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대지에 자욱하게 번지던 2008년 3월 13일, 경산 경찰서 앞. 고 '쩐타인란'의 어머니 '후안킴아인'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딸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장에 나타났다. 젖은 눈매의 그를 베트남 <여성신문>의 기자 '푸프억행'이 부축했다. 딸을 잃은 그의 두 눈은 동공이 확장되어 있었고 흐느낌은 그치지 않았다. 마디가 불거진 작은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그는 부르짖었다. "누가 내 딸을 죽였나. 내 딸을 돌려 달라. 내 딸은 어디로 갔나." 딸은 '란'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난초 난의 '란(蘭)'. 그는 베트남 호치민시에서 버스로 대여섯 시간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1986년에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홀어머니와 살아온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채소를 팔아 학비를 벌었다. 초등학교 6학년을 중퇴한 후에는 시장에 나가서 떡을 파는 어머니의 일을 도와 생계를 이었다. 가난하게 살았지만, 란은 '사랑스럽고, 밝고, 효심이 깊은 아이'였다. 2007년 8월 17일, 스물 한 살의 란은 결혼중개업체를 통해 한국인 남자와 선을 보았고 이튿날 결혼식을 올렸다. 한국인 남편은 사흘간의 신혼여행을 마친 후 귀국했다. 이듬해인 2008년 1월 11일에 란도 한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지난 2월 6일, 란은 14층 아파트에서 투신해 사망했다. 유서는 없었다. 란의 어머니 '후안킴아인'은 2월 9일에 란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란의 시신을 그대로 보내달라고 했지만 결혼중개업체에서는 절차의 복잡함을 들어 화장을 종용했다. 2월 15일에는 베트남 외교통상부에서 란의 사망과 관련해 협조하겠다는 공문이 왔다. 란의 시신은 그대로 병원에 안치돼 있다고 했다. 란의 어머니는 화장에 동의하는 서류를 2월 19일에 접수했고 2월 23일 택배로 딸의 유골을 받았다. '선물'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열어본 상자 안에 딸의 유해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란의 시신이 화장된 날은 '후안킴아인'이 딸의 사망 소식을 듣기도 전인 2월 8일이었다. 한국으로 떠난 딸이 한 달 만에 석연찮은 과정들을 거쳐서 뼛가루로 돌아온 경위를 어머니는 알아내야 했다. 한국대사관과 외교부를 찾아다니며 진상규명을 호소했다. 그 결과 언론을 통해 베트남 사회에 란의 죽음이 알려졌다. 딸이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한국에 가고자 했을 때, 베트남의 한 사업가가 비행기 표를 끊어주었다. 베트남 <여성신문>의 기자 '푸프억행'도 동행했다.
한국에 와서 사위에게 만나자고 연락했을 때 그는 바쁘다고 했다. 주유소에서 일하는 그는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느라 그동안 일을 제대로 못했다며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이혼에 합의한 란이 쓴 일기에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고향에 내려가 어머니를 만날 수 있으니 행복하다. 그날을 기다리겠다"고 적혀 있었다. 2월 5일에 베트남행 비행기 표까지 끊어둔 딸이 이튿날 아파트 14층에서 스스로 뛰어내렸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3월 8일, 딸의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경산경찰서에 방문한 그는 사위를 만났다. 사위는 란이 죽기 전에 의사소통이 안 돼 힘들어했고 적응을 잘 못했으며 우울증 증세가 있었다고 말했다. 사위는 란의 유해를 화장하기 전, 결혼정보 업체를 통해 유가족의 동의를 구했다고 했지만 후안킴아인에게는 금시초문의 이야기였다. 푸프억행 기자는 한국으로 시집온 이주여성이 갑자기 사망한 경우가 또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집온 지 두 달이 채 안 된 열아홉 살의 베트남 여성 '후안마이'가 남편으로부터 폭행 당해 열여덟 개의 갈비뼈가 부러진 시신으로 발견된 적이 있다고, 그것도 불과 지난 여름이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결혼 이주 여성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지금도 곳곳에서 신음하는 나라가 여기 한국이라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에도 후안킴아인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수저를 들 때에 후안킴아인은 쌀밥을 담은 밥공기 위에 젓가락 한 쌍을 가지런하게 붙여서 올려두었다. 남베트남에서는 사람이 죽고 49일이 되기 전까지 매일 죽은 이를 위해 밥을 지어 올린다고 푸프억행 기자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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