학생들에게 돌린 교장 선생님 만큼이나 황당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