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5일 오전 10시, 10분 전. 집을 나서는 발길이 가볍다. 오늘은 모터보트를 타고 장성호를 건너 복수초를 만나러 가는 두 번째 날이기 때문이다. 활빈당님의 전화 전언대로 조금 일찍 도착해 성산리 농업기술센터를 찾았다. 우리 백양야생화연구회 비닐하우스에 피어 있다는 깽깽이풀을 한컷 찍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그런데 시간을 보니 아직 30여분이나 더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닌가. 그동안을 어쩌란 말인가. 하우스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본다. 혹시나 하고 안을 기웃거리니, 아니나 다를까 한켠에 바로 그 깽깽이풀이 꽃을 피우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화분에 곱게 심겨진 그 녀석의 한쪽 꽃잎은 이미 벌써 지고 있었다. 활빈당님의 부언대로 오랫동안 피는 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 컷 찍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 아닌가. 할 수 없이 포기하고 눈으로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시간이 남아 기술센터 마당을 서성이지만 일행이 쉬 나타날 것 같지가 않다. 혹시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다. 그저 사람들이 심어놓은 봄꽃들이 포장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어디에도 카메라로 찍을 대상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 시간은 더 더디 갈 수밖에 없다. 일행은 아니 나타나고 시간도 아니 가고. 북하면사무소에 10시 40분까지 가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인 40분이 지나도 일행은 나타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활빈당님께 전화를 해 본다. 손전화를 닫으니 그때서야 비로소 차 한대가 들어서는데 아니 그 작은 차에서 여섯 분이나 내리신다. 낯익은 얼굴과 낯선 얼굴들이 섞여 있다. 그냥 얼버무려 대충 인사하고 말았다. 남학생은 나 혼자니 쑥스럽기 그지없다. 그래도 또 기다려야 한다. 유치원 선생님께서 안 오셨으니 어쩔 수 없다. 한참을 기다리니 튼튼한 차가 한 대 들어선다. 우리 일행은 모두 여덟. 그래서 작은 꼬마차인 내 마티즈는 두고 나누어 타고 출발했다. 북하면에 이르니 그곳에는 활빈당님과 보스님이 벌써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계신다. 우리가 타고 온 차 둘을 면사무소 주차장에 버리고, 우람한 차에 옮겨탄 뒤 호수 선착장으로 출발. 호수에 도착해 보니 우리보다 늦게 출발했던 보스팀이 먼저 모터보트에 승선하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인가 했더니, 더 가까운 선착장에서 예까지 배를 타고 왔단다. 우리 일행 열은 모터보트 한 대에 옮겨 타고는 아직은 차갑기 그지없는 수면 위로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먹을 점심거리들을 옮겨 실은 것은 물론이다. 고기, 야채, 떡, 고구마 등 많기도 하다. 그중에서 내가 들고 가던 고구마를 하나 먹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참았다. 키를 잡으신 우리 보스. 아주 천천히 보트를 모신다. 호수를 거의 건너자 물가의 산에서 뭔가를 찾으시는 듯, 중얼거리신다. "여기쯤이었는데…." "저기 노랗게 있네." 부회장님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 물가 산 중턱쯤에서 녹색과 노란색이 어우러진 무더기들의 모둠을 볼 수가 있었다. 언뜻 보기에 산수유가 피었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다. 복수초가 노랗게 피어 있는 것이 아닌가! 북쪽으로 응달진 곳이어서 나오는 길이면 햇빛이 거기에 닿아 더 자세히 볼 수 있다며 나올 때를 기약하자고 한다. 우리가 뭘 안다고 토를 달 것인가. 다시 모터보트의 엔진을 켜고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로 지난 번에 복수초 탐사를 와서 맛있는 요리까지 맛보았던 '시골풍경' 농장이다. 보트에서 내리는 우리를 멍멍이 가족들이 반겨준다. 가족이 일곱이나 된다. 지난 번에는 염소 가족이 우리를 반갑다고 맞아주었는데 이번에는 이들이다. 이들도 그새 바통을 넘겨줬나?
우리 일행은 물가에 배를 정박시키고 점심거리를 농장으로 날라, 천장에 매달았다. 멍멍이 가족을 경계하는 것이다. 마루에 그대로 두었다가는 멍멍이 가족 차지가 되어 버린단다. 오늘은 집주인댁 아들이 와서 농장을 손질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뒤로 하고, 우선 탐사길에 오르기로 한다. 대숲을 뚫고 오르는데 제비꽃과 큰괴불알풀꽃이 한켠에서 우리를 맞아준다. 지들만 한 겨울을 외딴곳에서 보낸 것이 억울했던 모양인지, 여기저기서 서로 손짓 한다. 비 온 뒤끝이라 습기가 많아 미끄럽다. 낙엽 밟는 바스락거림은 거의 없다. 한참을 가자 낯선 꽃나무가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활빈당님 왈, 히어리가 아닌가 싶단다. 그러면서 자신이 없다며, 내려가서 찾아봐야겠다고 한다. 한컷 찍고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후에 길마 가지나무로 확인되었다)
조금 더 올라가자 발밑에서 무언가가 얼굴을 빼꼼 내민다. 현호색이다. 현호색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예쁘다고 야단이다. 위로 오를수록 현호색은 더 많이 눈에 띄었고, 우린 사진 찍기에 바빴다. 현호색 중에는 꽃대까지 동반하고 땅을 뚫고 올라오는 놈이 있는가 하면, 아직은 가냘프기 그지없는 잎사귀만 내밀고 있는 놈이 태반이다. 이 녀석들이 모두 꽃을 피우는 때가 되면 아마 산자고로 장관을 이루리라. 말 그대로 지천이다.
엷은 청색을 띤 현호색이 주류를 이루고 뒤이어 연분홍빛 현호색이 따랐다. 혹시나 다른 색깔을 띤 녀석이 없나 하고 일행은 눈을 두리번거린다. "부회장님 여기 갈색 현호색 하나. 담아 보실래요?" 이걸 찾아낸 나는 자랑스럽다. 오늘의 장원감. 흰 현호색이란 놈이 아니 나오면 말 그대로 장원감이다.
가도 가도 현호색 밭이다. 아마도 메모리카드가 다 차 갈 듯하다. 이걸 보면 놓치기 싫어 한 컷, 저 걸 보면 또 놓치기 싫어 한 컷. 그러다 보니 건전지가 다 됐나 보다. 어쩐지 카메라에 소식이 감감하더라니…. 부리나케 건전지를 바꿔 끼우고 또 사진 찍기에 들어간다. 저 곱고 또한 고운 보라빛 대롱 속에 천고의 무슨 비밀 켜켜히 담았기에 누구도 모르는 심산 계곡 속에 숨었나
연푸른 청명함이 나를 듯 그 맵시에 두세 겹 떠오르는 날렵한 소리개여 전생에 담아온 인연 하늘 높이 날리네
낙엽과 바위돌 틈 살짜기 내민 잎새 초록빛 자랑터니 대공도 내밀어서 어느날 자랑하옵는 선녀같은 자태여
그래도 현호색 밭은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계곡을 따라 한참을 걸어도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복수초 밭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부회장님께서 은근히 걱정하신다. "이쯤에서 서서히 노란 꽃이 보여야 되는데 영 안 보이네." 계곡을 따라 오르던 우리는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한 50m를 내려오자 그곳에 보물들이 널려 있었다. 그것은 어느 정신 나간 부호가 객기를 부려 던져 놓은 금화밭이었다. 아니 조물주께서 불쌍한 중생을 위해 내려 주신 축복의 황금밭이었다. 우리 일행은 감탄 속에 사진 찍기에 바쁘다. 말 그대로 복을 주고 오래 살게 해 주는 축복의 풀. 많이 찍을수록 더 많은 복을 받기나 하는 듯 우리 일행은 다투어 사진 찍기에 바쁘다. 하늘은 정한 복을 남몰래 준다는데 어쩌다 감췄던 복 지천으로 드러내 한 세상 살다가 가는 중생에게 주시나
'제발, 많이들 찍으시고 더 많은 복을 받으시고 수를 누리시기를 축원하나이다.' 역시 여성분들이 준비성 있다. 남학생들은 그저 빈손이다. 그분들의 배낭에서 온갖 먹거리들이 쏟아진다. 빵과 배즙, 사과, 배 등 우리는 감사히 받아먹는다. 그전에는 몰랐는데 몇 개를 먹고 나니 오히려 더 배가 고프다. 아니 허기가 진다고나 할까. 우리 일행은 복과 수를 뒤로 하고 하산 길에 들어 내려오기 바쁘다. 빨리 가서 맛있는 삼겹살을 먹어야 하니 발길이 바쁠 수밖에 더 있는가. 내려오니 벌써 보스께서는 '고수'를 잔뜩 캐 놓으셨다. 쌈을 싸 먹는 거란다. "이거 아무나 못 먹어요. 먹어본 사람이나 먹을 수 있지요." 한 짓궂은 여성분이 냄새를 맡아보더니 한마디 하신다. "이거 홀아비 냄새 아니야?" 그 소리에 혹시나 하고 나도 고수를 들고 냄새를 맡아본다. 홀아비 냄새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상한 냄새인 건 틀림없다. 과연 내가 이걸 먹을 수 있을지…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었다. 그동안 삼겹살은 익고 있었다. 여자분들은 개울가에서 쌈거리 씻기에 여념이 없다. 올라오는 손길들이 빨갛다. 시냇물이 몹시 차서 그렇단다. 그러면서도 마다하는 이들은 하나 없다. 우리 모두 야외식사의 맛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 있기 때문일까? 오늘의 식단.
삶은 고구마, 떡, 쌈배추, 깻잎, 마늘, 당귀, 고수, 배추김치, 묵은배추김치, 쌈장, 김밥, 단무지, 그리고 현지 조달품 표고버섯, 지글지글 익고 있는 삼겹살. 후식으로 사과에다가 오렌지까지. 어쨌든 모두들 식성도 대단하다. 그런데 뭐가 하나 빠진 듯한가 보다. 결국은 우리 보스께서 한 마디 하신다. "진철아 알콜 안 가져왔냐? 차 트렁크에 한 박스씩 싣고 댕겨야 한당께." 결국 우리 보스, 또 주인댁 아드님을 부르신다. 뭐 담가놓은 술 없냐는 거다. 주인집 아드님 득달같이 가시오가피주 대령이다. 약술은 가져오지 말라 했는데도 이 순진한 주인댁 아드님, 총각임을 강조하면서 양은 주전자 가득 내온다. 약이라니까 너도 나도 한 잔씩 하는데 우리 부회장님이라고 빠질까? 한 잔 주욱 들이키신 소감은 고사하고, 표정 좀 보시라.
하나둘 젓가락을 놓고 뒤로 빠질 때쯤, 우리 부회장님 하시는 말씀. "이놈의 고기는 꼭 끝날 때쯤 맛있게 잘 익는단 말씀야." 옳은 말씀. 이쯤 되자 놓았던 젓가락을 슬그머니 다시 드시는 분도 계시더라나. 노릇노릇 익어 가는 삼겹살이 한층 먹음직스러웠다나 어쩐다나 아무튼 그렇다는 얘기다. "어이 주인장, 잘 먹고 뒷청소거리만 잔뜩 남겨두고 가네. 미안하네." 뒷처리는 멍멍이 가족과 주인집 아들에게 맡기고 우리 일행은 일어선다. 저 멀리 물가에 우리가 타고 갈 모터보트가 물결에 한들거리고 있다. '시골풍경' 간판(?) 밑을 빠져나오면서 우리는 다짐한다. 한여름에 또 오자고. 그러다 보면 이곳이 우리 백양야생화연구회 농장이 되지 않겠냐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배를 한 척 사야지 않겠냐, 그래서 불편하니 그만두는 게 어떠냐 등등 의견이 분분하다. 다음 탐사 코스는 단연 청노루귀.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데 괜히 내 눈치들을 살살 보신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말이다. 내가 바람꽃이나 보러가자고 할까봐 미리 선수치는 건가? 바람꽃 탐사를 포기한 지 한참 오래 되었다고 해도 믿는 척만 한다. 나도 실은 마음 속으로는 언제고 꼭 가고야 말리라 하고 다짐한다. 배가 움직인다. 출렁거린다. 요동을 친다. 우리 보스님 심통이 작동하신가 보다. 피칭과 롤링을 반복하던 우리 모터보트. 물길을 하얗게 가르더니 못 이기는 척 건너편 선착장에 배를 대고 만다. 승객들은 그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마도 이랬으리라. '안 죽고 살았노라. 휴우.' 다시 우리 일행은 두 대의 차에 나누어 탑승하고 청노루귀를 찾아 출발했다. 그 귀하다는 청노루귀야 잘 버티고 있어라, 제발이지 오늘은 공치게 하지 말아 다오. 우리 일행이 오랜 시간을 달려 도착한 담양군 대덕리 야산. 숲속을 더듬어 가는 일행의 눈들이 번뜩인다. 어딘가에서 청노루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기대로 이리저리 헤맨다. 드디어 찾고 찾던 청노루귀를 찾았다. 어느 날 뒷산에를 혼자서 오르다가 아 깜짝 놀랐다네 발 아래 보고서는 평생을 오갔으면서 노루귀를 몰랐네 집 뒤에 피어나서 한껏은 제 자랑을 해대는 그 녀석을 한 켠에 두고서는 저 멀리 낯선 곳에서 청노루귀 찾았네
역시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청노루귀는 물론 백노루귀까지 만난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감사 또 감사. 우리 일행은 청노루귀, 백노루귀에 취한 기분 그대로 석양을 향해 내려가는 해님의 꽁무니를 따랐다. 갈 때 급하던 걸음을 이제는 여유롭게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축복받은 하루였고 모든 이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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