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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머리에서 바라본 홍제암.
들머리에서 바라본 홍제암. ⓒ 안병기

어린 시절의 영웅 사명대사를 찾아서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어린 내게 영웅으로 각인된 존재들은 누구누구일까. 전봉준과 사명당이 내 의식의 시렁 첫 번째에 놓여 있다. 전봉준은 천상 이야기꾼이셨던 우리 할아버지의 입이 만들어낸 영웅이었고, 사명당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동화책이 만들어낸 영웅이었다. 아, 생각해 보니 "김덕령 장군도 이곳에서 나셨네"라고 끝나는 교가 속 김덕령 장군도 있다.

아무튼 전봉준과 사명대사는 세종대왕보다 이순신 장군보다 더 위대한 영웅이었다. 어디 한 번 생각해 보라. 칼이나 창 같은 도구를 써서 이기는 사람이 영웅인가, 아니면 맨손으로 요술을 부려서 왜적을 넋이 달아나도록 혼쭐나게 하는 사람이 영웅인가.

홍제암 가는 길은 내 어린 시절의 영웅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홍제암은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운 사명당 유정(1544~1610) 스님이 3년간 머물다가 입적한 곳이다. 암자의 창건시기는 알 수 없다. 사명대사의 죽음을 애도한 광해군이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시호를 내려 '홍제암'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홍제암은 용탑선원 아래에 있다. 백용성 스님 부도에서 홍제암까지는 지척이다. 

석종을 다듬어 안장하고 솔도파(窣堵坡)를 세웠다

 홍제암 옆에 있는 부도밭.
홍제암 옆에 있는 부도밭. ⓒ 안병기

  보물 제1301호 사명대사부도와 석장비.
보물 제1301호 사명대사부도와 석장비. ⓒ 안병기

홍제암 입구 왼쪽 부도밭에 먼저 들른다. 가지런히 늘어서 있는 부도와 비를 살핀다. 사명대사석장비에서 좌측으론 예봉당평신선사탑·사명당부도·○파당(坡堂) 부도·계파당 부도가 차례로 배열돼 있다. 왜 석장비와 부도를 나란히 두지 않고 중간에 예봉당평신선사탑을 중간에 끼워 넣었을까. 더구나 어느 부도가 사명당부도인지 설명조차 없는 판이니 말이다.

이곳에 오기 전, 미리 살펴본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파당(坡堂)부도'와 사명대사 부도를 나란히 올려놓고 있었다. 사진으로는 둘 중 어느 쪽이 사명당 부도인지 판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설명을 주의 깊게 읽은 사람만이 비로소 사명대사 부도를 가려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사명대사 부도는 조선 후기를 대표할 수 있는 거대한 종 모양의 부도로, 당당한 형태와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기단은 하나의 돌로 2단을 이루었는데, 아랫단은 사각형이고 윗단은 둥근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그 위에 종 모양의 몸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부도의 꼭대기에는 연꽃 봉오리를 올려 놓았다. - 문화재청 홈페이지 해인사사명대사부도및석장비 설명에서  

해서체로 쓴 사명대사 석장비는 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이다.  광해군 4년(1612년)에 세운 것인데 허균이 비문을 지었다. 일제시대(1943년) 때는 비문의 내용이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하여 합천 경찰서장 다케우라가 석장비를 네 조각으로 깨뜨려 버렸다. 현재의 비는 1958년에 다시 접합하여 세운 것이라 한다.

만신창이가 되었을망정 이렇게라도 남아 있어 오늘날 우리에게 사명당의 일생과 사람 됨됨이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니 그나마 다행이다. 허균이 쓴  이 비문에는 사명당 부도를 조성한 경위도 소상히 서술돼 있다. 

11월 20일에 문도들이 스님의 법구를 모시고 해인사의 서쪽 산기슭에서 화장하니 상서로운 광명이 하늘을 찔렀고, 날아가던 새들도 슬피 울었다. 화장이 끝난 후, 위패를 모시고 갔던 시연(侍輦)의 앞 부분에서 정주일과(頂珠 一顆)를 얻어 석종을 다듬어 안장하고 솔도파(窣堵坡)를 세웠다.

"상서로운 광명이 하늘을 찔렀고, 날아가던 새들도 슬피 울었다"라는 건 위인이 사라지는 현장엔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골 징후 같은 것이다. 특별히 새로울 건 없다. 허균이 약간 뻥이 심하다는 걸 덤으로 알게 된 것 외엔.

사명당 유정 스님의 '귀로난야' 홍제암

 정문인 보긍문과 보물 제1300호 홍제암 인법당(因法堂).
정문인 보긍문과 보물 제1300호 홍제암 인법당(因法堂). ⓒ 안병기

 인법당 왼쪽에 있는 서래당.
인법당 왼쪽에 있는 서래당. ⓒ 안병기

홍제암 인법당은 1614년(광해군 6년) 혜구 스님이 사명대사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영당을 건립한 이래 수차례 개·중수되었다고 한다. 인법당이란 큰 법당이 없는 절에서 중이 거처하는 방에 불상을 모신 집을 말한다. 1770년(영조 46) 해봉이 중건했다고 하며 그 이후에도 수차례 보수한 것이라고 한다. 현 건물은 1979년 10월에 완전 해체 복원한 것이다.

인법당은 H자형 건물이 한 동으로 된 커다란 건물이다. 그러나 사명대사와 관련된 영자각·조사전 등 여러 기능의 공간이 함께 들어 있는 특이한 형태의 건물이다.

건물 중앙부는 법당이 자리 잡고 있다. 아미타부처님을 봉안하고 있으며,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양쪽에서 협시하고 있다. 아미타부처님은 무량수와 무량광을 보장하는 자비로운 부처님으로 서방극락 정토를 주관하는 부처다.

법당 가운데 칸 위에는 "귀로난야(歸老蘭若)"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귀로'는 노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쉬는 것을 말하며 '난야'는 절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야말로 사명대사에게 딱 어울리는 글귀다. 이 글씨는 지관 스님의 글씨라고 한다.

오른쪽 영자각에는 유정·휴정·영규의 상을 모셨다. 처음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셨을 때는 표충사라고 했으나 밀양의 표충사에도 사명대사를 모신 곳이 있다고 하여 이곳을 폐했다. 그러나 밖에 붙은 현판은 여전히 '표충사'라고 돼 있다.

인법당 왼쪽에는 서래당이라고 가로로 기다란 건물이 있다. 서래는 조사서래(祖師西來)의 준말이다. 달마대사가 서쪽인 인도에서 동쪽인 중국으로 온 것을 말한다. 통으로 터진 건물 형태나 전면에 노출된 계자난간으로 봐서 아마도 재가 신도 등을 교육하는데 쓰이는 공간이 아닌가 싶다.

율사와 스님 - 장독과 장맛

 서래당 뒤 자운대율사영각.
서래당 뒤 자운대율사영각. ⓒ 안병기

 석빙고 같이 생긴 굴과 독이 즐비한 장독대.
석빙고 같이 생긴 굴과 독이 즐비한 장독대. ⓒ 안병기

서래당 뒤쪽에는 자운 스님의 진영을 모시는 영각이 있다. 자운 (1911~1992) 스님은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율사이시다. 진영은 한지에 먹선을 그려 채색한 수묵채색화다. 주장자를 들고 있는 모습, 꼭 다문 입, 근엄하고 꼿꼿한 모습을 보면 율사가 천분이었던 분 같다.

영각 옆에는 석빙고와 장독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장맛을 변치 않게 하는 건 장독이다. 들락날락 숨을 쉬게 하는 장독이 없다면 장은 곧장 썩어 버린다. 장독은 장을 가두기도 하지만 장을 장답게 하는 원천이기도 한 것이다. 계율도 그런 것 아닐까. 스님이라는 장맛을 유지시켜주는. 그런 점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율사의 영각 옆에 장독이 있다는 건 매우 절묘한 배치인지 모른다.
 다리 건너 외따로 떨어진 정견각.
다리 건너 외따로 떨어진 정견각. ⓒ 안병기
여기가 홍제암의 끝은 아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가면 거기에도 정견각과 '귀로난야'라는 현판을 단 전각이 있다.

이 건물의 안을 들여다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용도로 쓰는 건물인지 알 수 없다. 어쩐지 사적인 공간일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문을 열어 보지 않았다.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축대 위에 정견각이 있다. 사모지붕 건물이다. '정견(正見)'은 팔정도의 하나로 바른 견해를 뜻한다. 여기서는 산신각 역할을 하고 있는 듯.

전각 안에는 산신탱화를 봉안했다. 산신은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신성시 되어 왔던 호랑이를 의인화한 것이다.

다리를 건너서 인법당 앞마당으로 되돌아온다. 내 어린 날의 영웅 사명대사에게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이다. 이제 영웅을 기다리는 시대는 멀리 갔다. 그들은 벌써 오래 전 하나둘씩 땅으로 끌어내려졌다. 그래도 어릴 적 영웅만은 아직 높은 곳에서 끌어내리고 싶지 않다. 모든 작별에는 의식이 필요한 법, 다시 석장비로 다가가서 그 생채기를 어루만지면서 깨알 같은 글씨를 읽어내린다.

허균과 함께 사명당 유정 스님을 옹호하다

이 "자통홍제존자사명송운대사석장비"를 쓴 허균은 국가가 강적과 대적해 싸우는 전시를 당했기 때문에 " 미혹한 중생의 번뇌를 털어 없애주고, 씻어주는 일을 제대로 할 겨를이 없었다"라고 사명대사의 생애를 안타까워한다. 내킨 김에 허균은 이렇게 사명당을 옹호한다.

스님을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명 스님이 중생으로 하여금 미진(迷津)인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네주는 일을 등한히 하였고, 구구하게 나라를 위하는 일에만 급급하였다고 비판하지만, 그들이 어찌 나라를 침범한 악마를 죽이고, 국난을 구제하는 것이 곧 불교의 한량없는 공덕을 짓는 일인 줄 알 수 있겠는가! 유마거사의 무언(無言)이 바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가는 것이어늘, 어찌 요란스럽게 말로 훈도(訓導)할 필요가 있으랴! 불녕(不侫)이 비록 유가(儒家)에 속하는 무리이지만, 서로 형님 아우라고 호칭하는 친한 사이로 누구보다 스님을 깊이 알고 있다.

*불녕- 재주가 없는 사람이란 뜻으로 자기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

허균이 어디에선가 사명당을 헐뜯는 얘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목소리가 약간 흥분된 어조다.

맞다, 승병을 일으켜 왜와 싸웠을망정 나라고 어찌 수도자로서 수행에 전념하지 못한 회한이 없을손가. 전란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누군가 나 대신 책임을 져 주었더라면, 내 어찌 부휴 선수 스님 같이 수행에 몰두하여 오로지 부처 되기만 꿈꾸며 살 수 없었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그렇기로소니, 내 어찌 중된 자로서 "중생의 번뇌를 씻어 줄 겨를조차 없었노라"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랴.

비록 사명당의 호국의지가 임금의 은혜를 갚으려는 것이었다 해도 그건 사명당이 살던 시대의 한계일 뿐이지, 사명당 개인의 한계는 아니었다. 이땅의 그 누구도 임진왜란의 왜적을 물리치는데 사명당이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슬슬 홍제암을 떠나간다. 내 어린 시절의 영웅이여, 그만 안녕.

덧붙이는 글 | 비문의 해석은 한구금석문 종합영상시스템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가야산 #해인사 #홍제암#경남#합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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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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