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만 보고 오기에는 너무 작은 도시, 그러나...
스톡홀름으로 가던 중에 기차 환승을 위해서는 코펜하겐에서 내려야 했다. 나는 그 도시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 했다. 역에 씌여진 코펜하겐의 덴마크어 표기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알파벳 표기법[København]은 내게 새로운 호기심을 발동시켰다.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을 거칠 때까지는 나도 읽을 수 있는 표기들이었다. 그들과는 또 다른 코펜하겐의 덴마크어 간판이 여행객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아, 여기는 또 외국이구나.'
역무원이 뽑아 준 열차 일정표대로 잠깐 쉬다가 바로 출발할지, 계획을 변경하여 낮에 구경을 하고 당일 야간열차로 계획을 변경하여 출발할지, 하루쯤 더 머무르며 도시 관광을 하고 다음 날 낮 열차로 떠날지 고민을 했다. 그것을 결정하려면 무엇을 볼지 찾아야 했다. 자세한 정보를 위해 '여행자 안내소'로 갔다. 우선 숙소가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일정이 결정된다.
안내소의 팸플릿에서 본 어린이들의 꿈인 동화 '인어공주'나, 어른들의 꿈인 맥주 '칼스버그'는 이미 나도 알고있는 유명한 이름들이었다. 이 두 단어가 만나서 만들어내는 이질감 만큼이나 이 도시는 내게 낯선 인상을 주었다.
북유럽에 들어가는 관문이지만 멋 모르고 내린 이에게는 환승역에 지나지 않는 코펜하겐은 이 곳 하나만 보고 가기에는 너무 작고, 이곳만을 위해서 오기는 아까운 생각이 들 수 있다. '오직 코펜하겐'만을 여행하려는 사람은 '오직 파리'만을 여행하려는 사람에 비해 많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지정학상의 위치가 좋아 교통이 좋고 다른 유명 도시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 들어오려는 사람도 많고 나가려는 사람도 많은 길목이다.
코펜하겐의 여행자 안내소는 복잡했다. 전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앉아서 기다릴 자리가 없었다. 서서 기다릴 자리라도 충분했더라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았다. 심하게 복잡했다. 이들이 전부 나처럼 계획을 변경하러 들어 온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것은 그저 하나의 '환승역'만은 아닌가보다.
한참을 기다리다 지쳐서 잠자리 구하기를 포기했다. 예약 없이 숙박은 어려울 것 같았다. 반나절만 여행하고 야간열차를 타기로 했다. 무작정 걸으며 구경하는 도심 여행이다. 안내소에서 봤던 엄청난 관광객은 코펜하겐이라는 도시의 매력, 그 자체가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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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펜하겐의 '반반'한 도로 자동차 도로 반, 자전거 도로 반인 참 반반한 도로. 차가 소수인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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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갑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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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 동네는 자전거가 왜 이리 많지?'
호기심을 갖고 바라본 이 도시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다른 도시에 비해서 자전거가 많았다. 광장 옆에 세워진 많은 자전거들은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구경거리였다. 평소 자전거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는 어떤 명소에서 본 것보다 장관이었다.
이곳은 중국처럼 사람 많고 자전거 많다고 소문난 곳도 아니다. 그런데 눈으로 봐도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대표적인 부국 덴마크, 그 수도 코펜하겐. 이곳 시민들이 가난해서 자전거를 탈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세히 보니 도로가 자전거 타기 편하게 설계돼 있었다. 역시 괜히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편하니까 많이 타는 거다. 이곳은 비교적 덜 위험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다. 비율도 자동차 도로가 반, 자전거 도로가 반이다. 수도의 도심 한복판에 자전거 도로를 이만큼 많이 낼 수 있는 나라가 얼마나 될까. 이 곳을 이끌어 가는 입법자들의 양심은 칭찬 받을 만하다. 코펜하겐 시민들의 사회적 합의가 이뤄낸 명품도로다.
여행을 하면서 다른 도시에서 부러운 모습을 볼 때면 '왜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지 못 하는가' 생각을 해보게 된다. 우리가 열등하다는 것이 아니다. 타자의 장점을 보고 배우고자 하는 태도로 접근하다보니 그렇다.
서울역 앞과 세종로를 떠올려 본다. 그리고 청계천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숨이 막힌다. 특히 청계천은 안타깝다.
자전거를 위한 청계천은 없다
왕복 10차선이 넘는 도로를 왕복 4차선으로 줄였다. 그런 전폭적인 공간의 재편성이 있을 때도 자전거를 위한 공간은 1cm도 고려되지 않았다. 진입 금지마크 붙일 공간은 제공됐다.
우리의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 낼 수 있는 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서울시의 조례 개정안에 관한 보도를 듣다 보면 서울의 변화는 앞으로도 어려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가물가물한 기억이 돼버렸지만 청계고가를 이용하면 시내 중심가까지 신호등없이 고속으로 접근이 가능했다. 그런 '도심 한복판의 고속도로' 같은 편의를 버리고 많은 시민들이 기꺼이 불편을 함께 감수하고 있다.
많은 선량한 시민들은 조금이나마 보행자를 위한 공간이 늘어난 것과 몇가지 인간을 위한 변화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청계천이 '꽁짜 피트니스 클럽'이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전에 없던 새로운 모습으로 '복원'됐다.
자전거로 한강에서 청계천 쪽으로 진입하다 보면 마장동 앞에서 '딱' 막힌다. 관리요원들이 제지한다. 벽을 느낀다. 그들의 명령 같은 제지에 나를 업고 신나게 달리던 자전거를 내가 업고 화나게 계단을 올라야 한다. 그것을 타려고 나왔지 들려고 나오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청계천과 자전거가 갖고 있던 '교통'으로서의 가능성은 이곳에서 '피트니스'로 제한된다.
자전거를 타고 싶게 만들어라
자전거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코펜하겐 동영상을 보여줬다. '서울이 워낙 커서 만약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자전거 도로 많이 만들면 불편할걸? 끝에서 끝이 너무 멀지않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대답이다. 그 역시 자전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자전거를 타고 서울에서 분당까지 가는 게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걸 몸으로 아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한다.
서울의 빈약한 자전거도로 정책이 자전거를 사랑하고 향후 도심 교통혼잡을 줄여줄 인적 자원인 라이더들의 사고방식마저 제한한다.
화면 속 자전거 이용자들이 모두 자동차를 이용한다고 상상해 봐라. 그것이 곧 현재 서울의 도로 모습이다. 자전거 이용자가 늘어난다면 도심의 교통혼잡도 줄어들고 도로의 효율성도 높아질 것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자동차 운전자 따로 없고, 라이더 따로 없고, 보행자 따로 없다.
자동차 운전이 대단한 특권이던 시대는 갔다. 오늘은 차 운전했다 내일은 자전거 타고 나갈 수 있는 세상이다. 모두 같은 인간이고 다 같이 사는 시민이다. 한 사람이라도 자전거를 더 타면 모두에게 고마울 일이다.
근처에 자전거 대여점이 있었다면 도로를 이용해 보고 싶었다. 안내소에 돌아가 안내를 받고 싶었지만 엄두를 내지 못 했고 직접 찾지 못했다. 이곳은 준비하지 않고 온 여행지다. 후일 기회가 된다면 꼭 미리 준비해서 다시 오리라 다짐했다. 그때는 숙소도 예약하고 자전거도 준비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