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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하. 애하교에서 바라본 호산장성.
애하.애하교에서 바라본 호산장성. ⓒ 이정근


의주를 떠난 세자 일행은 중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압록강 중도(中島)는 아직 조선 땅이다. 이튿날 도르곤과 함께 배에 올랐다. 압록강을 미끄러지는 뱃머리에서 뒤돌아보았다. 조국산천이 점점 멀어진다. 드디어 애자하 하구에 이르렀다.

물빛이 다르다. 압록이 오리 머리를 닮아 암록색이라면 애자하의 물빛은 더 푸르고 차갑게 느껴졌다. 청나라의 발상지 영벽산(影璧山)에서 발원한 애자하는 압록강 샛강과 만나 본류로 흘러들어간다. 일명 삼강이다.

배가 청나라 쪽 강안(江岸)에 닿았다. 소현세자가 배에서 내렸다. 난생처음 밟아보는 청나라 땅이다. 심호흡을 했다. 폐 속을 드나드는 공기는 조선이나 청나라나 똑같았다. 청나라 땅을 밟는 순간 형언하기 어려운 감회가 스치며 등줄기에 전율이 흘렀다.

“지금은 청나라 땅이지만 우리의 조상들이 호령하던 땅이지 않은가?”

대륙을 호령하던 선조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안시성 영웅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 숨이 막혀 오는 것 같았다. 요동 벌판을 휘몰아치던 고구려인들의 말굽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벅찬 감동이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다. 자신이 볼모로 끌려가는 신세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구련성. 오늘날에도 중국 단동에 구령성진이 있다.
구련성.오늘날에도 중국 단동에 구령성진이 있다. ⓒ 이정근

“여기가 청나라 땅이란 말인가?”

청나라 땅에 있는 모래는 조선 땅에 있는 모래보다 더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국(大國)이니까. 허나, 자세히 살펴보니 조선의 모래와 다를 바 없었다.

주변의 산을 휘둘러보았다. 둥그런 모습이 조선의 산보다 더 못생겨 보였다. 산야의 풀과 나무도 그랬다.

청나라에 있는 것은 모두가 엄청 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산천은 다를 바 없는데 조선을 옥죄는 청나라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좌우를 휘둘러보았다. 압록강을 건너온 청나라 군사들이 숙영할 군막을 짓느라 소란스러울 뿐 인가는 보이지 않았다. 군졸들 이외에 백성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괴이했다. 청나라에 들어왔는데 청나라 사람들을 구경할 수 없다니 참으로 이상했다.

구련성에서 하룻밤 묵었다. 구련성은 고구려의 옛 성이다. 평지에 쌓은 성터는 허물어지고 을씨년스러웠다. 바로 눈앞에 박작성이 보였다. 압록강변에 우뚝 솟은 산성이었다. 청나라는 이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바로 강 건너 의주를 감시하고 있었다.

오늘날 중국정부는 고구려의 흔적이 남아있는 구련성은 폐허로 방치한 채 인근에 있는 박작성을 개축하여 호산장성이라 부르며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동북공정의 일환이다. 중국학자들을 동원하여 중국정부가 내세우는 근거는 명나라 명성화 5년(1469년)에 호산장성을 축성했다는 기록이다.

우리나라의 기록은 이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장왕 4년(645년). 10만 대군을 이끌고 몸소 고구려 정벌에 나선 당태종은 침공이 실패한 3년 후, 그러니까 648년. 설만철에게 3만 군사를 주어 박작성을 공격하라 명했다. 병선을 동원하여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간 설만철이 박작성을 공격했다. 성주 소부손이 1만여 명의 병력으로 항전했고 안시성의 고문(高文)장군이 3만여 기를 끌고와 구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호산장성. 애자하 하구에서 바라본 호산장성
호산장성.애자하 하구에서 바라본 호산장성 ⓒ 이정근


동북공정을 준비하던 중국정부는 1990년대 초 박작성을 새롭게 개축하고 호산장성이라 명명했다. 2002년 중국정부는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 호산장성이라 발표하고 청소년들에게 만리장성 순례를 시켰다. 고구려 역사의 치밀한 중국화 책략이다.

청나라 땅을 밟은 세자빈은 만감이 교차했다. 세자빈은 조선 왕실 여인 중에서 최초로 외국 땅을 밟은 여인이었다. 왕실의 공주나 옹주가 혼례를 올리면 사가로 하가(下嫁)하는 경우는 있지만 왕후나 세자빈이 외국에 나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후세의 사가들은 내가 외국 땅을 밟은 최초의 왕실 여인이라고 쓰겠지. 이건 영광이 아니라 치욕이다. 왕실 여인이 외국에 나가는 경우는 없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중한 초청을 받아 당당히 나가고 싶었다. 나는 국모가 예약된 세자빈이지 않는가.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세자 저하와 함께 끌려가고 있다니 참담할 뿐이다.”

구련성에서 하룻밤을 묵은 세자 일행은 심양으로 향하는 청나라 군대와 함께 구련성을 출발했다. 허허벌판이다. 청나라는 압록강에서 책문에 이르는 120 리 구간을 비워놓고 백성들의 주거를 금지했다. 청나라의 발상지 만주를 보호한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전투적인 만주인들이 조선과 연합하여 봉기할까봐 비무장지대를 설정해놓은 것이었다.

금석산에 이르렀다.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니 의주 삼각산이 아스라이 보였다. 고개를 내려가면 이제 조국의 산천이 보이지 않는다. 조국의 강산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 소현은 가슴이 미어져 왔다. 고갯길을 내려가면서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점점 작아지던 삼각산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보이는 것은 만주벌판뿐이다. 가슴이 시렸다.

벽돌집.  중국의 벽돌집
벽돌집. 중국의 벽돌집 ⓒ 이정근

총수에서 하룻밤을 묵은 세자 일행은 심양을 향하여 벌판을 가로질렀다. 지평선이 보이는 허허벌판에 소나무 울타리가 나타났다. 송책(松柵)이다. 가까이 다가가니 문이 하나 있었다. 책문(柵門)이다. 명실상부한 청나라 관문이다.

책문을 통과하니 비로소 청나라 백성들과 민가(民家)가 보였다. 벽돌집이었다. 민가를 보는 순간 소현은 눈을 의심했다. 만주벌판에서 수렵과 방목으로 살아가는 청나라 사람들은 허름한 움막집을 짓고 살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여지없이 빗나갔다.

벽돌집이 경이로웠다. 흙을 구워 집을 짓는다는 것이 신기했다. 조선의 백성들은 흙 담에 초기지붕을 얹고 살았는데 청나라는 벽돌에 갈대를 얹고 살았다.  흙으로 도기와 자기를 빚어 식기와 다기로 사용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벽돌을 만들어 집을 짓고 살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흙을 두부모처럼 장방형으로 빚어 불에 구웠는데 색깔이 하나같이 붉은색이었다. 조선에는 산이 많아 건축자재로 나무와 돌을 많이 사용했지만 드넓게 펼쳐진 벌판의 땅 만주는 풍부한 황토를 소재로 하여 벽돌집을 많이 지었다.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집을 지었는데 반듯하고 견고해 보였다. 집안에 들어가면 외풍 없이 따듯할 것 같았다. 조선 백성들의 집은 주춧돌에 기둥을 놓고 수수깡이나 갈대를 엮어 흙을 발랐는데 겨울이면 갈라진 틈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방안에서도 고드름이 얼 정도였다.

봉황산. 한국의 산을 닮아있다.
봉황산.한국의 산을 닮아있다. ⓒ 이정근

책문에서 사흘을 보낸 세자 일행은 심양이 있는 서쪽을 향하여 출발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벌판을 지났다. 얼마쯤 갔을까? 눈에 익은 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양의 조산(祖山) 삼각산을 닮은 산이었다. 봉황산이었다. 청나라 땅에서 조국의 산을 본 것처럼 기뻤다.

소현은 봉황산을 보는 순간 틀림없는 우리의 산이요 고구려의 안시성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생긴 모습도 그렇고 가슴에 와 닿는 느낌도 그랬다. 고구려의 요충 안시성에 대하여는 우리나라 학자들과 중국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할 뿐 지금 현재 정확한 위치를 짚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안시성의 위치를 ‘금사’ 지리지에 따라 만주 개평(蓋平) 동북방 탕지보(湯池堡)라 하는 학자도 있고 다산 정약용은 우리나라 강역에 관한 역사지리서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봉황산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는 요동성 해성(海城) 남동쪽 영성자(英城子)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소현세자와 달리 안시성의 위치를 중국 내륙 쪽으로 지나치게 서진시켜 비정하는 학자도 있지만 이는 난하요수설에 입각한 것으로 난하요수설(灤河遼水說)은 설일 뿐 검증된바 없다.


#압록강#구련성#호산장성#책문#봉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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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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