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죽일 놈의 기복신앙 원당암은 해인사 맞은 편에 있는 봉우리, 비봉산 중턱에 있다. 산 모양이 봉황이 날아가는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비봉산이다. 처음에는 암자 이름도 봉서사라 불렀다 한다. 그러나 진성여왕 때에 이르러 왕실의 원당(願堂)이 되자, 그때부터 원당암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원당이란 '소원을 빌려고 세운 집'이란 뜻이다. 다른 나라에서 도래한 불교를 기복신앙으로 만드는데 앞장선 것은 왕실이었다. 그리고 불교는 그것을 기꺼이 '호국'이란 이름으로 포장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종교도 자신의 입맛에 맞게 토착화할 줄 아는 포용력을 지녔다. 그러나 '토착화'의 귀결점은 기복신앙이다. 그 옛날 우리 할머니들이 가졌던 삼신 신앙에서 단 몇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종교의 원시성이 나를 우울하게 한다.
하염없이 생각에 걸어가도 될 만큼 원당암 가는 길은 완만하다. 혜암 스님이 읽으시다가 불현듯 출가를 결심했다는 <조사어록> 속 한 구절이 떠오른다.
我有一券經(아유일권경)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不因紙墨成(불인지묵성) 종이 위에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네展開無一字(전개무일자) 펼쳐보면 한 글자도 보이지 않지만常放大光明( 상방대광명) 언제나 내게 큰 빛을 던져주네 길이 점점 고개를 쳐든 독사의 자세로 변해간다. 잡생각 따윈 집어치워. 내게 좀 더 집중하도록. 길에 순응해야 하는 건 걷는 자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원당암 입구 가람 배치도 앞에 닿을 즈음엔 머릿속이 아주 단순해졌다. 길이 나를 씻긴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나온 가파른 고갯길은 원당암의 금강문이었던가.
아름다운 다층 석탑과 석등이 지키는 보광전 뜨락
<삼국사기>는 애장왕 3년(802)에 "가야산에 해인사를 창건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애장왕은 사랑하는 공주의 불치병이 낫자 그것을 부처님의 가호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순응·이정 스님의 발원에 따라 가야산에 해인사를 지은 것이다. 공사 진척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에 적당한 곳이라 판단했던 것인가. 해인사를 짓기 전, 맞바라기 산자락에다 먼저 암자를 지었으니, 그게 바로 이 원당암이다.
통일신라 왕실 원당이라는 지위도 변화무쌍한 세월 앞에선 무상하기 짝이 없는 것. 오랫동안 버려져있다시피 한 암자는 퇴락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1971년에 이르러 혜은 스님이 중건했다. 그리고 근래에 조계종 종정을 지내시다 입적하신 혜암 스님께서 머무시면서 도량의 규모가 크게 바뀌었다. 사람들은 아무도 이런 원당암의 이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이 계셨던 절'일 뿐이다.
암자로 들어서자, 미처 숨돌릴 사이도 없이 주불전인 보광전 마당으로 내닫는다. 보광암 마당엔 다층 석탑과 석등이 나란히 서 있다. 마치 야외에 전시된 공예품을 보는 듯하다. 아름답다는 말보다 예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다층 석탑은 김제 금산사 다층석탑과 마찬가지로 점판암으로 만든 청석탑이다. 화강암으로 된 바닥돌을 3단으로 쌓고 나서 그 위에다 몸돌을 받치는 기단을 올려놓았다. 그러나 현재 몸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지붕만 켜켜이 10층으로 쌓여 있다.
지붕돌들은 벼루의 재료가 되는 점판암이다. 지붕돌의 처마는 귀퉁이 부분이 살짝 위로 들려져 있어 가벼운 상승감을 느끼게 한다. 탑의 꼭대기에는 화강암 재질의 작은 노반(머리장식받침)이 놓여 있고, 그 위에 살짝 복발(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이 얹혀져 있다.
청석탑 옆에는 석등이 있다. 본래부터 석탑과 짝을 이룬 게 아닌가 싶다. 6각형 바닥돌을 놓고나서 그 위에다 아래받침돌과 중간받침돌, 지붕돌을 놓았다. 윗면이 평평한 지붕돌 위에는 원기둥 모양의 돌 하나가 얹혀있다. 아래받침돌과 지붕돌은 점판암이며, 다른 부재는 화강암이다. 아쉽게도 석등의 화사석은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다. 불을 밝히려고 세운 것이 석등이다. 불을 켜 둘 화사석이 없다는 건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이다.
공부하다 죽어라, 그것이 수행자의 복이다
보광전 뒤편 높은 언덕에는 미소굴이 있다. 혜암 스님이 남기신 사리와 유품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계단을 밟으면서 언덕을 올라간다. 문 앞엔 혜암 스님이 쓰신 '微笑窟(미소굴)'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사리는 '정각의 집'이라는 아주 작은 기와집 안에 봉안돼 있다. 벽에 걸린 영정 속 스님의 얼굴이 인자하다.
저 인자함 뒤에는 일일일식·오후불식·장좌불와를 하면서 무려 45안거나 용맹정진하신 결기가 숨어 있다. 출가한 이래 끊임없이 참선수행을 계속함으로써 승가의 사표가 되셨던 스님. 더구나 두 차례의 조계종 분규 때는 단호한 소신과 추상같은 의지로 종단개혁에 앞장섰던 스님이다.
혜암(1920~2001) 스님은 1920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셨다. 27세 때, 해인사로 출가하여 인곡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이듬해(1947)엔 성철·우봉·자운·도우·법전·일도 스님 등과 함께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 결사'에 참가하였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백장가풍을 따라서 하루에 땔 나무를 두 짐씩 해야 하였으며 직접 경작과 탁발도 했다. 자급자족이 원칙이었다.
이후 오대산 상원사 선원· 범어사 금어선원· 안정사 천제굴· 설악산 오세암· 오대산 북대· 통도사 극락암 선원 등을 두루 거치면서 참선 수행에 온 힘을 쏟았다. 1991년 봄부터 이곳 원당암에 안거하시면서 사부대중을 지도하시다가 1999년에 이르러 조계종 제10대 종정으로 추대되셨다. 그리고 2001년 12월31일,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기신 채 적멸의 길로 떠나셨다. 법랍 55세, 세수 82세였다.
我身本非有(아신본비유) 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心亦無所住(심역무소주) 마음 또한 머물 바 없도다鐵牛含月走(철우함원주) 무쇠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石獅大哮吼(석사대효후) 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
미소굴 왼쪽에 서 있는 통나무에는 '공부하다 죽어라'는 스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스님이 남기신 사리보다 더 영롱한 말씀이다.
문 없는 문을 뚫으려면, 죽음을 무릅쓰고 수행에 매달려야 한다. 그러므로 스님의 말씀은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고 적당히 중 노릇이나 하려는 스님들의 어깨를 향해 내리치는 죽비다. 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리치는 한 방의 '할'이다.
행여나 이 쉬운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축생이 있을까봐 스님께선 한껏 톤을 낮춰 덧붙이신다. "공부하다 죽어 버려라. 공부하다 죽는 것이 사는 길이다." 죽을 만큼 공부해 본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토할 수 없는 불 같은 사자후다.
공부하다 죽어라! 더 이상 가르칠 것이 무엇 있는가. 방책만 일러주면 나머지는 자신이 알아서 해결하는 거지.
내가 보기에 혜암 스님께선 참으로 복 받은 분이시다. 당대의 선지식인 효봉·한암·동산·금오·전강·경봉 스님 등을 거치면서 공부하셨으니 말이다. 사실 이 중에 한 분에게서만이라도 공부할 기회를 잡는다면 그 자체로 커다란 행운이다. 미소굴 위에는 또 언덕이 있다. 나무 계단을 밟고서 뒤 언덕으로 올라간다.
언덕 꼭대기에는 전망대 같이 만들어 놓은 자리가 있다. 그곳에 서서 상왕봉 등 가야산 정상의 기암 봉우리들을 바라본다. 봉우리들이 마치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에서 불쑥 떠오르는 저녁 달 같다. 분화구가 아주 많은. 깨침은 전광석화 같이 다가오지만, 깨달음은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다가온다. 내 머릿속에선 한동안 봉우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깨침과 깨달음이 분주히 오간다.
달마선원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혜암 스님께서 생전에 재가불자들에게 참선을 가르치려고 지은 시민선방이다. 스님께선 1996년 가을부터 이곳에 머무르시면서 대중에게 참선을 지도하셨다고 한다.
점심 공양을 하고 돌아오는 길일까. 보살들이 하나둘씩 선방을 향해 올라오고 있다. 단 며칠일지라도 보살들이 참선을 위해 집을 떠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줌마는 강하다! 그러나 절집에 와서 참선수행하는 보살들은 훨씬 더 강하다.
한겨울, 김치광에서 꺼내 먹던 김치맛에 대한 그리움
선방 옆 산자락엔 시누대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응달이라 그런지 이곳엔 아직 눈이 남아 있다. 하얀 눈에 둘러싸인 푸른 숲. 처음에는 차밭인가 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바라보니, 시누대숲이었다. 3월이지만, 아직 물러가지 않은 겨울의 뒷모습. 흰 눈에 갇힌 푸른 빛은 얼마나 희귀한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상쾌해진다.
절 아래로 내려간다. 아주 가파른 길이다. 눈에 덮여 있는 한겨울엔 무척 미끄러웠을 것이다. 살금살금 내려와 후원 맞바라기에 있는 후미진 산자락으로 올라간다. 해인사를 좀 더 잘 바라보기 위해서다. 밭둑에 서서 건너편을 바라보니, 해인사가 눈에 쏙 들어온다.
빈 밭 가운데엔 독들이 묻혀 있다. 아마도 김치독일 것이다. 아무리 김치 냉장고 효능이 좋다지만 이런 독에서 끄집어낸 김치 맛을 결코 따라갈 수 없다. 한겨울, 볏짚으로 만든 움집 형태의 김치광을 들치고 독을 열어 꺼낸 김치맛은 얼마나 맛있었던가. 살짝 얼어 있어 씹으면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맛과 더불어 소리까지도 즐길 수 있는 일석이조의 맛이다. 묵은 김치 맛을 모르고서 어찌 김치의 오묘한 맛을 안다 하겠는가.
문득 고향 생각이 떠오른다. 젊어서 떠올리는 고향은 장소의 개념이다. 그러나 차츰 나이 들면 그것은 장소보다 시간의 개념으로 변한다. 나처럼 수몰된 고향을 가진 사람에겐 더욱 그렇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고향 땅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내 고향은 흘러가버린 시간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나이 어린 시간 속 추억의 맛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절집은 변해가는 세월 속에서 아직도 고향의 냄새를 간직하고 있는 드문 장소이다. 어쩌면 내가 짬짬이 시간을 내서 절집을 만행(萬行)하는 것은 그 잃어버린 냄새를 맡기 위함인지 모른다. 원당암을 등 뒤에 남겨둔 채 터덕터덕 산기슭을 내려간다. 맞은 편 산봉우리 위에 떠 있던 구름도 봉우리를 떠나간다. 저 구름은 해인사를 탐방하러 온 길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