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4일)은 다섯 번째 절기이자 봄 밭갈이가 시작된다는 청명(淸明)이고 내일은 식목일이자 한식(寒食)입니다. 방안까지 들어온 따사로운 아침 햇볕은 상쾌한 하루를 약속하고,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은 가까운 유원지에라도 다녀오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하네요.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로 시작되는 흘러간 유행가가 떠오르는데, 늦바람이 나려는 모양입니다. 하긴 1년 가까이 아내와 떨어져 살면서 밥을 해먹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만도 하지요.
완연한 봄이라서 그런지 마음이 들뜨면서도 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거기에 이사 준비, 친구 딸 결혼식 참가, 진흙탕보다 더한 선거판 등으로 머리가 어지러운데 밥맛까지 도망가버려 며칠을 고생했습니다.
평소 밥이 최고의 보약이라고 강조해왔고, 건강해야 뭐든 할 수 있는 것인데 걱정되더라고요. 해서 걷는 운동을 조금 늘리고 반찬 종류도 바꿔보기로 하고, 작년 여름에 즐겨 먹던 '상추쌈'으로 밥맛을 잡아야겠다는 각오 아래 '밥맛 잡기' 계획을 세웠습니다.
상추장수 할머니와 사귀다
계획을 실천하려고 며칠을 빠지지 않고 장엘 다녔습니다. 오늘도 다녀왔는데 구포 장은 장날이 아니어도 활기가 넘치고 부산 사투리가 귀를 따갑게 합니다. 그만큼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가 되겠네요.
시장을 구경하다 엊그제 상추를 많이 담아주셨던 할머니를 찾았습니다. 마침 상추와 쑥갓 등을 길가에 펼쳐놓고 담배를 피우고 계시더군요. 두어 번 사다 먹은 것도 인연이라고 반가워하며 다가가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알면서도 물었지요.
"처넌이요 처넌. 상치가 맛있다 아이가 언능 사가시기요" 하시기에 웃으며 천 원짜리 한 장을 내밀면서 "엊그제 할머니에게 상추를 사먹었는데 싱싱하고 맛이 좋아 오늘 또 왔으니 많이 주셔야 합니다" 했다.
엊그제도 사갔는데 맛이 좋아 또 찾아왔다고 하자, 할머니는 기분이 좋은지 상추와 쑥갓을 한주먹 더 집어주며 "마이 묵고 건강하이소"라고 하시더라고요.
"할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 좋아했던 아주머니와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그분도 손이 크고 말씀도 재미있게 잘하셨거든요. 마음이 넉넉하고 화끈하신 할머니와 맛있는 상추를 사진으로 찍어서 식구들에게 자랑해야겠네요. 그러니 폼을 멋있게 한 번 잡아보세요.""야!! 쪼고라진 할매를 사진 찍겠다카는 냥반은 첨 안보능가…. 찍을라카믄 기왕에 예쁘게 찍어 보이소."할머니는 잘 찍으라고 하시면서도 수줍은지 멋쩍게 웃으시더라고요. 대화를 좀 더 나누고 싶었지만, 손님이 오는 바람에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2∼3일에 1천원씩 매상을 올려주겠지만 할머니는 확실한 단골을 하나 잡았고, 대화 상대가 없는 저는 할머니 친구를 한 분 사귀게 되었습니다. 심상치 않은 남북관계와 여야관계도 할머니와 저의 경우처럼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감사한 마음이면 양념간장도 보약오늘 장을 보는데 2천원 밖에 들지 않았지만, 앞으로 2-3일은 시장에 나가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배추김치와 파김치를 포함, 멸치조림·콩자반·고춧잎·김 등이 냉장고에서 버티고 있으니까요.
반찬을 만들고 상추를 씻으면서도, 운동장처럼 둥글고 넉넉한 얼굴에 순박함이 엿보이던 할머니 모습이 떠오르면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더군요. 할머니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도망간 밥맛이 반절은 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쌈장은 사놓은 게 있으니 됐고, 양념간장을 만들어야겠더라고요. 해서 작은 대파 하나를 잘게 썰어 손목이 아프도록 다졌습니다. 다진 대파와 간장을 섞어 종지에 담고, 볶은 참깨와 참기름을 약간 떨어뜨리고 나서 고춧가루를 적당히 넣어 숟가락으로 휘저으니까 고소하고 상큼한 양념간장이 만들어졌습니다.
상추쌈은 쌉쌀한 맛이 나는 쑥갓을 넣어야 제 맛이 나면서 잃었던 입맛도 빨리 찾을 수 있습니다. 맛을 음미하며 최대한 천천히 먹어야 효과가 좋고요. 보약이기 때문이지요. 상추쌈이 무슨 보약이냐고 묻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만든 음식은 양념간장 하나도 보약으로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먹습니다. 그러니 보약이라고 할 수밖에요.
제 밥상에는 콩자반과 멸치조림, 파김치가 빠지지 않고 오릅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영양소가 많은 음식이기 때문이지요. "콩 한 말로 청국장을 해먹으면 소 한 마리 잡아먹은 것과 같다"라는 말을 되뇌던 돌아가신 어머니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있기 때문에 꼭 챙겨 먹습니다.
코흘리개 시절, 저희 집 단골 식객이었던 '난순이네 엄니'와 많이 닮아서인지, 밥을 먹으면서도 '상추장수' 할머니가 자꾸 떠오르더라고요. 다행스럽게도 할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지어지는 입가의 미소가 도망간 밥맛을 잡아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밥맛 잡기' 작전은 상추장수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어렵지 않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해서 올해는 돈도 덜 들고 영양가도 풍부한 '상추쌈' 먹는 날을 작년보다 늘려볼 계획입니다.