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가 우리은행 주차장 쪽에 그 흔한 간판 하나 걸리지 않은 아담한 공간이 바로 지난 2월 25일 문을 연 '길담서원'이다. 사실 소문 없이 조용히 문을 연 '길담서원'은 여느 책방과는 아주 다르다.
우선 길담서원은 서점임을 알리는 간판이 걸려있지 않아 개인 서재에 들어서는 느낌이 든다. 안으로 들어서면 책으로 가득 차 그저 얼른 원하는 책을 사 가지고 나와야 하는 여느 서점과 다르게 차분히 앉아 쉴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책 한 권을 사며 편안한 기분으로 앉아 다른 책 두서너 권의 내용을 머릿속에 담아 가지고 나와도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책방이라기보다 사랑방이나 개인서재. 유럽의 살롱을 연상시키는 그곳은 차와 음악, 책 그리고 담론이 넘쳐나는 문화의 산실처럼 보였다.
칠순을 바라보며 시작한 '삼모작'
길담서원은 한명숙 전 총리의 부군 박성준(68) 성공회대 교수가 오래 간직했던 개인의 꿈을 실현시킨 공간이다.
박 교수는 머릿속에 오랫동안 구상하고 있던 계획을 실천으로 옮기기 전 대학로의 '이음아트', 부산의 '인디고 서점', 프랑스의 '셰익스피어&컴퍼니' 등을 염두에 두고 사전 답사도 잊지 않았다. 늘 하나의 꿈처럼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에 공간이 발견되자마자 머릿속 디자인을 꺼내어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문을 열 수 있었다.
박 교수는 사랑방 문화나 프랑스의 살롱과 같은 문화공간을 염두에 두고 책방을 열었다. 특히 그는 책으로 빼곡하게 차 있어 사람이 책에 짓눌리는 것을 경계한다. 사람과 책이 어우러져 숨을 쉬는, 마치 책의 미술관에 들어선 것 같은 공간, 음악과 사람과 담소가 있는 공간, 샘터와 같이 신선한 물을 마실 수 있고 문화적 갈증을 채울 수 있는 곳이 없을까를 늘 생각했다.
그이는 책방이기는 하되 책방 같지 않은 책방, 책을 장식 삼아 차를 파는 북 카페가 아닌 어디까지나 책방이자 휴식과 문화의 공간이 되는 새로운 개념의 북 스토어를 생각해 왔다. 그는 또한 반드시 작은 공부방이 딸려 있는 그런 곳을 구상했다. 자금의 한계 때문에 처음에 그림을 그린 공간만큼은 되지 못했지만 대체로 원하던 그림이 실현된 공간을 통인동에 마련하게 됐다.
그는 "머릿속에 들어 있던 공간이 실현되었지만 공간이 좀 비좁아 공부방이 좁고, 책 수납공간이 좀 협소한 감이 없지 않지만 그런대로 만족한다"며 미소를 지었다.
여느 서점과 다른 '길담서원'... "이 공간은 기필코 살아남아야 한다"
길담서원이 여느 서점과 다른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독자 스스로 주체가 되어 이어가는 프로그램인 독자가 추천하는 '좋은 책 100권 우물터', 박 교수가 지도하는 영어강독 모임인 콩글리쉬 서원 등 색다른 프로그램은 상당히 눈길을 끈다.
영어 강독 모임에 대해 묻자, "책만 팔아서는 절대로 현상유지가 되지 않을 것 같다"며 "공부방에서 공부를 가르쳐서 최소한의 유지비를 충당시키려고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던 것"이라고 한다.
사실 그곳에서는 그 흔한 토익·토플 책과 수험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에게 '인문학, 철학, 생태. 환경 등의 서적만 고집하면 서점이 유지되겠는가'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군가 고집스럽게 이런 서점을 만들어야 이런 형태의 서점이 자리를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서점의 생사여탈권은 바로 이곳을 찾는 분들의 손에 달렸다. 살리려면 살리고 죽이려면 죽여라. 밥을 먹어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또 배가 고파지지 않는가?
책도 마찬가지다. 좋은 책을 소화시키고 나면 갈증이 생겨서 자꾸자꾸 이 공간을 이용해 주셔야 모처럼 생긴 이런 문화공간이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내가 칠순이 가까운데 내게 힘이 남아있는 한 버티려고 한다. 이 공간은 기필코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서 뜻이 맞는 젊은 친구를 만나서 서점 바톤 터치를 확실하게 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이 서점이 살아남아야 바톤 터치를 확실하게 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답하며 환하게 웃는 그는 영락없이 꿈꾸는 소년이었다.
그가 칠순을 바라보며 시작한 '삼모작'의 꿈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문화 공간에 목마른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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