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훈한 꽃바람 속에도 매운 꽃샘추위가 아직 남아 있지만, 그래도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꽃잎이 바람에 흩날린다. 바람은 우주의 구성을 동적으로 관찰함으로써 형성된 고대인의 인식에서 하늘의 기운, 나아가 우주의 숨과 기운을 상징한다고 한다.
가장 발 빠른 봄 통신사처럼 움직이는 택시기사 분들신화 속의 제우스 신이 동서남북으로 방향에 따라 그 아들들을 나누어 보냈듯이, 단군신화에서도 환웅이 거느리고 온 여러 신 중에 우사(雨師), 운사(雲師)보다, 풍백(風伯)이 가장 앞서 하늘에서 내려왔듯이, 바람의 아들 중 가장 부드러운 봄 바람이 바다를 건너서 오면서부터 부산에도 꽃들이 일제히 꽃봉오리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 어느 고장보다 부산은 가장 먼저 꽃이 피고, 그 꽃소식이 바람을 타고 북상한다. 부산에서도 가장 먼저 개나리, 벚꽃, 매화 등속이 피는 바닷가의 해운대, 그 해운대의 오산공원에 앞다투어 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이곳은 시민공원이지만, 도로가에 자리하고 있어서, 실제 이곳 주민보다는, 주로 부산 시내 택시 운전수 아저씨들의 쉼터이다.
약달래 반달래/ 이 가지 저가지/ 노가지 향나무/ 진달래 왜철쭉/ 맨드라미 봉선화/ 누루퉁 호박꽃/ 모가지 잘룩 도라지꽃/ 맵시 있다 애기씨꽃/부얼부얼 함박꽃과/절개 있다 연꽃이냐/이꽃 저꽃 다 버리고/ 개나리 네로구나! - '한국민요'
우리의 일상, 생활의 감정 그리고 희로애락도 따지고 보면 세상 바람의 영향을 너무 타는 것이다. 이 세상 소식을 가장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는 택시 기사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정확하다고 가끔 무릎을 칠 때가 많다. 나는 택시 기사 아저씨들이 나누는 대화 듣는 것이 좋아서 자주 이곳을 찾는다.
택시 기사 아저씨들이 자판기 커피 마시며 도란도란 세상 이야기 하는 소리에 기웃기웃 하면서 나도 좀 끼어들고 싶어 눈치만 보는데, 아저씨들 나누는 이야기 그렇게 꽃바람처럼 훈훈하지 않다.
"정말 IMF 바람이 다시 부는 게 확실해. 이렇게 손님이 없어서야… ."
"그러게 말이야. 정말 난 요즘 기름값 맞추기도 어렵네."
"난 어제도 사납금 못 맞추었는데…."
"옛날이 좋았어. 합승시키고 할 때 말이야."
"정말 이렇게 택시 손님이 없으면 어떻게 앞으로 자식들 공부시키고 살겠어?"
봄은 봄인데, 꽃샘 추위가 남아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경제 한파가 남아 있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물가는 턱없이 껑충 뛰었다. 돈의 가치가 점점 떨어져서, 시장보기 두렵다. 택시 기사 아저씨들도 꽃구경을 마음껏 누릴 수 없는 입장이라는 듯, 하나 둘 택시를 몰고 총총히 도로 속으로 사라졌다.
개나리는 겨레꽃, 백성의 꽃 우리의 인생을 일러 바람을 잘 타야 한다고 한다. 바람 한번 잘못 타면, 자취없이 흩어지는 꽃잎 신세보다 서럽다. 이 나지막한 동산의 공원은 그 어떤 바람도 쉬었다가는 휴식터. 노오란 병아리떼처럼 재줄재줄 거리며 노란 개나리 군단이 낮은 산의 어깨에 기대어 다투어 피었다.
그 어떤 시련도 다 이겨낸 우리 겨레의 꽃, 백성의 꽃, 개나리… 이 '개나리'가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형사들이 나타났다는 속어로 통했다고 한다. 언제나 종로 YMCA 강당에는 일본 형사들이 잠복해 있었다고 한다.
그날도 강연회가 있었는데, 사회를 맡은 월남(月南) 이상재 선생께서, 청중 속에 일본 형사들이 앉아 있는 것을 알고, 먼산을 바라보며 '어허 ! 개나리 꽃이 만발했군 !' 하고 말해서 장내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개'는 '일본 형사'를 이르고, 순경은 '나리'를 가리켰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가진, 겨레의 꽃, 백성의 꽃, 나리, 나리 개나리 꽃이, 유달리 벚꽃 가로수 많은 공원 주변 동산에 우리네 삶처럼 피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새들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봄날은 간다'- 백설희 노래
그 아쟁소리의 봄날은 가다이 개나리는 울타리로 많이 사용하는데, 개나리는 회초리로 사용하기 정말 안성맞춤이다. 나는 어릴적 외할머니에게 유독 개나리 회초리를 많이 맞았다. 이 개나리 껍질을 벗겨, 아쟁의 활대로 쓰인다고 한다. 어릴 때는 이도 저도 모르고, 마구 끊어서 윙윙 허공을 때려 울리면 정말 아름다운 소리가 났던 기억이 새삼 난다.
'귀여운 자식은 매 한 대 더 주고 미운 자식은 떡 한 개 더 준다'는 우리의 속담을 덩달아 떠올리게 하는 개나리 만발한 오산공원 앞에 '바르게 살자-바르게 살면 미래가 보인다'는 비석의 말씀 하나 가슴에 품고 돌아선다.
문득 생전 외할머니가 잘 부르시던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니…'라는 노래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하다. 이제는 아무도 내게 회초리를 드는 어른이 안 계시다는 생각에, 이 봄 왠지 슬프다. 개나리 활대 윙윙 봄바람에 우는 소리, 세상을 바르게 살라고 내려치는 회초리 소리 같이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