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얘기입니다.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뒤 상쾌한 기분으로 자료 정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안나 아빠!"하고 부르기에 깜짝 놀라 나가보니 아내였습니다. 아내가 차를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항상 안전운전을 빌고 있는지라, 사고가 나서 오지 않았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왼손은 아내의 손목을, 오른손은 아내의 등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러잖아도 어젯밤 꿈에 자기(아내)와 사랑을 나누는 꿈을 꿔서 전화를 해보려고 했는데···"라고 하면서 전화를 하고 오지 그랬느냐니까, "출발하기 전에 전화하려다,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그냥 왔어요"라고 대답하며 어린아이처럼 웃더라고요. 혼자 지내는 방에 아내와 둘이 앉아 있으니, 금방 온기가 돌고 방안이 꽉 찬 것 같았습니다. 오십 대 후반에 다시 시작한 아내의 병원 생활 이야기는 온종일 해도 끝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6월 취직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던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아내는 "지금 몇 시예요?"하고 묻더니 "오늘 날씨도 좋으니 계약해놓은 아파트도 둘러보고, 오랜만에 드라이브도 할 겸 군산에 다녀오면 좋겠는데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횡재나 다름없는 제의인데 어떻게 뿌리칠 수 있겠습니까. '얼씨구나!'하고 따라나섰지요. 어머니를 따라 외갓집에 가는 아이처럼 어떤 옷을 걸쳐야 할지 망설이는데, 아내는 가죽 점퍼를 입으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따라가는 처지에 무엇을 입고 가는 게 대수이겠습니까. 다음날 돌아올 때는 혼자서 버스와 지하철을 6시간 가까이 타야 합니다. 하지만 아내와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며 휴게소에서 커피도 먹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면서 봄이 오는 소리를 감상하는 재미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컴퓨터를 끄고, 전선 코드도 뽑고, 가스도 확인하는 등 대충 집안을 정리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금정산 끝자락의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아파트 단지 주변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습니다. 단지 주변 나뭇가지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합창과 새색시 입술을 연상시키는 빨간 동백이 오랜만에 함께 외출하는 두 사람에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는 것 같았습니다. 고속도로에서 아내가 운전면허를 취득한 지 올해로 7년이 됐고 저는 아예 운전을 못 합니다. 그러니 어디든 항상 아내에게 얹혀서 다니지요. 대신 길눈이 아내보다 밝아 고속주행 단속 표시나 이정표 등을 확인해주면서 조수(도우미) 역할을 열심히 해왔습니다. 낙동대교를 지나 차창을 열었더니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흙냄새와 신선한 공기가 기분을 상쾌하게 했습니다. 춘분을 일주일 앞두고 있어 햇볕이 따사롭긴 했지만, 창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몸을 움츠리게 했습니다. 바람으로 봄을 느끼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더라고요. 멀리 보이는 마을 뒷산에는 겨울한파를 견뎌낸 소나무와 떡갈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야트막한 언덕 농장에는 만개한 매화가 봄을 알리고 있었고, 빗자루처럼 일렬로 잘 정돈된 능선의 나뭇가지들은 한 폭의 동양화를 떠오르게 했습니다. 소풍 나온 아이처럼 즐거워하다, 고개를 살짝 돌렸더니 아내는 앞만 바라보며 운전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운전을 못하니 교대도 할 수 없고.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지 못하는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내의 '양심선언' 봄을 알리는 창밖 풍경을 감상하느라 대화가 잠시 중단되는가 싶더니, 운전을 하던 아내가 갑자기 '양심선언'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 사실은 어젯밤에 왔거든, 이모가 돼가지고 나연이랑 다현이에게 옷 한 벌 제대로 사주지 못했는데, 마음먹고 아이들 옷을 두 벌 사가지고 어머니 있는 집으로 먼저 갔었지··· 사실은 어제 밤에 자기한테 가려고 했는데, 오랜만에 어머니하고 자고 아침에 아파트로 갔던 거예요···." 어제 왔다는 말에, 애틋했던 감정이 실망으로 바뀌면서 얼마나 허전했는지 모릅니다. 미안하기는커녕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 더욱 실망스럽더군요. 입에서 금방 나오는 말을 참으며 "아~ 그래? 어제 왔었구나··· 나는 오늘 왔다고…"하며 고개를 돌렸습니다. 서운해 하는 표정을 보여주기 싫어서였지요. 둘러 보러 갔던 아파트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튿날 오전까지 부동산중개소를 몇 군데 다녔으나 허탕이었습니다. 일이 계속 꼬였지만, 헤어질 때까지 표정 관리 하느라 힘들었습니다. 서운한 마음이 지금도 가시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저 반가워만 했지, 언제 왔느냐고 묻거나 고백하라고 다그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어머니와 함께 자고 왔다고 고백했는지··· 평소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인 것은 알지만, 이만저만 서운한 게 아닙니다. 그나저나 옆에 있어야 티격태격이라도 하지요. 혼자 있으니 먹는 것으로 마음을 달랠 수밖에요. 해서 만두나 쪄먹고 저녁에는 비빔냉면이나 먹으러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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