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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문학과지성사
책표지문학과지성사 ⓒ 이명화
박완서씨의 소설을 읽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감회가 새롭다. 여성동아에 <나목>으로 문단에 등단했고, 그 후로 70세 후반에 든 나이에도 끊임없이 소설을 펴내고 있는 작가를 나는 참으로 좋아했고 좋아하고, 선망했던 것 같다.

오랜만에 펴낸 작가의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를 읽으면서 그동안 읽었던 작가의 소설들이 떠올랐다. <나목>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서 있는 여자> <아주 오래된 농담> 등 그 소설들을 읽은 지 아주 오래된 듯하다.

오랜만에 오래된 흙냄새 풍기는 어린 시절 뛰놀던 돌담길을 걷는 듯, 소설을 읽으며 예스러운 글을 대하니 아스팔트 냄새나 소음이 섞여들지 않은 오랜 옛길을 걷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소설은 작가의 필력에 담긴 묵직한 감동과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짧은 소설들 중에 애정이 가는 소설들을 들자면 <그리움을 위하여> <그 남자네 집> <촛불 밝힌 식탁> <후남아, 밥 먹어라> <친절한 복희씨> 등이다.

<친절한 복희씨>(문학과 지성사)를 비롯해 9개의 소설이 실린 짧은 소설들은 대부분 황혼기에 든 노인들의 삶을 다룬 내용이다. <그리움을 위하여> <그 남자네 집> <촛불 밝힌 식탁> <대범한 밥상> <친절한 복희씨> 등은 특히 노인 부부, 아니면 늙은 과부, 서울 혹은 서울 변두리에서 노후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마흔 아홉 살>은 코앞에 오십 나이를 앞두고 마흔아홉에 있는 여자의 고부간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앉은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여긴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경양식도 같이 파는 찻집은 자리가 꽉 차 주로 쌍쌍인 젊은이들이 내가 앉은 테이블의 빈자리를 잠시 넘보다가 나가버리곤 했다. 주인의 시선이 따가울 수밖에 없었다. 연탄 갈비집도 영업을 시작했을 시간이다. 그 가게 앞을 카바이드와 연탄불냄새를 그리워하며 천천히 걸어가는 늙은이가 눈에 선하다. 그는 누구일까. 애무할 거라곤 추억밖에 없는 저 처량한 늙은이는. 나는 마지못해 자리를 떴다. 쌍쌍이 붙어 앉아 서로를 진하게 애무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늙은이 하나가 들어가든 나가든 아랑곳없으련만 나는 마치 그들이 그 옛날의 내 외설스러운 순결주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 꼭지가 머쓱했다. 온 세상이 저 애들 놀아나라고 깔아놓은 멍석인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 남자네 집>의 한 대목에서 보듯 노인의 자리는 눈치를 보아야 하는, 그리고 '애무할 거라곤 추억밖에 없는 처량한 늙은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날로 남루'해지는 추억을 먹고 사는 노년을 그리고 있다.

나는 작가의 글에서 아스팔트길을 걷다가 갑자기 호젓한 둑길이나 오솔길을 만난 것처럼 숨쉬는 문장에 반갑기만 했다. '카바이드와 연탄불', '깔아놓은 멍석', '널빤지 문', '푸성귀', '아랫목', '후남이' 등 나를 옛날로 잠시 돌아가게 한다.

"후남이는 알맞게 부숭부숭하고 따끈한 아랫목에 편안히 다리 뻗고 누웠다. 그리고 움켜쥐고 있던 세월을 스르르 놓았다. 밥 뜸 드는 냄새와 연기 냄새와 흙냄새가 어우러진 기막힌 냄새가 콧구멍뿐 아니라 온몸의 갈라진 틈새로 쾌적하게 스며들었다. 잠깐만, 어머니가 후남아 밥 먹어라, 다시 한 번 불러줄 때까지 잠깐만 눈 붙이고 나면 모든 것이 다 좋아지리라.“((후남아, 밥 먹어라>p141)

참 따뜻한 풍경이다.<촛불 밝힌 식탁>은 가족과 함께하는 것이 그리운 노년을 그리고 있다.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라고 어디로 가야할지 서성대던 늙은이가 젊은이들을 향해 혼잣말하듯 그렇게 자식들과 사회에서 소외되어 가는 노년의 삶, 그러나 노년의 일상도 삶의 한 곳에 머무르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친절한 복희씨>에서는 노환이 남편을 돌보면서 겪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를 작가의 위트 넘치는 글로써 표현하고 있다. 가족, 혹은 그 누군가에게 사람들은 소속되길 원한다. 작가는 <거저나 마찬가지>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배고픈 설움이 제일이라지만 날 저물어서도 다리 뻗고 잘 잠자리가 없는 설움에다 대면 아무것도 아니다. 먹을 것은 몇 푼만 있어도 해결할 수 있는 먹 거리가 많은 세상이고 구걸을 하거나 아닌 말로 훔쳐 먹을 수도 있다. 잠자리는 얼굴을 안다고, 방이 많다고 내주지 않는다. 가족이나 내준다. 가족 사이로는 비집고 들어가 칼잠을 자도 푸근하다. 그게 바로 가족이 좋다는 의미인 것이다. 엄마의 뱃속도 잠자리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 세상이 따습고 포근하다는 걸 실감하게 하는 것도 잠자리이다. 가족이라는 말이 주는 무조건적인 평화롭고 따뜻한 느낌도 아마 이런 이 세상 최초의 감촉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리움을 위하여> <그 남자네 집> 등에서 50년대의 척박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이제 자식들 다 커서 결혼하고 손자 손녀들을 두고 있는 나이를 그리고 있듯이 작가 또한 그들과 같거나 비슷한 시기를 살고 있다는 점에서 큰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작가가 노년이기에 가능한, 인생의 한복판에서 비켜 서 있는 듯한 노년의 한복판에서 작가의 담담한 성찰을 소설에서 만날 수 있다.

작가는 불혹의 나이 마흔에 쓴 장편소설 <나목>에서 오늘까지 37년의 간격이 있건만, 아직도 현역에서 소설을 펴내는 그 열정과 근성, 그리고 필력에 무엇보다도 나는 감동을 받는다. 책의 말미에 '작가의 말'에서 9년 만에 창작집을 내었노라고 운을 뗀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글을 쓰고 있는 자신에 대해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나도 사는 일에 어지간히 진력이 난 것 같다. 그러나 이 짓이라도 안 하면 이 지루한 일상을 어찌 견디랴. 웃을 일이 없어서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이다.

언제였더라? 2002년도에 펴낸 산문집 <두부>에서 작가는 글쓰기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했었다. 땅 속으로 파고들지 못한 씨는 봄이 와도 싹트지 못 하듯이, '고독의 밑바닥을 치지 않고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고 말이다.

그 당시에도 글쓰기가 이젠 몸에 부친다고, 그 처절한 암중모색을 견딜 만한 힘이 없다고, 결국은 글쓰기란 것이 '가벼워지기 위해 썼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지금은 위에서 말한 대로 노년의 삶, 그 지루한 일상을 견디기 위해 또 자신을 웃기고 위로하기 위해 썼노라고 밝히고 있다.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증언의 욕구'로 시작했던 그 길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놓여나기 위해 썼고, 이젠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스스로 웃기기 위해 쓴다고 말하고 있다. 헐렁한 고무줄 바지를 입어도 남 신경 안 쓰고 편안할 수 있는 나이, 날을 시퍼렇게 세우지 않아도 되는 혼돈이 지난 자리에 있다.

전개와 결말이 다이내믹하지 않다하더라도, 인생의 연륜과 경험이 더 깊어지고 풍부해진 작가에게서 나오는 글맛이 오히려 오래 우려낸 진국인 것을 어쩌랴.


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문학과지성사(2007)


#친절한복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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