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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기행 옛 조상들도 생계나 교통을 위해서가 아니라 풍류를 즐기기 위해 산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 산문기행 옛 조상들도 생계나 교통을 위해서가 아니라 풍류를 즐기기 위해 산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 이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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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가볍게 취미로 시작한 등산이었지만 십수 년 열심히 다니다 보니 암벽등반이라는 것도 배웠고, 나아가 등산학교에서 암벽등반 강사까지 맡게 되었다.

창고에는 자일을 비롯해 등반 장비들이 가득하고, 책장에 교양서적은 몇 권 없으면서도 등산 관련 책들은 보는 대로 사들여 칸칸마다 가득 채우고 있으니 나도 이른바 '준산악인'이 되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책장에 꽂혀 있는 등산 관련 서적들은 대부분 히말라야나 알프스 등반 후기, 그나마 그것도 라인홀트 메스너와 같은 외국 유명 등반가들이 쓴 책이다.

나는 왜 에베레스트 등정의 역사는 두루 꿰고 있으면서도 우리 조상들이 백두산, 한라산, 지리산에 올랐을 것이라는 생각을 안 해봤을까?

오늘날 내가 등산을 취미로 삼고 있다고 호기롭게 내세우는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등산이라는 취미가 있었을까? 오르고자 하는 산이 정해지면 그 산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서 구했으며, 등고선 지도까지는 아니라도 대략 방향을 표시하는 정도의 지도는 갖추어야 했을 텐데, 과연 그 시대에 지도가 있었을까?

조선에도 '알피니즘(Alpinism)'이 있었다

산길에서 끼니는 어떻게 해결했으며, 잠은 어디에서 잤을까? 하긴 곰과 호랑이가 있었을 테니 야영은 불가능했겠지? 배낭도 없었던 시절이니 봇짐을 싸서 지고 갔을까? 신발은? 짚신?

사람이라면 누구나 높은 곳에 오르고 싶고,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탄성을 지르게 마련인 법, 인류가 생겨났을 때부터 등산이라는 취미는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선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산행 후기 등을 베껴다 미리 공부를 하기도 하고(전문용어로 'Indoor Climbing'이라고 한다), 개념도 수준의 지도도 갖추고 있었다. 산에서의 숙식은 주로 사찰에서 해결하며 이동했고, 짐 꾸리는 법부터 시작해 산길에서 반드시 봐야 할 지점(View Point)까지 소개하고 있는, 요즘으로 치자면 '등산 길라잡이' 같은 책들도 있었다.

물론 양반 사대부들이 승려를 동원하여 가마를 들게 하고 자신은 부채 하나 들고 앉아서 산행을 했다는 점, 악공이나 기생까지 동원하여 호화로운 산행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점 등 신분사회 특유의 불합리도 많았지만,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생계나 교통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치를 감상하며 풍류를 누리려고, 또는 심신을 쉬게 하고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 즉, '알피니즘'이라는 개념을 분명히 갖고서 산행을 했다는 점이다. 

퇴계, 소백산 정상에서 시 일곱 수 지어...난 무슨 생각하며 산에 올랐나?

나도 산행을 마치면 항상 후기를 공들여 써서 보관해 놓는 편이지만 산행기라는 것이 대부분 산행일정과 코스 설명에 중점을 두고 있는 건조한 기록이다. 그러나 조상들의 산행기는 '유산록'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표면적인 경관 묘사보다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심상의 서술에 주안점을 두고 있어 글 자체가 우아하다.

백두산 입산 전에는 반드시 목욕재계를 하고 산신께 안전산행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는 기록, 퇴계 이황 선생께서 소백산 정상에 이르러 술 석 잔과 시 일곱 수를 지었다는 기록 같은 것들을 보면서 나는 그동안 산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산길에서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돌이켜 보게 됐다.

일정에 쫓겨 땅만 보고 걷지는 않았는지, 눈에 보이는 경치에만 집착하고 아무 생각없이 지나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는 기회가 됐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으며 앞으로의 내 산행기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를 깨닫게 됐다는 점이 가장 큰 소득이다.

1920년대에 어느 영국인과 일본인이 삼각산 인수봉을 등반했다는 기록을 근대적 의미의 '초등정'이라고 본다. 그 이전에도 우리 조상들이 비교적 쉬운 경로로 정상에 올라 다녔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지만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초등정의 영광을 외국인에게 내주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산행기 모음집이니만큼 책 속에서 우리 조상 가운데 누군가가 필사적인 노력 끝에 인수봉에 올랐다는 기록 한 줄만 발견되었더라면 더없이 좋았을 텐데…. 이 땅의 '바위꾼'으로서 느끼는 유일한 아쉬움이다.


산문 기행 - 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

심경호 지음, 이가서(2007)


#책#등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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