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류동, 가야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해인사를 나와 매표소가 있는 홍류동계곡을 향해 걸어간다. 지도를 보니 십릿길이다. 오랜만에 난 양성우의 시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을 흥얼거린다. 이 시는 노래로 만들어져 많은 민중가요 가수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됐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기나긴 죽음의 시절, / 꿈도 없이 누웠다가/ 이 새벽 안개 속에/ 떠났다고 대답하라 (시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일부)" 이 시 속에서 청산은 은둔의 땅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의 땅을 의미한다. 시 속 화자는 청산으로 가기 위해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누가 묻거든 "나 이미 큰 강 건너 떠났다"고 대답하라고 당부한다. 붉은 가을 단풍이 계곡물에 투영되어 물조차 붉게 보인다 하여 '홍류동'이란 이름이 붙은 그 계곡. 그곳엔 통일신라 시기 지식이었던 고운 최치원의 자취가 서려 있다. 그에게 있어 청산이란 현실에서 겪은 좌절을 피해서 들어간 은둔의 땅일 뿐이었다. 계곡 저편으론 울창하게 우거진 솔숲이 있다. 걸으면서 바라보는 계곡은 기암괴석들로 가득 차 있다. 참 아름다운 계곡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계곡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물이 거의 없다.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최치원이 은거 생활을 하면서 글을 읽거나 바둑을 두기도 하면서 휴식을 즐겼다는 농산정 근처, 홍류동계곡 초입에 닿는다. 계곡 저편에 아담한 농산정이 있다. 조선 숙종 때 문인이었던 정식(1683~1746)은 그의 문집인 <명암집>에 수록된 '가야산록'에서 이곳의 경치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入紅流洞. 紅流洞. 乃伽倻第一勝. 上下十餘里. 蒼壁屛開. 泉石如雪. 松檜翁. 花殘. 泛紅滿溪. 眞孤雲所謂春花與秋葉. 取向水中求者也. 石上. 書紅流洞三字. 乃孤雲筆也
홍류동에 들어가니 이곳은 바로 가야산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곳이다. 위아래 십여 리에는 푸른 절벽이 병풍을 펼친 듯하고 물가의 돌은 눈처럼 희었으며 오래된 소나무와 회나무는 울창하였다. 철쭉꽃 진 붉은 입이 시내에 가득 떠가고 있었으니 참으로 최치원이 말한 ‘봄꽃과 가을 낙엽을 물 가운데에서 취한다(春花與秋葉取向水中求)’라는 말과 같다. 돌 위에는 '홍류동' 세 글자를 새기었는데, 바로 최치원이 쓴 것이다. 옛 선비의 묘사가 아니더라도 계곡은 무척 아름답다. 예전엔 계곡을 건너가는 무릉교라는 다리가 있었다는데 홍수로 떠내려갔다고 한다. 무지개처럼 약간 곡선을 준 나무다리를 건너 농산정으로 간다.
최치원이 생애의 마지막에 이르러 은둔했던 곳
이곳은 신라말 유학가인 고운 최치원(857∼?)이 벼슬을 그만둔 뒤 전국 각지를 유랑하다가 마지막에 이곳에 들어와 은둔한 곳이다. 글을 읽거나 바둑을 두는 등 휴식처 역할을 했던 곳이라고 전한다. 최치원은 신라의 유교학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다. 당나라로 유학가 과거에 급제한 후,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병마도총인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토황소격문>이라는 글을 씀으로써 황소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귀국 후에는 정치개혁을 위해 힘을 쏟았으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관직을 버리고 그의 형들이 스님으로 있던 가야산으로 들어와 은거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이곳에 언제부터 농산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정자는 정면과 측면이 모두 2칸씩인 아담한 정자이다. 1922년 해체해서 다시 지은 것을 1936년에 다시 한 번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건물 네 방향에 농산정이란 현판이 하나씩 다 붙어 있다는 점이다. 자기현시욕이 강한 사람들이 빚어낸 촌극이다. 잠시 정자 안쪽에 붙은 편액들을 읽고나서 앉아 쉰다. 이곳의 이름이 비록 붉은 단풍이 물에 어리어 물까지 붉다는 홍류동이라지만, 여름 장마 끝에 나와 앉아 있을 때가 가장 좋을 듯싶다.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 정자란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계곡 아래로 내려가서 바위에 새긴 글씨를 들여다본다. 바위마다 사람들의 이름이 즐비하다. 바위에 글씨를 새기는 행위는 자연을 훼손하는 행위가 분명하다. 그러나 드물게는 이곳에 누가 왔다 갔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다시 한 번 정식(1683~1746)의 문집 <명암집>에 수록된 '가야산록'을 보기로 하자. 仙山一別勝賞. 難再. 一步一顧. 一詠一嘆. 有海環僧. 乃刻僧也. 刻余堂號姓各於紅流石面.將不免?鼠之踐. 苔蘇之侵. 終歸泯沒. 則其與曾不題名者. 抑何間耶 신령스러운 산의 아름다운 경치는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므로 한 걸음 걷고 한 번 돌아보고 한 번 읊조리고 한 번 탄식하였다. 해환이란 승려가 있었는데, 바로 새기는 일을 주로 하는 승려(刻僧)이다. 나의 당호와 성명을 홍류동의 바위 면에 새기었다. 장차 다람쥐가 밟고 다니며 이끼가 침범하여 마침내 없어질 것이니, 이름을 쓰지 않은 사람과 더불어 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새기는 일을 주로 하는 승려(刻僧)"도 있었다고 하는 걸 보면 바위에 글씨를 새기는 행위가 얼마나 조직적으로 이뤄졌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그냥 새겨준 게 아니라 돈을 받고 새겨줬을 터이다. 이 정석이란 선비께서도 거기에 동참해 마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름을 쓰지 않은 사람과 더불어 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라고 묻는 건 무슨 경우일까. 아마도 파고들수록 신비롭고 수상한 것이 선비들의 세계가 아닌가 싶다. 세상의 선악에 대한 분별마저 여의고
계곡 안으로 내려가면 최치원의 시가 적혀 있었다는 곳에 세운 '가야산홍류동고운제시석처'를 알리는 비가 서 있다. 1996년에 세운 돌비다. 글은 이지관 스님이 쓰고 중산 최종상의 글씨를 쓴 것이다. 고운 치치원이 입산시에 썼다는 시는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라는 시로 알려졌다.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늘 시비(是非)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롱산)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버렸다네
이 시를 새긴 바위를 제시석이라 하는데, 글씨가 희미해지자 우암 송시열이 해인사로 올라가는 오른쪽 암벽에 이 시를 다시 새겼다 한다. 후세 사람들이 그 자리를 최치원이 본래 시를 새겼던 자리로 잘못 아는 것을 막고자 이 비를 세운 것이다. '친절한 금자 씨'가 왔다가 울고 갈 만한 놀라운(?) 친절이 아닐 수 없다. '가야산홍류동고운제시석처'를 알리는 비 자체가 또 다른 파괴인 것을…. 다시 다리를 건너 한길로 돌아와 이곳저곳을 살핀다. 길가 오른쪽엔 그리 깊지 않은 굴이 있고 그 옆엔 '淨行陀彿接蓮臺(정행불타접연대)라 쓴 좁고 긴 석비가 서 있다. '정행불타접연대'란 불교의 '초발심자경문'에 나오는 말이다. "이욕염왕인옥쇄( 利慾閻王引獄鎖)'라는 구절과 짝을 이뤄 "이욕은 염라대왕이 지옥으로 인도하고 청정은 아미타불이 연화대로 모셔간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또 누가 새긴 것일까. 세상을 등진 선택은 과연 옳았을까
산 기슭으로 다가가면 최치원 선생의 기념비와 사당이 있다. 기념비 옆으로 난 계단으로 올라가면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학사당이다. 학사당은 문이 굳게 닫혀 있다. 할 수 없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비가 새는지 천막 천으로 지붕을 살짝 덮어 놓았다. 최치원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 가서 과거에 합격하여 당나라의 관리를 거친 다음 귀국하여 885년에 귀국하여 한림학사수병부시랑·서서감지사를 역임한다. 894년에는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빼앗은 토지는 돌려줄 것" 등을 요구하는 등 <시무책(時務策) 10조>를 진성여왕에게 상소하면서 문란한 국정을 바로잡을 것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얼마 후 관직을 버린 그는 이 홍류동 계곡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가 개혁에 실패한 까닭은 성골도 진골도 아닌 육두품 출신이라는 신분의 한계 때문이었다. 그가 어린 나이에 당나라 유학을 떠났던 것도 이미 그 한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국의 관리가 되어 영화를 누리기보다는 썩어빠진 현실을 개혁하고픈 욕구가 그를 고국으로 돌아오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실패는 어느 정도 예정된 것이었다. 최치원의 삶은 현실에서 자신의 개혁 의지를 펴지 못한 지식인의 말로를 보여주는 듯싶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최치원의 은둔은 이후, 홍류동은 많은 시인·묵객들에게 유람과 풍류의 이상향으로 각광받았다. 세상을 등진 그의 선택은 옳았을까. 그가 행로는 뒷사람들에게 바람직한 선례로 남았던가. 그의 마지막을 알고 있을 홍류동계곡은 말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이 땅에서 지식으로 산다는 건 힘든 일인가 보다. 혹 올여름, 이곳에 다시 와서 탁족이라도 하면서 앉아 있노라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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