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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중에서 가장 화려한 학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 미국 작가 퍼트리샤 콘웰이 창조한 케이 스카페타 박사가 아마 그 인물일 것이다. 케이 스카페타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도 17년 동안이나 학교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다.

 

그녀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벽에 도배를 해도 될 만큼 많은 학위와 수료증을 가지고 있다. 세인트 마이클, 코넬, 존스 홉킨스, 조지타운 대학에서 의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전공은 병리학이었고, 부전공은 법의병리학이었다. 로스쿨에서 법학학위를 받았고 변호사 자격증도 함께 가지고 있다.

 

케이 스카페타가 이렇게 공부에 빠져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녀의 집안은 이탈리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스카페타의 할아버지가 미국으로 이주했고, 스카페타는 마이애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스카페타'라는 특이한 성을 가지고 있는 이유도 그녀의 몸 속에는 이탈리아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스카페타가 12살 때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남은 가족은 스카페타와 여동생 도로시, 어머니 뿐이다. 이때부터 스카페타의 어머니와 도로시는 끝없는 싸움을 시작한다. 스카페타는 가족들의 아귀다툼에 넌더리를 내면서 공부 속으로 도피한다. 전쟁터가 되어버린 집을 떠나서 학교와 도서관에 파묻힌 것이다.

 

다행이도 스카페타에게는 공부에 대한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열정도 있었다. 12살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스카페타는 의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이것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의학은 남성들의 영역이었다.

 

의대에서도 로스쿨에서도 여학생의 숫자는 손에 꼽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남학생들은 의도적으로 여학생들을 '왕따'시킨다. 여학생들은 시험에 관한 정보도 제대로 얻지 못하고 남학생들에게 노트필기조차도 빌려보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스카페타는 그래서 더욱 열심히 공부했을지 모른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스카페타의 기나긴 싸움과 인내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학위를 받은 이후에는 법의관으로 활동을 하고 30대 후반의 나이에 버지니아 주의 법의국장으로 임명된다.

 

법의국장 신분으로 사건을 수사하는 스카페타

 

1990년에 발표된 첫 번째 작품 <법의관>에서 스카페타는 40세의 나이로 등장한다. 그때 이미 2년째 법의국장직을 수행해오던 중이었다. 한 번 결혼했지만 결국 이혼했고 자식도 없다. 지금은 혼자 살고 있는 중이며 하나뿐인 조카 루시를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스카페타의 사무실, 법의국이 있는 곳은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 시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에드가 앨런 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다. 버지니아주는 전통적으로 강력범죄가 많은 곳이었다. 뉴욕이나 보스턴 못지않게 수많은 강도와 살인자들이 판을 치고 다니는 곳이다. 법의국장의 일도 그만큼 많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강력범죄가 발생하고 사망자가 생기면 스카페타는 항상 현장으로 달려간다. 법의국장의 신분은 갑작스러운 사망사건, 원인모를 죽음과 폭력에 의한 사망사건에 대한 전면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법의관은 죽음의 원인과 방법을 조사하고 그것을 문서로 기록한다.'

 

법조항에서는 위와 같이 법의관의 임무를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폭넓은 의미다. 법의관에게는 사건을 전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법의관에게 없는 것은 체포권 행사뿐이다. 버지니아 주에서 누군가 사고로 죽거나 자살하거나 살해당하면 그 시신은 법의국으로 들어온다.

 

법의국 건물 부검실에서 스카페타는 부하직원들과 함께 시신을 부검하고 상처를 조사해서 사망한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낸다. 의문사한 시신을 검사하면서 죽은 자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몸통을 Y자 형태로 절개하고 전기톱을 이용해서 두개골을 가른다.

 

뼈에 생긴 상처를 조사하기 위해서 커다란 냄비에 뼈를 넣고 몇시간 동안 삶기도 한다. 당연히 이런 작업은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을 하면서 스카페타는 '오, 하나님!'이라고 탄식할 때도 있다. 죽고나서 자신의 뼈가 냄비 안에서 요리될 거라고 상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런 검사 결과 살인사건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스카페타는 담당 형사와 함께 사건 수사에 뛰어든다. 형사와 함께 범행현장을 조사하고 범행에 사용된 무기를 추적한다. 사망시간을 추정해서 용의자들의 알리바이를 확보하고, 상처의 형태를 분석해서 범행의 동기와 방법을 유추하기도 한다.

 

스카페타의 믿음직한 동료 형사 마리노

 

작품 속에서 스카페타와 함께 사건을 수사하는 사람은 리치먼드 시 강력계 형사 피트 마리노다. 190cm에 육박하는 커다란 키와 거대한 체구를 가진 형사다. 그의 외모와 말투가 워낙 위압적이기 때문에 거리의 건달들은 절대로 그에게 객기 따위는 부리지 않는다.

 

마리노는 쥬저지의 빈민가에서 성장했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광적으로 좋아한다. 결혼을 해서 아들이 있지만 가족과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스카페타가 법의국장에 임명되면서 부터 이 두사람의 인연은 시작된다. 마리노는 처음부터 대놓고 스카페타를 무시하는 언행을 한다.

 

스카페타가 여자라서 싫은 건지 아니면 그냥 스카페타가 싫은 건지는 알 수 없다. 스카페타도 처음에는 마리노를 거부하고 두려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두사람은 강한 동료의식을 갖게 된다.

 

<법의관>에서는 마리노가 스카페타의 목숨을 구해주고, 다섯번째 작품인 <시체농장>에서는 스카페타가 마리노의 생명을 구한다. 스카페타는 조용하고 예민한 반면, 마리노는 거칠고 무례하다.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것만 제외하면 이 두사람 사이에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 가끔씩 티격태격하면서도 스카페타와 마리노는 점점 마음 속 깊이 서로를 믿고 의지하게 된다. 이들이 개인적으로 하는 대화를 듣고 있다보면, 결혼생활을 오래한 부부가 나누는 대화가 연상될 정도이다. 마리노가 인스턴트 식품을 먹으면 스카페타는 마리노의 건강을 걱정한다. 스카페타가 범인에게 협박이라도 받으면 마리노는 권총을 들고 스카페타의 집 거실에서 밤을 지새운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연인의 감정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는다. 마리노는 스카페타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스카페타는 그런 마리노의 감정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스카페타가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 FBI 심리분석관(프로파일러)인 벤턴 웨슬리가 그 인물이다.

 

벤턴 웨슬리는 여러가지 면에서 마리노와는 대조적인 인물이다. 키가 크고 훤칠한 체격의 웨슬리는 항상 깔끔한 양복차림을 하고 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성장했기 때문인지 언제나 침착하고 세련된 예절을 가지고 있다. 웨슬리와 마리노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전문가라는 점일 것이다.

 

범죄심리를 분석하는 프로파일러 벤턴 웨슬리

 

웨슬리도 결혼을 해서 가정을 가지고 있다. 성장한 딸도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스카페타에게 이끌린다. 죄의식과 부담감을 느끼면서 스카페타도 웨슬리에게 애정을 느낀다. 사건이 발생하면 스카페타와 마리노, 웨슬리는 함께 팀을 이루어서 사건을 수사한다. 연인으로 발전하는 스카페타와 웨슬리의 관계는 사건수사에 도움이 될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반면에 언론들에게는 좋은 기삿거리다. 사건수사를 담당하는 핵심인물들이 연인 사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좋은 소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웨슬리와 스카페타는 언론의 공격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법정에서 증언을 하면서도 이런 문제로 추궁받기도 한다. 스카페타는 법의국장에 부임하면서부터 언론과는 그다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언론도 언론이지만, 주변에서는 스카페타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다. 남성의 영역인 법의국장직을 스카페타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은 남성대로 스카페타를 몰아내려고 하고, 여성은 여성대로 성공한 스카페타를 시기하고 질투한다. 스카페타는 해마다 수백구의 시신을 부검하고 사건을 수사하면서, 자신을 음해하려는 세력과도 맞서 싸워야 한다. 그야말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판이다. 

 

스카페타를 돕는 또 한 명의 인물은 바로 그녀의 조카 루시다. 루시는 <법의관>에서 10살의 소녀로 등장한다. 컴퓨터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이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지 정서적으로 약간 삐딱한 소녀다. 스카페타는 루시를 사랑하고, 루시도 스카페타를 엄마처럼 믿고 따른다.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루시도 성장한다. 첫 작품에서는 10살이었지만, 8번째 작품인 <악마의 경전>에서는 FBI 아카데미를 졸업한 23세의 성숙한 여성으로 등장한다. 루시는 스카페타를 닮으려고 하고, 남성들의 세계인 FBI에서 자신의 재능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당연히 루시의 인생도 그다지 평탄하지만은 않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제대로 안풀릴 때면, '나는 왜 이모처럼 될 수 없는 거지?'라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

 

하나뿐인 조카 루시를 사랑하는 스카페타

 

그때마다 스카페타는 다정하게 루시를 위로해준다. 루시와 스카페타는 모두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애정을 받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어린 시절의 기억때문에 이들은 모두 타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자신만의 공간으로 숨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스카페타도 이 사실을 안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루시에게 애정을 느끼는 지도 모른다.

 

이렇게 스카페타와 마리노, 웨슬리, 루시는 함께 힘을 모아서 수많은 사건들을 해결해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스카페타와 마리노의 경력도 쌓이지만 그만큼 살인자들의 범죄도 교묘하고 잔인해진다.

 

버지니아 주를 휩쓰는 살인자들은 대부분 별다른 동기없이 이상심리로 낯선 사람들을 살해하는 연쇄살인범들이다.

 

혼자 사는 여성의 집에 침입해서 강간살인을 하고, 편의점 앞에서 만나는 10대 소년을 죽이고 달아난다. 특정 여성을 스토킹하면서 주변인물들을 살해하는가 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살인행각을 벌이기도 한다.

 

스카페타와 마리노는 그때마다 갖은 고생을 해가면서 범인들을 잡아들인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게 만들기 위해서 열심히 거리를 뛰어다니지만, 범인들을 잡는 것은 마치 <시지푸스의 신화> 같은 일이다. 올려도 올려도 다시 굴러내리는 바위처럼, 잡아도 잡아도 잔혹한 살인자들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 세상은 정말 좋아질 수 있는 것일까?

 

그 속에서 스카페타와 마리노도 조금씩 지쳐갔는지 모른다. 스카페타는 '이젠 이 일이 정말 지겨워요'라고 말한다. 마리노도 '이제 내 길은 끝났소'라고 말한다. 흔들리지 않는 법의국장이고 강철같은 형사이지만, 이들에게도 세월은 그만큼의 영향을 주었던 모양이다.

 

그렇더라도 스카페타는 사건이 발생하면 항상 현장으로 달려간다. 인간의 잔혹함에 치를 떨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자신이 맡은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 억울한 죽음을 맞은 희생자의 권리를 위해서, 그에게 평온한 휴식을 주기 위해서 스카페타는 현장과 부검실을 수도 없이 오간다.

 

스카페타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부검실에서 혼자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살아있는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시신은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정적 속에서 스카페타는 시신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스카페타의 앞에서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겪은 폭력과 자신의 육체에 새겨진 상처의 흔적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역설적이게도 죽은 자는 모든 것을 말해주는 법이다.


소설가의 죽음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2

퍼트리샤 콘웰 지음, 홍성영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2010)


#추리소설#탐정#케이 스카페타#퍼트리샤 콘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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