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랜 지병인 당뇨 합병증으로 눈이 어두운 친정 어머니. 쿠하가 그림책을 읽어달라고 하면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한 글자, 한 글자 읽어주는 쿠하엄마엄마(쿠하는 외할머니를 '엄마엄마'라고 부릅니다)에게 딸인 제가 선물한 책은 글자 없는 그림책 입니다. 글자가 없어서 할머니가 그림을 보면서 마음대로, 그날 그날 내키는 대로 읽어주면 되는 아주 편한 책이라 주저 없이 산 책이지요.

 겨우내 질리도록 읽어준, 그러나 아직도 쿠하의 눈사람 타령이 끝나지 않은 롱 런 그림책.
겨우내 질리도록 읽어준, 그러나 아직도 쿠하의 눈사람 타령이 끝나지 않은 롱 런 그림책. ⓒ 마루벌

할머니 무릎에 앉아 겨우내 들었던 <눈사람 아저씨>가 좋았던지 쿠하는 봄 기운이 완연한 데도 이 책을 들고 와서 읽어달라고 조릅니다. 처음 글자 없는 그림책을 대했을 때, 저는 살짝 당혹스러웠습니다.

이야기를 지어낼 필요 없이 그림으로 줄거리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어 그저 그림을 말로 전달해 주기만 하면 되지만, 왠지 글자가 없으니 매번 읽어줄 때마다 '지난 번에 뭐라고 말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해서 읽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럴 필요 없이 그저 할머니처럼 그날 기분따라 내키는대로 이야기 해주면 되는데 말이지요. 제가 '문자 중독 말기 환자'라는 걸 깨닫게 하는 책은 <눈사람 아저씨> 말고도 여럿 있습니다.

음악과 그림의 멋진 하모니 <노란 우산>

 글자 하나 없어도 아이와 긴 시간 수다스럽게 읽을 수 있는 그림책
글자 하나 없어도 아이와 긴 시간 수다스럽게 읽을 수 있는 그림책 ⓒ 류재수

비 오는 날 읽어주면 좋을 그림책으로 소개했던 <노란 우산>에도 글자는 없습니다.

글밥 없는 그림책은 상대적으로 더 오랜 시간 책장을 넘기지 않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림을 찬찬히, 오래오래 바라보게 되는 효과는 좋은 그림을 여유 있게 보도록 하는 느린 타이머 역할까지 해 줍니다.

특히 이 책은 그림들을 연상하며 작곡한 피아노 곡을 함께 들으면서 읽어,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그림책 입니다.

글자 하나 없어도 비 오는 날에 대해, 노랗고 빨간 우산에 대해, 피아노 소리에 대해, 봄비와 새싹에 대해 아이와 긴 시간 수다스럽게 읽을 수 있는, 끊임 없이 새 물이 솟아오르는 '수다 재료의 샘' 같은 책이기도 합니다.

혹여 글자 읽어주는 데 부담을 느끼는 증조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면, 살짝 이 책을 아이 손에 들려 할머니 할아버지 무릎 위에 앉혀주어도 어른들께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  

지구본을 돌리며 읽어주는 <여행 그림책>

 아이와 함께 세계 여러나라 풍경을 구경하는 책
아이와 함께 세계 여러나라 풍경을 구경하는 책 ⓒ 한림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때, 저는 사진이 훌륭한 여행책을 뒤적이곤 합니다. 사진은 별로 없고 지은이의 경험담만 잔뜩 늘어놓은 책 보다는 한 컷의 사진으로 모든 말을 대신하는 그런 책들을 더 좋아하는데요, 남의 신나는 여행 이야기 보다는 내 눈이 즐거운 게 더 우선이기 때문이지요.

아이가 '책 편식'을 하지 않게 다양하게 읽어주는 게 엄마된 자의 올바른 독서 태도이겠지만, 저도 인간인지라 어쩔 수 없이 제 마음에 드는 것, 아무래도 제가 좋아하는 책을 자주 읽어주게 됩니다. 일본인 그림책 작가 안노 미쯔마사가 쓴 <여행 그림책> 시리즈 가운데서도 저는 덴마크 편을 제일 좋아합니다.

안데르센의 나라, 동화의 나라다운 풍경이 읽어주는 저의 목소리마저 미국이나 스페인 등 다른 나라에 비해 더 들떠 있을 것 같은데요, 글자가 없어 처음 보는 풍경에 머뭇거릴 엄마들을 위해 이 책 뒷편에는 해당 쪽에 관한 설명이 간단하게 수록돼 있습니다.

우리동네와 다른 풍경을 보여주면서 왜 지붕이 뾰족한지 이야기해 주고, 편평한 세계지도보다는 둥근 지구본을 돌려가며 덴마크가 어디에 있는지 아이와 찾아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둥글다는 것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가면 이틀 안에 어디든지 다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글자가 없어서, 저도 가보지 않은 곳이어서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던 책이지만, 따뜻한 그림체로 마구마구 여행 충동을 자극하는 책입니다.

정성스러운 그림이 돋보이는 <수염 할아버지>

 정성스러운 그림이 돋보이는 <수염 할아버지>
정성스러운 그림이 돋보이는 <수염 할아버지> ⓒ 보림


      
글자 없는 그림책 가운데 빼먹을 수 없는 책 <수염 할아버지> 입니다. 작가 한성옥의 정성스러운 그림이 책장을 천천히 넘기게 하는, 그림에서 손 냄새가 나는 듯한 책이지요. 수염 할아버지의 멋진 하얀 수염은 그림 붓이 없을 때 붓이 되어주기도 하고, 빗자루가 필요할 때 주저 없이 빗자루가 되기도 합니다. 할아버지의 수염은 강아지 인형이나 호박 모양을 만들 수도, 생일날에는 멋진 나비 넥타이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글자 없는 그림책은 읽어주는 사람에 따라, 읽어주는 순간의 기분에 따라 매번 달라지는 요술 그림책 입니다. 엄마가 피곤한 날에는 대충 그림 설명으로 끝나는 날도 있고, 새로운 이야기를 원하는 아이에게 틀에 박힌 내용 전달에 그치게 되면 서로 지겨워 책을 읽는 일이 고역일 수도 있지만, 아이는 물론 엄마의 창의력도 키워주는 고마운 그림책임에 틀림 없습니다.  

아이가 27개월이 되면서 주변에서는 얼른 한글을 가르치라고 종용합니다. 푸름이 독서영재로 유명한 푸름이아빠의 책에도 일찍 한글을 가르치는 게 좋다고 나오지만, 저는 좀 느긋하게 기다리고 싶습니다. 글자에 갇혀 매번 똑같은 내용만 읽는 것보다는 글자를 모르기 때문에 책을 대할 때마다 쿠하만의 생각 시간을 더 길게 갖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게다가 전업주부로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일하는 엄마들에 비해 긴 저로서는 아이가 더 크기 전에 되도록 오래오래 제 무릎에 앉여놓고 귀와 볼 사이로 제 목소리를 흘려듣게 해주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엄마가 읽어주는 그림책 때문에 귀가 간지러워서 아이 스스로 한글을 터득해 버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만, 그게 엄마의 헛욕심이라면 학교 가기 전에나 슬슬 자음과 모음을 가르쳐도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글자 없는 그림책을 즐겨 읽어주며 '글자 가르치기'에 관해서라면 가장 게으른 엄마이고 싶습니다.


#그림책#글자#쿠하#음악#그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