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야록> 근세에는 한성(서울)의 사대부들이 부귀를 누리며 놀기를 좋아하며, 평일에 붓을 가까이 하지 않고 가난한 선비들을 자기 집에 모셔 같이 생활하고 있다가 시험만 다가오면 그들에게 답안지를 쓰도록 하였다. … 한성 이외의 지방 부호들도 이런 관습을 본받아 글자 한 자 읽지 않고도 그들의 시권에 쓰인 답안이 모두 가작(佳作)이었다. 주시관이 설령 공정한 심사를 하더라도 선발된 사람들은 모두 부귀를 누린 자제들이었다. 이에 '공자가 주시관이 되더라도 석숭(石崇 진나라 때 부자)을 장원으로 뽑았을 것이다'라고 한 민요가 유행하였다. - 황현 <매천야록> 제1권
임오(1882)년 6월 초9일, 한성의 영군(營軍 병영의 군사)들은 큰 소란을 피웠다. … 군량이 지급되지 않은 지 반 년이 지난 데다가 호남세선(湖南稅船 호남에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실은 배) 수척이 도착하여, 한성 창고를 열어 군량을 먼저 지급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때 선혜청 당상관 민겸호의 하인이 선혜청(宣惠廳 조선시대 세금으로 거둔 쌀이나 나무를 관리하던 기관) 고지기가 되어 그 군량을 지급하고 있었다. 그는 쌀을 벼 껍질과 바꾸어 그 남은 이익을 챙기자 많은 백성들은 크게 노하여 그를 구타하였다. 민겸호는 그 주동자를 잡아 포도청에 가두고 그들을 곧 죽일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수많은 군중들은 더욱 분함을 참지 못하고 칼을 빼어 땅을 치며, "굶어 죽으나 법으로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차라리 죽일 사람이나 하나 죽여서 원한을 씻겠다"고 하며 서로 고함소리로 호응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 그들은 곧바로 민겸호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순식간에 집을 부수고 평지로 만들었다. 그 집에는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 군중들은 "돈 한 푼이라도 훔치는 자는 모두 죽인다"고 하고 그 보물을 뜰에 모아 놓고 불을 질렀다. 비단과 구슬이 타서 그 불빛은 오색을 띠고 인삼과 녹용과 사향 등의 냄새가 수리까지 풍겼다. 이때 민겸호는 담을 넘어 대궐로 도주하였다. - 황현 <매천야록> 제1권 이때 이토 히로부미가 3백만 원을 가지고 와서 정부에 고루 뇌물을 주어 조약(을사늑약)이 성립되기를 꾀하였다. 이에 제적(諸賊 일제 강점에 앞잡이 노릇한 무리들을 말함)들 중 탐욕이 있는 사람들은 그 돈으로 많은 토지를 마련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편안한 생활을 하였다. 권중현(權重顯 농부대신)같은 사람은 이에 해당하며 이근택(李根澤 군부대신), 박제순(朴齊純 외부대신) 등도 이런 기회로 인하여 졸부가 되었다. - 황현 <매천야록> 제4권 광무9년 을사 그 당시와 지금, 무엇이 다른가? 나는 매천의 유적지를 답사하기 전에 <매천야록>를 들췄다. 한문으로 된 <매천야록>을 한글로 번역한 김준(金濬) 선생은 서문에서 19세 때 이 책을 처음 읽던 감회를 밝혔다.
그때 나는 이 망국사(亡國史)를 한 줄 두 줄 읽어가다가 치밀어 오는 울화를 억누를 수 없어 탁료수배(濁醪數杯 막걸리 여러 잔)를 마시고는 청등벽라(靑藤碧蘿 푸른 등나무와 쑥)가 우거진 뜰을 배회하며 몇 번이나 장탄식을 하곤 하였다. 이 <매천야록>을 읽으면서 일백년 전의 역사가 아니라, 바로 오늘 이즈음의 역사로 착각할 만큼 그때와 지금의 일들과 인물들이 견주어졌다. 편법 탈법으로 졸부가 된 이들이 권력조차 잡고서 이제는 백성들에게 준법을 강조하는 모습이 나라를 팔아 졸부가 된 을사오적의 무리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나는 호남의병 전적지 답사에서 가능한 의병 후손을 만나고 싶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이어지는데, 내 답사기에 지난날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으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나라를 지키려다가 목숨을 바친 그 후손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분들을 만나 가슴속에 깊이 응어리진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내가 조기 퇴직한 소명으로 알고, 굳이 후손을 수소문하여 애써 만나고 있다. 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손이라면, 또는 일제와 총칼로 맞서다가 돌아가신 의병이나 독립군의 후손이라면, 아무리 망나니라도 우리 스스로 우리말 우리글을 업신여기고, 철천지 원수 일본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과도 제대로 받지도 못한 채 일본인도 어리둥절할 정도로 과거를 잊자고 말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마침 나를 도와주는 조경환 의병장 손자 조세현(광복회 특별위원)씨가 매천 선생의 증손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내가 전적지 답사에 앞서 만나 뵙기를 청하자 고령에 신병으로 도저히 응할 수 없다는 답이라, 궁즉통(窮卽通 궁하면 통함)으로, 하는 수 없이 녹천(鹿川 고광순 의병장) 추모제로 안면이 있는 구례군 고근석 부군수에게 도움을 청하자, 언제든지 구례로 오면 매천사를 잘 아는 분을 소개해 주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지리산 화엄계곡에서 홀로 보내는 밤 광양에서 매천 생가와 사당을 둘러본 다음, 매천이 숱한 저서를 쓰시고 순절하신 구례로 가고자 서둘러 광양을 떠났다. 순천을 거쳐 구례에 이르자 오후 6시 30분으로 그새 매우 어두웠다. 시장하여 먼저 밥집으로 가 갈치백반으로 요기를 한 뒤, 숙소에 들고자 여행용 가방을 끌고서는 거리를 헤맸다. 내가 바라는 숙소는 고풍스러운 한옥에 따끈한 온돌방 숙소인데, 그런 숙소는 보이지 않고 한결같이 네온이 요란한 무슨 무슨 외국어 간판을 요란하게 붙인 모텔들이었다. 창평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모텔에서 묵었지만 관광지 구례만큼은 예스러운 한옥 여사도 있을 법한데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기는 안동 하회마을 어귀에도 러브모텔 같은 게 진을 치고 있는 현실 아닌가. 온 나라에 천박한 상술이 판을 치는 마당에 내 바람은 '개발에 편자' 격이리라. 몇 곳을 기웃거리다가 화엄사 들머리에 가면 민박집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스쳐 버스 정류장에서 화엄사 행 마지막 차에 올랐다. 출발할 때는 승객이 네댓이었는데, 종점에 이르자 나 혼자였다. 버스기사가 가르쳐준 민박촌을 바라보자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관광철도 아닌 썰렁한 주중, 늦은 밤중에 민박을 찾는 이가 있으랴. 나는 하는 수 없이 버스 종점에서 가까운 한 산장의 문을 두드렸다. 산장 숙소는 아담하고 깨끔하였다. 지배인은 내 몰골을 훑고는 혼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삼만 원만 내라고 하면서 10년 전 문을 열 때 방값이라고 특별히 많이 깎아준다고 하였다. 방에다 여장을 풀고 몸을 닦았다. 잠을 청하기에는 정신이 맑고 텔레비전을 쳐다보기에는 지리산에서 보내는 밤이 너무 무의미하지 않은가. 지배인이 가르쳐준 전통 찻집에 가 세작을 들고는 화엄사 어귀 언저리를 마구 거닐었다.
산이 잠든 숨소리를 음미하면서 산책을 하는데, 주머니속의 손전화가 울렸다. 받고 보니 워싱턴 근교에 사시는 심재호씨였다. 깜짝 놀라 영문을 물었더니 워싱턴이 아니고 당신은 서울에서 머물고 있는 바, 아버지(심훈) 무덤을 경기도 안성에서 충남 당진 필경사로 이장하고는 출국 전 술 한 잔이 생각나서 인사 겸 전화를 한다고 하였다. 나는 의병 전적지 답사 중이기에 서울로 달려갈 수 없는 처지를 말씀드렸다. 그 분은 북한에다 형을 두고서, 이따금 혈육 간에 전화나 편지로 안부를 서로 묻고 들으며 미국에서 사는 이산가족이다. 정작 내 땅에서는 오고가지도 못하고 전화도 편지도 보낼 수 없다. 캄캄한 지리산 화엄 계곡에 워싱턴에서 만났을 때 심재호씨의 초점 잃은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는 아직 세계 유일의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다. 매천이 살아있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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