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선거구 가운데 갑·을로 나뉜 지역이 많다. 이번 4·9총선에서 '갑'보다는 '을'에 관심지역이 몰려있다. 정몽준과 정동영은 동작 '을'에서, 문국현과 이재오는 은평 '을'에서 대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곳에 버금가는 관심 지역구로 광진 '을'이 있다.
광진을이 관심 지역으로 부상한 것은 재기를 노리는 추미애 때문이다. 그는 2002년 대선에서 당시 노무현 후보로부터 정동영과 함께 차기 대권주자로 거명되었을 정도로 힘있는 정치인이었다. 이에 맞서는 박명환은 이명박 대통령의 팬클럽인 'MB 연대' 회장 출신이다.
추미애는 정통야당의 적자임을 내세운다. 추미애 후보 측은 그가 통합민주당에 가세함으로써 통합민주당은 '도로 열린당'이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킬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천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김대중의 정견을 가장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정치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는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열렬히 옹호한다. 참여정부 초기 대북송금 특검에 눈물을 글썽이며 반대 의사를 피력했던 그는 <조선일보> 기자에게 '사주 같은 놈'이라는 욕설을 퍼부어 여성 정치인으로서는 비범한 강단(?)을 보여주기도 했다.
15·16대에 광진을에서 당선된 그는 국정감사 최우수 의원으로 선정되는 등 의욕적인 의정 활동을 했지만 17대 총선에서는 노무현 탄핵의 역풍을 맞았다. 그 결과 당시 열린우리당 김형주 후보에게 패함으로써 당시 최대 이변 가운데 하나로 회자되었다. 그러나 이번 18대 총선에서는 현역 의원인 김형주를 제치고 무난히 통합민주당의 공천을 받았다.
58년 개띠생인 추미애 후보가 국회의원이 된 것은 12년 전이다. 그러니까 그는 38세에 국회 입문을 한 것이다. 이런 그에게 띠동갑으로 정확히 12살 어린 38세의 신인 후보 박명환이 도전장을 낸 점이 흥미롭다.
박명환은 지난 대선 당시 'MB연대' 회장을 지낸 변호사 출신이다. 그는 6명으로 출발한 MB 연대를 16만 명의 거대 조직으로 만듦으로써 탁월한 조직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권유로 출마했다고 말할 정도로 한나라당 내에서도 가장 이명박 색깔이 진한 정치 신인이다.
그는 지난 23일 한나라당 총선출마자 55명의 이상득 국회부의장 불출마 촉구 서명에 참여했다. 그는 'MB맨'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참여한 것이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오죽 했으면 '형님 공천'이란 말이 생겼겠습니까? 바닥을 훑고 다니며 민심을 파악한 결과로 그 일에 참여하기로 한 것입니다."'DJ 우먼'과 'MB 맨'의 흥미로운 대결추미애 후보는 이따금씩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을 토로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여성 정치인 가운데 추미애 의원을 가장 높이 평가하는 듯한 발언을 몇 차례 한 적이 있다. 그는 지난 17대 총선에서 실패한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가 충고를 듣기도 했다. 그때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성하기 위해서는 지역구 관리를 기본적으로 하면서 대외활동을 해야 한다"고 일렀다.
이런 충고를 귀담아 실천했기 때문인지 이번 총선에서 세간의 예상보다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그는 실수요자 위주의 주택정책과 실질적인 경로 복지정책, 그리고 내실 있고 저렴한 교육정책을 광진구민에게 약속하고 있다.
반면에 박명환 후보는 경제회복, 실생활 개선 그리고 구민 섬기기 등 다분히 이명박적(?)인 공약들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공천 전부터 바닥 다지기에 들어가 어제도 오늘도 광진구의 구석구석들을 누비고 다닌다.
광진구청 옆에 있는 한 커피점의 주인 이은숙(가명)씨는 박명환 후보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지가 참신해요. 공천 전부터 대형마트에서 봤어요. 벌써 우리 가게에도 세 번이나 다녀갔는걸요."광진을은 전통적으로 한나라당이 약세를 보여온 지역이다. 지난 23년 동안 한나라당이 승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번 총선에서도 통합민주당으로 기울어 있다. 지난 15일 <동아일보>와 MBC가 공동으로 '코리아리서치센터'에 의뢰해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추미애 45.5%, 박명환 29.0%로 차이가 드러난다.
추미애 후보 측에서는 이런 추세를 유지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추미애 후보 측은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자신감을 다 숨기지는 않았다.
"손학규, 정동영 후보 등과는 비교할 수 없지요." (천경배 총괄팀장)"원래 민주당 강세 지역입니다." (최동민 공동선대위원장)"우리는 맞대결 구도를 원하지 않습니다." (황인철 특보)"한나라당 인기가 그 사이에 많이 시들해졌어요"자양사거리는 광진을 지역의 중심이다. 추미애 선거사무실은 이 사거리에서 북쪽으로 100m, 박명환 후보 사무실은 동쪽으로 100m 정도의 거리에 있다. 자유선진당의 김홍준 후보 사무실은 추미애 선거사무실과 마주 보고 있다.
한나라당의 당협위원장으로서 이번 공천에서 탈락한 길기연 예비후보의 사무실은 사거리에서 서쪽으로 100m 자리에 있는데,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큰 활자로 박은 선거 현수막이 아직 철거되지 않은 상태다.
3월 24일 점심, 추미애 후보의 선거사무실에는 서민층으로 보이는 유권자들이 많이 와 있었다. 주로 호남 말씨가 들렸고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반면에 박명환 후보 사무실에서는 영남 말씨가 자주 들렸고 대체로 양복을 입은 중년 이상의 남성이 많이 드나들었다.
광진을에는 건국대학교와 세종대학교 그리고 어린이대공원이 있다. 하지만 대학생들의 총선 관심도는 아주 낮은 편이다. 교정에서 질문을 받은 7명의 남녀 건국대생들은 지역구에 누가 출마했는지조차 몰랐다.
이와 달리 어린이대공원 주변의 구민들은 총선에 대해 꽤 잘 알고 있었다. 한나라당의 박명환 후보는 자주 어린이대공원의 팔각정과 야외음악당에 산책 나오는 주민들에게 아침 인사를 하러 간다.
지난 8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자양동 골목시장을 방문했다. 이 대통령에게 도넛 6000원 어치를 팔았다는 '명동분식백화점'의 양삼봉(50)씨는 총선에 대한 시장 상인들의 관심이 아주 높다고 했다.
"아무래도 추미애를 더 잘 알지요. 이 대통령이 여기 왔을 때만 해도 한나라당 인기가 참 좋았는데 그 사이에 많이 달라졌어요."자양시장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슈퍼마켓 주인 이상춘(61)씨도 비슷한 말을 했다. 고향이 대구라는 이씨는 "요즘 이명박 분위기가 안 좋아졌지요. 박근혜를 너무 홀대하지 않았나 합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24일 오후 박명환 후보가 구의3동에 있는 어느 약국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박 후보는 약을 기다리며 앉아 있는 노인에게 허리를 굽히며 명함을 건넸다. 그러자 노인의 입에서 약간 뜻밖의 말이 퉁명하게 나왔다.
"추미애하고 붙었어? 지지율이 차이 많던데?""에이! 그런 거 묻지 마시고 그냥 찍으면 되잖아요."하지만 박명환 후보의 바닥 다지기는 일정한 효과를 분명히 내고 있었다. 다만 이명박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지고 있는 점이 그 효과를 반감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박 후보의 수행비서인 박상훈씨는 "지지율이 점차 좁혀지고 있다"고 했다.
한편 이 곳은 한나라당 당원협의회장으로 공천에서 탈락한 길기연 변수가 남아 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나오는지에 따라 표심에 변화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 후보나 박 후보 모두 길기연 예비후보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덧붙이는 글 | 김갑수 기자는 소설가로서 오마이뉴스에 팩션 <제국과 인간>을 연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