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티베트 '폭동'은 달라이 라마와 서구 열강이 배후 조종하여 일으킨 분열 책동이다."평소 조용한 성격의 변호사 우위빙(30)은 열을 내며 달라이 라마 14세에 대한 비난을 퍼부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 깡패조직의 우두머리처럼 망명정부를 세우고 반중 활동을 벌여왔다"면서 "본래 불심이 깊고 순박한 티베트 인민들이 서구 열강의 중국 분열 사주를 받은 달라이 라마의 간악한 음모를 제대로 모르고 폭동을 일으킨 것"이라고 성토했다.
1959년 3월 10일 발생한 대규모 독립투쟁을 기념하여 티베트 라싸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난 지 벌써 2주가 넘었다. 24일 쓰촨성 서북부 간쯔티베트자치주 간쯔현에서 200여 명의 승려와 주민이 시위를 벌이는 등 티베트 본토와 티베트인 거주지 각지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중국정부는 티베트와 티베트인 거주지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있다. 티베트 수도 라싸에서는 대대적인 가택 수색과 검거가 벌어지고 있다. 유력한 라마승들은 티베트 주요 불교사원 내에 강제 연금된 채 중국 공안의 감시를 받고 있고 일부 라마사원에 대한 식량 및 식수 공급이 중단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티베트 전역에 대한 통제에 나서는 한편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달라이 라마 14세에 대한 비난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중국 언론매체는 관영 CCTV를 통해 시위의 폭력성을 부각하는 화면만을 계속 방영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이번 티베트사태를 취재하려는 외국 언론의 취재를 방해하다, 26일에야 외교부 인솔 아래 베이징 주재 외신 10여 개 사의 라싸 방문을 허용했다.
강경 진압에 고통받는 라싸... 격분한 중국인들 "착취에서 해방시켜 줬더니"이번 티베트사태에 대한 일반 중국인의 반응은 어떨까. 중국 정부의 온갖 보도 통제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티베트 뿐만 아니라 칭하이·간쑤·쓰촨 등지에서 일어난 시위 상황을 잘 알고 있다. 특히 티베트와 접경한 쓰촨·윈난 주민들의 반응은 격렬하다.
쓰촨성 청두 주민 덩신(62)은 "중국은 봉건귀족과 라마승이 착취하는 농노제를 타파하고 티베트 인민의 생활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런 사태가 발생해 참담하다"고 밝혔다. 퇴직교수 출신으로 아프리카와 홍콩에 6년간 파견된 바 있는 덩은 "달라이 라마의 주장을 일면 이해한다"면서도 "티베트는 원나라 이후 중국의 일부분으로 분리독립이란 있을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윈난성 쿤밍에서 무역업을 하는 장치린(32)은 "이번 사태는 베이징올림픽을 맞아 말도 안 되는 분리독립을 시도하려는 달라이 라마 세력의 헛발질"이라고 단정지었다. 장은 "달라이 라마는 말로는 베이징올림픽을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인도에 머물면서 '조국'인 중국에 갖은 악담을 퍼붓곤 했다"면서 "올림픽으로 중국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자 자신의 주장을 극대화하려 대규모 폭동을 일으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학 교수로 있다 중국정부의 파견으로 프랑스에 유학중인 정자닝(30·여)은 "서구 언론이 너무 달라이 라마가 이끄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입장만 일방적으로 보도한다"고 주장했다. 정은 "티베트는 청나라 이후 중국의 일개 성으로 편입되어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았다"면서 "20세기 초 잠시 영국의 지배를 받은 시기 외에는 줄곧 중국의 영토였기에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다가 반환된 홍콩·마카오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고 말했다.
한족 "티베트사태는 달라이 라마가 사주한 폭동" 한목소리'티베트는 떨어질 수 없는 중국의 영토'라는 중국인의 확고한 믿음은 중국정부의 세뇌와 같은 교육과 선전에서 비롯된다. 중국은 러시아·인도·파키스탄·네팔·카자흐스탄·몽골·베트남·버마·북한 등 14개 국가와 2만1180㎞에 걸쳐 국경을 맞대고 있다. 국경문제로 인해 중국 사회주의정권은 인도, 옛 소련, 베트남과 치열한 국경분쟁을 치렀다.
중국에는 한족 외에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있다. 2004년 현재 중국 13억 인구 가운데 소수민족은 1억8600만 명에 달한다. 500만 명에 달하는 소수민족만도 좡족(1617만), 만주족(1068만), 후이족(981만), 먀오족(894만), 위구르인(839만), 투자족(802만), 몽골인(581만), 티베트인(541만) 등 9개를 넘는다.
다양한 민족 구성으로 인해 중국은 구·주·현 등 소수민족 자치지역을 설정,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하고 있다. 소수민족 거주지가 중국 내지와 다른 독자적인 언어·문자·종교·문화·풍습 등을 갖고 있는 배경을 고려한 것이다. 중국은 현재 네이멍구자치구, 신장위구르자치구, 광시좡족자치구, 닝샤후이족자치구, 티베트자치구 등 5개 자치구와 옌볜조선족자치주 등 30개의 자치주를 지니고 있다.
티베트는 1951년 인민해방군에 점령되면서 중국의 일부로 공식 편입됐다. 1965년 성립된 티베트자치구는 면적 126만㎢로 중국 영토의 1/8, 한반도의 6배에 달한다. 인구는 285만 명으로 전국 최하위다. 전통적으로 티베트인은 목축업으로 생계를 이어와서 작년 주민 1인당 평균소득은 중국에서 가장 낮은 2788위안(한화 약 39만원)에 불과하다.
중국은 오랜 티베트와의 교류 역사를 근거로 티베트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기원전부터 부족 단위로 분산됐던 티베트는 7세기 초 걸출한 통치자 송첸감포가 통일왕국 토번을 건국하면서 급성장했다. 세계제국 당나라 대군을 여러 차례 대패시키면서 위세를 떨친 토번의 압력에 견디지 못해, 당 태종은 641년 문성공주를 시집보내 화평을 청했다. 오늘날 중국은 문성공주의 출가를 '장한 민족 단결사의 일대 사건'이라고 포장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티베트가 본격적으로 자국 영토가 된 시기가 13세기 원나라 때라고 단정하고 있다. 당시 티베트 최대 불교 종파인 사카파는 원나라의 도움을 받아 최초의 정교합일 정권을 수립했다. 원나라 원제와 사카파 지도자인 사카 판디타 사이에 원이 티베트에 군사적, 물질적 지원을 해주고 티베트는 원 황실에 종교적, 정신적 지지를 제공하는 '최왼' 관계가 수립한 것. 중국은 이를 근거로 "티베트가 중국의 판도에 완전 납입됐다"고 주장한다(<티베트의 역사적 지위>[中國西藏的歷史地位, 민족출판사]).
명나라 때 중국의 통치 영역에서 벗어난 티베트는 1642년 겔룩파의 달라이 라마 5세가 서몽골 왕국으로부터 통치권을 넘겨받아 강력한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몽골 준가르부가 티베트에 진입하자, 청은 1720년 몽골 세력 축출을 명분으로 티베트에 진주했다. 청은 선후장정을 제정하고 주장 대신을 두어 티베트 행정을 감독했다. 중국은 이 시기부터 "티베트가 중국의 직접 통치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티베트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영토라는 인식을 확고하게 자리매김한다.
이에 반해 티베트 망명정부는 "원과의 관계는 라마와 시주의 종교적 공시 관계였을 뿐"이라고 반박한다. <티베트 정치사(Tibet: A Political History)>를 쓴 샤캅파는 "다루가치가 라싸에 있었지만 티베트 내정에 전혀 간섭하지 않았고, 왕 황실로부터 책봉이 있었지만 이는 사카 판디타와 관련 없는 일부 사카파 수령에게 해당할 뿐"이라고 적시했다. 사카파는 "청이 티베트를 잠시 점령하긴 했으나 바로 철수했고 티베트를 일개 행성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면서 "선후장정은 달라이 라마의 통치를 돕기 위한 행정규정이고 주장대신은 청의 연락사신으로 티베트의 행정과 군사 사무에 어떤 권한도 갖질 못했다"고 통박했다.
"티베트는 양보할 수 없는 중국의 일부" - "중국의 강변일 뿐"중국은 티베트에 대한 역사적 영유권 외에도 서구 열강에 의해 분리 시도가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1840년 영국과 아편전쟁 후 청조가 쇠락하자, 제국주의 열강은 중국 영토를 조금씩 집어삼켰다.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영국은 중국의 변란에 완충지를 둔다는 전략으로 티베트를 노렸다. 영국은 1903년과 1904년 잇달아 티베트를 침공, 라싸에서 쌍무조약을 체결했다.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간섭을 완전히 무력화한 것.
1912년 달라이 라마 13세는 남아있는 중국인을 강제 축출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가 이를 인정치 않자, 1913년 10월 인도 삼라에서 중국-영국-티베트 3자 회의가 열렸다. 영국은 '삼라조약'으로 불리는 11조의 조정안을 제시했다. 티베트를 내티베트와 외티베트로 분리하여 외티베트에서는 자치를 인정하고 중국은 외티베트에 관리와 군대를 파견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티베트와 중국 모두 반대했다.
회담이 무산되자, 1918년과 1930년 국민당은 티베트를 대대적으로 침공했으나 참패했다. 이에 자신을 얻은 티베트는 국공내전과 제2차대전기에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국제무대를 상대로 독립국가로 인정받으려는 행보였다. 20세기 전반기 티베트는 주권을 가진 완전한 독립 상태에 놓여 있지만, 중국은 "영국의 지원을 받아 들어선 지방 군벌정권과 같은 존재"로 치부하고 있다.
중국이 1951년 티베트 전역을 장악한 이후에도 티베트인의 무장독립 투쟁은 1970년대 초까지 지속됐다. 중국은 미국이 티베트 독립의 배후 세력임을 지적하면서 티베트 독립 세력이 서구 열강의 꼭두각시로 중국을 분열시킨다고 선전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티베트에 반공산주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티베트 독립 세력에 무기와 장비를 제공하고 직접 훈련까지 시켰다. 1959년 무장봉기 실패 후 달라이 라마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로 망명할 때 CIA는 국경까지 인도하고 음식과 무기를 공수 지원해주기도 했다.
19세기 말 제국주의 침략 후 더 복잡해진 티베트-중국 관계중국정부와 언론매체가 이번 티베트사태 배후로 인도 다람살라에 있는 달라이 라마 망명정부 산하의 티베트청년회를 지목하는 것도 서구 열강과의 연관성 때문이다. 티베트청년회는 티베트의 완전 독립 주장을 강령으로 내건 대표적인 강경파다. 7만여 명의 회원을 거린 이 조직은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주의와 자치노선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티베트청년회는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달라이 라마와 사실상 결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체왕 리그진 티베트청년회 회장은 17일 "베이징올림픽은 세계의 이목을 티베트에 집중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투쟁의 강도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은 올림픽을 개최할 자격이 없다"며 "달라이 라마는 온건노선을 버리고 중국이 티베트에서 물러날 때까지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티베트 강경파에도 중국 인민해방군에 맞설 군사조직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티베트청년회는 자체적인 역량을 강화하기보다는 서구 열강의 지원에 의존하여 중국정부의 공격만을 자초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 14세가 강경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비폭력과 자치노선을 견지하는 것은 혹독한 국제정치 현실과 내부문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서구 세계는 이번 티베트사태를 기점으로 언론매체가 앞장서 중국정부에 맹렬히 비난을 퍼붓고 있다. 하지만 전형적인 '중국 때리기'(China Bashing) 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지난 14일 미국 백악관과 국무부는 티베트에서 '민족 간 갈등'이 발생한 데 유감을 표시하며 중국이 '자제력 있게' 행동하고 달라이 라마와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작년 10월 미 의회가 달라이 라마에게 황금메달을 수여하고 조지 부시 대통령이 회견하는 등 중국과의 외교적 갈등을 불사하던 태도와 전혀 딴판이다. 유럽 각국도 중국정부에 유감에 뜻을 전하고 있지만 베이징올림픽 보이콧을 요구하는 각계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티베트 망명정부를 받아들인 인도도 중국과의 동반자적 관계 강화를 위해 중국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낮추고 있다.
대책 없이 서구에 의존하는 강경파 압박에 고민하는 달라이 라마한 티베트 지식인은 기자에게 "서구 세계가 티베트 문제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슈퍼스타와 같은 달라이 라마와 '중국 때리기'라는 국제정치의 견제 때문"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는 "티베트와 유사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신장위구르 문제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면서 "위구르인도 한족과 전혀 다른 역사·언어·문자·종교·문화·풍습 등을 지니고 막대한 지하자원 덕분에 독립 여건도 튼튼한데 서구 언론은 신장문제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쓰촨대학 한족 교수도 "국제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달라이 라마가 살아있기에 티베트문제가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중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진 티베트인이 오늘날까지 일사불란한 시위를 벌일 수 있는 것은 달라이 라마가 절대적 지도자로 자신들을 이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며 "달라이 라마가 죽으면 한동안 티베트문제는 서구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투쟁 동력이 낮은 티베트 자체의 문제도 달라이 라마에게 고민거리다. 티베트는 1989년 유혈봉기를 마지막으로 지난 20년 동안 별다른 저항 없이 중국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왔다. 50만 명이 거주하는 수도 라싸의 인구 가운데 절반은 이미 한족으로 채워졌다. 시위와 저항을 주도하고 조직할 도시 인구에 티베트인은 많지 않은 셈이다. 고산지대인데다 마을과 마을 간 멀리 떨어진 지리적 특성도 독립투쟁의 유기적 연대를 떨어뜨린다.
냉혹한 현실을 인식한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독립이라는 이상적 목표보다는 고도의 자치권 획득을 내걸고 중국정부와 밀고 당기는 협상을 하고 있다.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준 비폭력주의는 아픈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다. 1959년 달라이 라마 주도로 발생한 독립봉기는 수만 명의 목숨만 앗아갔고 수많은 티베트인들은 조국을 등져야 했다.
티베트-중국, '고도의 자치' 놓고 협상 중티베트 망명정부는 중국과 달라이 라마 귀국을 위한 협상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중국정부와 티베트 망명정부는 작년 여름 베이징에서 제6차 회담을 열었다. 티베트 망명정부는 홍콩·마카오와 같은 '고도의 자치'를 중국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즉 국방·외교를 제외한 행정권 전반을 달라이 라마에 부여하고 종교적 자유를 보장해 달라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정부가 일관되게 요구한 '하나의 중국' 조건을 받아들이고 망명 티베트인들에게 중국 지도자의 해외 순방 때 시위를 벌이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서방 세계를 돌며 티베트문제를 환기시키는 달라이 라마의 활동에 큰 부담을 느끼는 중국정부도 이번 사태 후에도 협상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 18일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이번 사태의 배후가 달라이 라마라고 비난하면서도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독립을 완전 포기한다면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예샤오원 중국 국가종교국장도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독립을 포기한다는 견해를 명확히 밝히면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귀환을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달라이 라마도 칭짱철도 개통 후 동화 바람이 거센 현실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중국과의 협상에 적극 임하고 있다. 현재 양측은 많은 사항의 절충에 성공했으나 특별행정구 설립을 놓고 첨예한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티베트 망명정부는 1950년대 당시 티베트 북부를 칭하이·간쑤에, 동부를 쓰촨·윈난에 분할하여 절반 정도로 축소된 티베트 영토를 원상 회복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본토 축소를 우려하는 중국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시난민족대학의 한 티베트인 교수는 "별다른 전략도 없이 서구세계만 바라보고 독립을 소리높이 외치는 망명정부 내 강경파는 티베트인들에게 피만 요구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대로 달라이 라마가 사망하면 중국정부는 또다시 꼭두각시 달라이 라마 15세를 세울 것"이라며 "달라이 라마가 하루 빨리 티베트로 돌아와 중국의 거센 동화정책과 무분별한 개발에 대응책을 세우고 후계자 양성에 힘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쓰촨대 교수도 "달라이 라마 측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면서 "중국정부의 조건을 받아들여 귀국한 뒤 라마불교를 믿는 티베트인·몽골인·만주족 등 소수민족의 지도자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